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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Apr 15. 2024

무계획이란 이름의 사치

P, J, 그리고 M

마지막으로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어디론가 떠났던 게 언제였던가 돌이켜 보니, 벌써 5년 전 겨울의 일이다.


대입 시험을 위해 후쿠오카에 1박 2일을 머물며 밤거리를 정처 없이 헤맸다. 시험장 위치를 파악하겠다는 되지도 않는 핑계를 대며 친구에게 잠시 나갔다 오자는 제안을 툭 건넸는데, 선뜻 승낙해 내가 도리어 놀랐던 기억이 난다. (작년 7월 에든버러에서 만났을 때도 그 친구는 어딘가 엉뚱한 건 그대로였다.)


일본 차들은 거꾸로 다닌다는 둥, 저기 백화점은 영업시간이 몇 씨까지겠냐는 둥 쓰잘데 없는 소리를 늘어놓다, 퇴근하는 직장인의 물결이 횡단보도를 가로질러 가고, 이내 이자카야의 불이 하나 둘 들어올 때 즈음이 돼서야 우리는 식당을 찾아 나섰다. 도무지 들어갈 만한 식당이 - 미성년자였기에 이자카야는 패스 - 없어, 결국 체인으로 운영되는 덮밥집에서 규동 하나와 이름 모를 덮밥 한 그릇을 시켜 먹고, 오는 길에 배가 꺼져 돔베 키츠네 가락국수 하나를 편의점에서 사 먹었다. (내 식사량에 경악했던 친구를 향한 멋쩍은 웃음은 덤이었다.)


그렇게 졸업. 이후 많이도 떠났건만,
계획 없이 떠난 여행은 손에 꼽고,
개중 성공한 여행은 전무하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졸업 여행으로 떠난 도쿄에서는 지진 난 밤에 사케를 많이 마셔 (지진 탓에 머리가 울렸던 것으로 해두자. 액정도 깨 먹었다.) 츠키지 시장을 못 갔을 뿐 계획했던 장소를 모두 둘러보았고,


중학교 친구들과 떠난 대만에서는 친구 녀석이 비행기에 여권을 내려놓고 와 오밤중에 숙소를 향해 2시간을 걸었음에도 동트기 전, 왕복 1시간 거리의 우육면 집에서 한 사발을 해치우고 (이건 계획에 없었지만, 그 이국적인 향을 도무지 외면할 수가 없어, 숙소에 돌아온 후에 마음 맞는 친구 둘을 끌고 나갔다. 끌려 나간 친구들도 만족했다.) 4시 30분 침대에 누운 후 6시에 칼같이 기상해 일정을 소화했다. 그날 우리는 5만 3천 보를 걸었다. (무계획만큼이나 치명적인 게 일그러진 계획이다.)


< 밤의 공산성. 인생 최고의 밤 중 하나였다. >


결이 비슷한 고등학교 친구와 3주간 떠난 국내 차량 일주 역시 당시 내 나이가 만으로 19세가 안돼 대전의 호텔에서 숙박을 거절당한 (주류 관련 법과 숙박 관련 법의 적용 연령이 다른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것을 제외하고는, 그리고 낮의 공산성이 너무 아름다워 밤에 다시 찾은 것을 제외하고는 전부 계획대로 움직였다.


또 다른 동창과의 첫 번째 유럽 배낭여행은 버스 한 대 놓치면 두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아말피와 포지타노, 그리고 계획 없는 지출이 불가능한 인터라켄을 포함해 자연스레 모든 일정을 짰어야만 했고, 미국 생활 도중 다녀온 갈라파고스, 니카라과, 과테말라 등지로의 여행 역시 현지 교통편이 부실한 데다 방학은 짧기까지 해 분 단위는 아니더라도 시간 단위의 계획이 필요했다.


10개국을 거치며 예술사와 음악사를 배우는 여름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3번째 유럽 여행은 애당초 모든 게 짜여 있었고, 여름방학을 맞아 찾은 아조레스와 마데이라에서 역시 대체적으로 계획에 따라 움직이거나 계획이 없을 때는 그저 하루를 흘려보냈다. 13개국을 찾은 지난 가을학기와 16개국을 찾은 이번 봄학기 역시 비슷했다.




< 삿포로, 인터라켄, 터키, 그리고 태평양 두 섬의 기억 >


그렇게 그간 내가 떠난 여행을 순위 매기면, 계획된 여행의 양 끝을 무계획이 감싸고 있다.


계획 없이 떠났던 삿포르 여행, 첫 인터라켄 여행, 터키 여행, 그리고 뉴칼레도니아와 타히티 여행 속에서 나는 가장 행복했고, 동시에 계획 없이 떠났던 도미니카 공화국, 세르비아, 키프로스, 바하마, 그리고 리히텐슈타인 여행 속에서 가장 불행했다. 물론, 그 틈바구니에 끼여있는 건 다른 계획적이었던 여행들.


여행 속에서 성공과 실패를 찾는 것이 무의미하다 한다면 반박할 말은 없지만, 그리고 여행의 목적이 달라 성공을 정의하는 방식 역시 다를 수 있다는 점에는 십분 동의하지만, 나는 '일상과 다를 바 없는 여행'을 성공하지 못한 여행으로 규정하며, '일상보다 고단한 여행'을 실패한 여행으로 규정한다.


기준이 전적으로 자의적인 데다 '고단'은 경우에 따라 - 고산병에 씨름하는 친구의 배낭을 대신 짊어지고 아카테낭고를 오른 건 분명 더없이 고단했지만, 동시에 더없이 보람찬 성공이었기에 - 달리 정의될 수 있음도 분명 인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내게 무계획은 사치였고, 당분간 부리지 못할 사치일 것이며, 


계획하지 않은 여행은 실패한 여행일 것이다.


< 변주: 계란국 + 김 >


여행자로서의 화려한 삶 뒤에는 고단한 일상을 살아가는 내가 있다. 복잡한 유체역학 문제에 절망하며 밤을 새우고, 지난 한 달간 기숙사에서 먹은 음식이라고는 간장계란밥이 다인, 툭하면 굶고, 어쩌다 밥을 바닥에 엎어도 흘린 걸 주워 담아먹는 평범한 대학생이 있다.


졸업 전까지의 여행은 온전히 부모님께서 계획한 여행이라 돈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계획이 있다 한들 관심이 없었고, 관심이 없다 한들 문제가 될 게 없는, 고민할 것 없이 몸만 갔다 와도 되는 편한 여행이었다. 아이 혼자 힘으로는 꿈도 꿀 수 없는 사치스러운 여행이었다.


지금의 여행은, 그리고 홀로 서기 전까지의 여행은 돈 걱정으로 점철된 여행이다. 어찌 떠날 수 있다는 점에는 늘 감사하나, 2.38유로의 자두 850그램과 2.27유로의 자두 830그램 중 무엇을 사야 할지 고민하며 15분 거리의 슈퍼마켓을 오가는 여행인 것이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내가 묵었던 라 로마나 지역의 해변가에는 힐튼 리조트가 늘어서 있었다.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을 따겠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덜컥 가장 저렴한 숙소를 예약한 나는 숙소 바로 뒤편의 공터에서 새벽 2시까지 진행되었던 축제에 밤잠을 설쳤다.


비행기 스케줄 변경에 동의를 누르지 않아 100유로를 날린 후 도착한 세르비아에서는 통장잔고를 확인하니 돈이 30불도 없어, 빵 두 개로 이틀을 연명했으며, 바하마에서는 우버 부를 돈이 없어 2시간 30분을 걷다 졸도할 뻔했다. 새벽에 도착한 리히텐슈타인에서는 문 연 식당 중 도무지 4만 원 이하로 끼니를 해결할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아, 슈퍼마켓을 찾기 전까지 밥을 굶었다.


< 하늘만 욕 나오게 예뻤던 코스타리카에서의 마지막 날 >


그리고 계획이 일그러졌던 코스타리카, 마데이라, 리투아니아, 크로아티아 등지에서는 계획하지도 않은 것을 하려 하니 돈이 많이 들어 하루들을 그렇게 숙소에서 무의미하게 흘려보냈다.


일상과도 다를 바 없이, 고단한 여행의 나날들이었다.


공통점은 단 하나. 충분히 알아보지 않고, 계획하지 않고 떠난 것.


중간고사에 정신이 없어, 다른 모든 것은 확인했음에도, 비행기 스케줄 변경 확인이라는 간단한 업무 하나를 해야 할 일 목록에 추가하지 않아서는 안 됐고, 편도 36,000원이라는 티켓값에 혹해 대중교통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휴양지로 떠나서는 안 됐으며, 굳이 나라 하나 더 가보겠노라고 버스 티켓 하나에 6,000원 하는 곳을 찾지 말았어야 했다.


이 모든 경험이 피와 살이 됐고, 나의 여행력 증진에 보탬이 된 것은 분명 하나, 그럼에도 다시 그때로 돌아가 무계획이라는 이름의 사치를 부리겠는가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단언컨대 "아니오."다.


적어도 지금의 나는 사치를 부릴 형편이 안된다는 사실을 뼈에 새긴 나날들이었기에...


< 헝가리에서의 일탈 >


배낭여행으로 포장한들 대학생에게 여행은 본질적으로 일탈적이며, 사치스러운 행위다.


비행기 티켓을 구매한 순간부터, 숙소를 예약한 순간부터, 일상에서 벗어나 - 대체로 정도가 지나치게 - 혹은 소비를 합리화하며 - 돈을 쓰며 생활하는 행위다.


일상에서의 나는 여행을 위해 궁핍함을 감수하고 이는 지극히 당연하며, 불평할 수 없는 일이다. 일상에서의 고단함이 지금까지의 나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도착한 여행지에서마저 일상과 다를 바 없이 하루를 그저 흘려보내고, 일상보다 의미 없이 고단한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무계획이라는 이름의 사치를 부리는 사람들이 가끔은 부럽다.


그 대책 없음이, 아니 무계획이라 포장된 '여유'가 부럽다.




오늘 아침, 애틀랜타에서 건너온 조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파리로 떠난 친구에게 문자를 한 통 받았다.


"있잖아. 우리가 오늘 오전 9시에 노르망디에 가기로 했는데, 10시에 일어나니까 전부 자고 있는 거야. 나만 일어나서 정말 조용하고. 너무 좋더라."


"그래서 노르망디는 갔어?"


"아니. 빵집에서 빵 좀 사다가 아침 먹고 (점심이긴 하지만) 쇼핑했지. 편하더라. 최고의 하루였어."


이번 학기에만 룩셈부르크, 영국, 아이슬란드, 독일, 포르투갈, 그리고 모로코를 같이 여행한 친구에게 최고의 하루가 계획 없이 가족과 함께 한 (이게 컸겠지만) 하루라는 사실, 그리고 내가 가장 즐겼던 여행들 역시 계획 없이 가족과 함께 한 (이게 컸다) 나날들이었다는 사실이 어딘가 슬프게 다가왔다. (동생은 재수 중이고, 부모님은 해외여행은 체력적으로 버겁겠다 하신다.)


< 인터라켄에서 포착한 신라면. 가격은 묻지도 못했다. >


비용 절감을 위한 끝없는 계획의 굴레.


인생은 B(irth)와 D(eath) 사이의 C(hoice)라는데


내게 여행은 J와 P 사이의 M(oney)만 같다.


만족하는 법부터 배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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