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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Apr 16. 2024

칼 든 괴한은 왜 나를 쫓았나

2023.11. 04: 풀린 끈

돌이켜 보면, 인간의 행동에서 이유를 찾는 것이 무의미할 때가 있다.


이미 검어 흐린지 알 길이 없는 밀라노의 밤하늘과 광장의 대리석 바닥, 그리고 화강암 거리 틈새를 파고든 후 이내 양말을 적셔오는 장대비의 인과처럼 비교적 명확한 관계들이 있다면,


“넘어지겠다.”, 명확하나 온전치는 못하며, 문제가 생기기 전까지는 들여다보지도 않아 일상적으로 스쳐 보내는, 이를테면 풀린 신발 끈을 언제 묶을지와 같은 – 조금 후, 지금 바로, 그러다 고꾸라지고 마는– 관계도 있는 것이다.


맥도널드에서 밤을 새겠다는 결정 역시 그러하다.


24시간 영업, 5분 남짓한 광장과의 거리, 결정적으로 50유로, 한국 돈 7만 원에 달하는 숙박비 등 여러 이유를 늘어놓을 수 있지만, 이는 그저 신발 끈을 밟아 넘어졌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7시 20분, 스위스 바젤로 향하는 기차를 타기 위해 24시간 동안 영업하는, 밀라노 중앙역에서 도보로 1시간 떨어져 있는, 9.4유로, 한국 돈 1만 4천 원의 버거 세트가 마냥 저렴하지만은 않은 그곳에서 밤을 지새우다시피 보낸 배경은 ‘그럼에도’ 어쩌다 풀린 우연과 엉성히 묶인 필연의 산물일 뿐이어야 한다.


그러니 이 모든 문제를 단순화하자면, ‘그날의 나는 돈은 없었고, 깡은 넘쳤다. 운은 없었으나 감은 탁월했다.’ 정도가 되겠다.




의문은 남는다.


때로는 무의미하다 할지언정, 나름의 답을 내리지 않고는 납득할 수 없고, 납득하지 못해 이해할 수 없으며, 이해하지 못해 끝내 좌절해 버리고 마는,


묶인 적 없는 신발 끈 같이 어긋나 버린 미수의 소치에 관한 의문이.


새벽 4시 30분, 타입 원 폭스바겐 비틀 한 대가 도로 복판에 멈춰 서고, 가방 멘 남자 하나가 차에서 내린다.


밤에 잠긴 공원의 흑록색 잎, 그 사운거리는 적막과 정차한 청록색 비틀, 공랭 엔진의 요란한 배기음.


흙빛 피부, 가라앉는 검은 동공과 붉게 충혈된 흰자위. 남자는 복면을 쓰고 있다.


찰박이는 발걸음 소리가 켜켜이 쌓여 마침내 고개를 돌리자, 점멸하는 가로등 불빛을 받아내 반짝이는 예리하게 벼려진 은회색 칼날.


그날 밤, 밀라노에는 비가 세차게 내렸고, 얄궂게도 나의 신발 끈은 풀려 있었다.


제대로 묶지 않았다, 신발을 너무 놀렸다, 장력이 꽤나 강했다 (끈 끝에 물을 떨어뜨리면 도리어 단단히 묶이기에 이건 탈락), 애글릿이 젖어 문들거렸다 등 끈이 풀리도록 유도한 여러 복합적인 맥락은 이제 무용하다. 결과만 남을 뿐.


밀라노의 밤.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괴한이 나를 쫓고,


나는 풀린 신발 끈을 밟아가며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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