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등에서 후발주자까지
1등은 간혹 놓쳐도 3등 밖으로 밀려나는 일은 없었다.
4등에서 10등까지의 친구들에게 재수 없다는 얘기 자주 듣던, 듣고 웃으며 무시하던 중학교까지의 일이다.
봉사 점수가 모자라 졸업은 차석으로 했으나 (어머니는 기어이 동생을 수석으로 졸업시키셨다. 시험 성적으로는 1등을 못했으나 봉사 점수는 다 채운 모양.) 그래도 성적으로는 내가 1등이었다는 알량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30명 12 학급. 400명 중에 1등. 어깨에 힘을 꽤나 주고 다녔다.
어찌 됐든, 나와 1등을 다투던 친구는 서울대 의대를 진학했으니, 당시의 내 공부머리도, 아니면 머리라 부르고 근성이라 읽는 자질이 형편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라 생각한다.
고등학교는 달랐다. 서울대를 제일 많이 보낸다는 학교답게 부산 촌놈이 그저 들이받아 이겨먹기가 어려웠다.
출발선이 다른데 어디 감히 경쟁을 하겠는가. 본디 책을 많이 읽어 1학년 1학기의 국어 수업은 별달리 노력을 하지 않고 1등급을 받았으나 그뿐이었다. 국제과에서 국어 능력은 하등 쓸 데가 없었다.
영국 케임브리지를 다니는 과 1등 친구, 미국 예일 대학을 다니는 과 2등 친구, 그리고 고려대 약대(확실치 않다)를 다니는 과 3등 친구.
(해외 대학 진학에는 등수보다는 등급이 중요해 지향점이 달랐다. 가령 수학 90 영어 90이 모두 A로 치환되어, B 하나와 A 하나로 치환되는 수학 89 영어 100보다 낫다 판단되었고, 자연스레 해외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경우 90점을 넘기는 게 목표였다. 석차까지 잡기에는 인생이 각박했다.)
3등이었던 친구는 노력파였다.
연대 나노공학과를 다니는 당시의 룸메이트 녀석 왈
“저렇게 앉아서 노력하는 것도 재능이다."라고 인정받고
동시에 프린스턴 다니는 친구 왈
“죽어라 해도 어차피 1등은 못해.”라고 내려치던
동향 출신의 여자 아이였다.
2학년 늦가을의 어느 저녁, 간식 시간에 무언가를 외우며 빵을 우물거리던 그 아이에게 다가가 질문을 던졌다.
“너는 공부하는 게 재미있어?”
그녀가 답하기를 “해야 하니까 하는 거지 뭐.”
돌이켜 보면, 당시 1등을 하던 녀석은 새로운 걸 배우는 게 재밌다 내게 말했고, 중학교 때까지의 나는 남을 이겨먹는 게 재밌었다.
잘해서 재밌었고, 재밌으니까 못할 수 없었다.
요즘의 나는 공부에 대한 재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 밀라노에서의 사건 이후로,
내일 당장 죽는다면 오늘의 삶에 후회하지 않겠는가?
라는 질문을 매일 아니 거의 매 시간마다 던지고, 그때마다 돌아오는 대답은 단호하고도 의심의 여지없는 ‘No.’다
어린 시절부터 나라는 공부 기계의 작동 방식은 단순했다. 납득 가능한 목표가 입력되면, 계획이 그에 맞춰 수립되고, 계획을 실행하면 ‘만족스러운 성적’이라는 결괏값이 튀어나왔다.
나라는 인간은 원체 의지력이 빈약해, 납득이 가능한 이유가 있어 책상에 끌려가듯 앉거나, 하다 못해 티끌만 한 재미라도 찾아야 공부를 시작한다.
대학에 들어와서 부쩍, 아니 아예, 공부에 대한 흥미를 잃어버렸다. 밤에 잠을 10시간 잔들, 전공수업을 들으면 눈이 감겨오고, 마감시한 직전에야 과제를 제출하는 일이 잦다.
미군에서 인턴십을 한다는 동기 녀석은 어릴 적부터 집에서 사제 수류탄을 만들고, 로켓 연료 실험을 하다 차고를 날려먹을 뻔했다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항공우주공학에 대해 그 정도의 열정은 갖지 못할 것 같다고나 할까.
잘하기에는 기초가 부족하고, 기초가 부족하니 잘할 수 없는 열등생의 굴레에 빠져 있다. 문제를 알았으니 해결하면 되겠지만, 투정은 적당히 부리고 그저 하루하루 해내면 되겠지만,
의지가 없고, 그럼에도 뒤처지는 건 죽는 것보다 싫어, 말만 열등생일 뿐, 쳇바퀴에 올라타 오늘도 열심히 달려는 간다. 내가 가는 그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달음박질한다.
그래도 중간은 간다는 게 웃플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