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
오늘도 난 내 인종차별적 편견을 귀납적으로 강화했다.
매일마다 같은 바지를 입는 인도인 여자는 머리에 유전이라도 시추하는 건지, 머리카락이 아스팔트 바닥처럼 쩍쩍 갈라져 있다. 내 앞에 앉아, '정숙'이라 적힌 도서관에서 쩝쩝거리며 타코를 먹는다. 이어폰을 뚫고 소리가 들려온다. 가끔 알람이 울리면, 깜짝 놀라며 알람을 끈다. 노트북에 이어폰을 연결하고 있으면, 노트북에 알람을 맞춰놓는 선택지는 고려하지 않는 걸까. 하긴, 그 정도 머리가 있었다면, 하루에 두세 번씩 놀라지는 않겠다. 그럼에도 도서관에서, 자고 있는 것도 아닌데 알람 맞춰놓은 것도 까먹을 머리면, 다른 직종을 알아보든지 적어도 도서관에 나타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한다.
저기 저 너머의 흑인은 스피커를 도서관에 들고 왔다. 웃어넘기긴 하겠지만, 벌써부터 일어날 일이 그려진다. 아니나 다를까, 몇 분 후, 도서관 전체가 들썩인다. 나가는데 걸리는 10초도 못 참아 안에서 전화를 받곤 일그러진 영어를 지껄이며 피해를 끼쳤는데, 나가서도 난리다. 정녕 도서관에 스피커를 보관하러 온 걸까. 밖에서 1시간 통화를 하고 이내 스피커를 챙겨나가다 전등을 넘어뜨린다. 해결하지 않고 떠날 것이라는 것에 손목을 걸 수 있다. 어제부터 도서관의 전등은 작동하지 않는다.
이러한 두 번의 경험에 따르면, 인도인은 더럽고, 흑인은 공공예절이라곤 씨알도 모른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만난 대부분의 인도인은 똑똑했으니, 더럽고 멍청한 인도인 여자는 내가 가진 인종차별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존재다. 편견에 편견이 무너지니 결국 그건 잘못된 생각이고 편견인 거다.
확증 편향인지 확인하기 위해 직접 세어본 적도 있다. 인종을 가리지 않고 도서관에서 아이들은 떠들었고, 스페인어 혹은 포르투갈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이 떠들기는 제일 떠들었다. 고로 흑인이 시끄럽다는 편견은 확증 편향의 결과였다. 다만 전화를 안에서 받은 건 학기가 시작한 이후로 흑인이 넷, 인도인이 둘, 그리고 아시아인, 흑인, 인도인, 백인은 아닌데 인종이 불분명한 사람 둘이었다. 학교의 인종 구성으로 따져봐도, 적어도 조지아 공과대학교에서 7층 정숙 존을 이용하는 사람들 중 흑인은 공공예절을 모르거나 흥이나 정이 조금 더 많겠다. 그래서 문화는 어렵고, 인종차별은 쉽다. 정이 많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려도 문제는 여전하다. "내 경험상 이런 일이 많았다."로 갈음하기에는 나도 인간인지라 이성만으로 작동하고 싶지는 않다는 게 본질적인 문 제려나. 성급한 일반화는 늘 편리하고, 이렇게 인종차별은 퍼져나간다.
해외에서 생활하면, '선'의 다름을 깨닫게 되고, 동시에 이런저런 편견이 생기기 마련이다. 대상화할 수 있다는 건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겠다. 해외에서 생활하고 여행도 자주 떠나니, 인종차별이라 불릴 일도 빈번히 겪는다. 사소하게는 "영어를 어떻게 그렇게 잘하느냐"는 둥, "그 나이일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둥. 심하게는 "중국어 할 줄 아냐"는 둥, "너는 아니겠지만, 개고기를 먹으니 야만적이다"는 둥. 내가 좀 야만적이라 먹어봤다 답하니 표정이 가관이었다. 북에서 온 건지 남에서 온 건지 묻는 인간들도 있는데, 메너가 없든, 무식하든 교육을 못 받은 게 분명하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요즘은 "북"이라 말하고 1분 동안 변하는 상대의 표정을 관찰하는 악취미가 생겼다.
도미니카 공화국에서는 흑인 아이가 내 앞에서 눈을 찢었고, 모로코에서 만난 택시 기사는 "째키 찬, 째키 찬" 잽을 날렸다. 너무 환하게 웃어 악의는 없어 보여 "교육을 덜 받았는갑다."하며 넘겼다. 그럼에도 교육도 그리 결정적인 요인이 되지는 못한다. 파리에 가면 알 수 있다. 일부 파리지앵은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하고 언어에 의탁해 비대하기가 이를 데 없는 자아를 갖고 있는데, 영어로 인사를 건네면 식당의 자리를 내주지 않을 때도 있으니 하는 말이다.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나 자신인지라, 너무 어려 몰라 차별을 한 경우면 바로잡을 뿐 (도미니카 공화국 아이에게는 껌을 주면서 잘못된 행동이라 알려줬다.) 보통은 교육을 못 받았다 생각하며 넘긴다. 동시에, 같은 맥락에서 사실의 적시에 길길이 날뛰는 종자들을 이해할 수 없다. 누군가 내게 "너 마늘 냄새 나."라고 하면, 객관적으로 판단해 줄 다른 사람에게 한 번 물어보겠다. "그렇다"라고 답하면, 고칠 수 있는지, 고치고 싶은지, 고쳐야 하는지 생각해 보고 그에 따라 행동하면 그만이다. "그렇지 않다"라고 답하면, 후각이 발달했겠거니 혹은 못 배웠겠거니 무시하면 그만이다. 마늘 냄새가 나지 않는데, 그러하다 하는 사람이랑 어울릴 이유가 무엇인가, 후각이 개만큼 발달한 게 아니라면 개자식이겠거니 생각하고 무시한다.
원시 사회부터 다름은 위험이었고, 다름을 포용하고 수용하면서 인간은 사회를 이루고 문명은 발전했다. 사회화가 덜 됐거나 문명의 도태에 기여하는 종자들은 알아서들 사라지지 않을까. 그러하기 위해선 나 먼저 개인으로 집단을 일반화하지 않아야겠다 생각한다.
그럼에도, 애틀랜타의 대중교통에서 '대중'을 모두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도 되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 스피커로 노래를 틀고, 창문 깨지도록 통화하는 건 늘 흑인이라 나의 교화도, 사회의 교화도 쉽지는 않겠다.
지난 여름, 핀란드 헬싱키의 트램은 고요했다. 난 정적을 깨는 인도인들의 시끄러운 영어가 반가웠다. 결국 지난 시간의 나는 쩝쩝거리는 소리를 무시하거나, 전화를 받으며 나가는 남자를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예민했다는 얘기고, 모든 건 상대적이겠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은 지양해줬으면 하는 마음은 여전히 크다. 그러나, 그마저도 문화의 차이라 한다면 할 말은 없겠다. 결국 현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나 자신이니까.
조지 오웰의 말마따나, 세네갈인은 상대적으로 검고, 내게는 상대적으로 마늘 냄새가 나겠다. 다만, 어느 세네갈인이 지하철에서 떠들고, 내가 권투를 잘할지는 알 수 없는 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