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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Jan 31. 2023

산 후안 역사지구 관광

칙칙한 도시.

22.12.16: Day 1,


WBC에서 간간이 보던, 평생 갈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땅에 발을 딛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가벼이 여장을 정리하고 산후안 구시가지로 가는 택시를 잡아탔다.      


호텔 및 리조트 단지를 지나, 그리고 다양한 색조를 띤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산후안 역사지구를 거쳐, 마지막으로 차를 왼쪽으로 돌리자 탁 트인 바다와 우뚝 솟은 망루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뭍에서 지내다 다시금 끝없는 수평선과 거센 바닷바람을 마주했다. 저 멀리 푸에르토리코 국기가 미국 국기, 그리고 이름 모를 깃발 한 기와 함께 나부꼈다.     

 

<카스티요 산 펠리페 델 모로>


눈을 감고 몸을 틀어 거세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니 기분이 덩달아 붕 떴다. 그렇게 멍하니 서 있기를 수십 초, 16세기 스페인 점령 당시 망루로 사용되었던 성곽으로 향했다.     


구글 검색 결과, 현지인이 알려주는 시간, 그리고 트립어드바이저에서 찾은 시간이 모두 달랐으나 도박이 통했고, 폐장 40분 전에 도착해 성곽 전체를 둘러볼 수 있었다.      


Castillo San Felipe del Morro.      


저만치 떨어져 바라봤을 때 위엄 있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요새는 막상 가까이 다가서니 풍파의 흔적들로 뒤덮여 있었다. 본디 검었던 것인지 노랬던 것인지 모를 벽들이 우둘투둘 깎여나간 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저 멀리 다가오는 북대서양>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탁 트인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고, 세월의 깊이를 가늠이라도 하려는 듯 벽돌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요새를 돌아 나왔다. 풀밭에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과 활짝 웃으며 웨딩 촬영을 하고 있는 커플들을 지나 산후안 역사지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산후안 역사지구는 생각보다 초라했다. 저녁의 음습한 공기가 칙칙하게 배이기라도 한 것인지, 어둠이 내리기 직전의 도시는 그 명성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평범했다.      


어쩌면 집 집마다 색 하나 칠한다고 해서 본질이 바뀌거나 문화적으로 대단한 것은 아니라는 내 견해가 반영된 감상이었을 수도, 혹은 역사지구와 삶은 별개라는 듯 도로변에 끝없이 늘어선 차들이 이뤄내는 대비가 주는 씁쓸함이 반영된 감상이었을 수도 있다. 그 원인이 무엇이었든 간에 지구 전체에 보정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칙칙함이 내려앉아 있었다.


같은 국내라고 유심을 달리 사지 않았기에 어느 식당으로 가야 할지 모르는 채  골목 구석구석을 쏘다녔다. 그러다 꼬르륵거리는 배의 아우성을 더 이상 모른 척해줄 수 없는 지경이 되자 가장 가까운 식당에 들어가 맥주 한 병과 문어 요리를 시켰다. 고수 향이 짙은 다진 문어가 나왔고, 맥주는 평범했지만 시원했다. 기숙사에서나 여행 와서나 배고프면 값싼 맥주로 배를 채우는 습관은 어디 가지 않았다.      


그렇게 허기를 조금이나마 달래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아무리 그래도 본토보다는 물가가 쌀 것이라는 내 기대와는 달리 푸에르토리코의 물가는 미국과 대동소이했고, 인터넷 연결도 없었기에 걷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차들이 보기 흉하게 늘어서 있다>


역사지구에서 숙소까지의 거리가 2시간 30분이라는 점과 급하게 나오느라 운동화가 아닌 샌들을 신었다는 점, 그리고 이미 해가 꺼지기 시작했다는 점이 조금 불안하기는 했지만 무작정 걷기로 했다.     


바닷바람이 거세게 불어오고 인적이 뚝 끊긴 밤거리는 생각보다 을씨년스러웠다. 그렇게 사람 없는 해안가 도로를 몇십 분 걷자 관광지구가 나왔다. 식당 앞에서 호객 행위를 벌이는 종업원들, 가벼운 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여행객들, 그리고 우뚝 선 호텔들이 나타났다가도 다시금 몇 블록을 지나면 담장으로 에워싸인 주거 구역이 나오고 또 나왔다.      


그렇게 정줄을 놓은 채 계속 걸었다. 혹자들은 여행을 하고 다양한 곳을 직접 누비며, 생각에 잠기고는 한다지만, 깎여나가는 배터리에도 불구하고 지도를 확인하는 빈도는 늘어만 갔고, 나중에 발목까지 접질려, 결국 숙소에 돌아오니 10시가 다 되어 있었다.      


< 객관적으로 달콤했던 모히또는 주관적으로 쓰디 썼다. >


하필 오는 길에 물을 사는 것을 깜빡했기에 1분 거리의 바에서 모히또를 한 잔 주문해 마셨다. 지나가는 차 소리가 묻힐 정도로 시끄럽게 노래를 틀어대는 바의 테라스에서, 처음에는 달짝지근하다가도 이내 삼킬 즈음이면 쓰디쓴 헤밍웨이의 칵테일을 멍하니 홀짝였다.      




밤은 이미 내려앉았고, 영문 모를 불안함과 끝없는 설렘, 그 기묘한 조화에 대해 생각하다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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