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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밍웨이의 말

어니스트 헤밍웨이

by 노마드






지난 2024년, 막무가내로 50개국을 여행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요즘 가끔은 누군가 나를 깊은 산속 외딴 오두막에 가둬줬으면 한다. 인터넷은 느려터져서 단어나 사실 관계 정도만 겨우 검색할 수 있고—이를테면 볼리비아의 수도가 라파즈 맞는지 확인하는 정도로—노트북 하나, 사진첩 하나, 펜 하나, 공책 하나만 덩그러니 주어진 채로. 밥하긴 귀찮으니 밥도 이왕이면 줬으면 한다. 다만, 하루에 여행기 한 편을 쓰지 않으면 굶기는 그런 식으로.


입대 후 읽어치운 1,000권의 책이 아까워, 학기 초, 인상깊게 읽었던 모든 구절을 하나하나 노션으로 옮겼다. 이후, 해당 구절들에 대한 감상을 글로 풀어내는 걸 매일의 목표로 잡고 대략 50일 간 실천해왔다. 글을 읽었으면 무엇이라도 남았어야지 싶은 마음이었다.


문제는, 하루 10에서 30분씩 투자하는 이 작업이 여행기 집필 시간을 잠식한다는 점이다.


평균적으로 여행기 한 편을 쓰는 데 적게는 두 세 시간, 많게는 대여섯 시간이 걸리는데, 학기 중에는 주말이 아니면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다. 수업은 비교적 여유롭지만, 두 연구실에서 일하고, 드론 프로젝트까지 진행하다 보니 시간이 늘 부족하다. 보통 달에서 10권에서 많게는 수십 권을 읽고, 평생 만 권을 목표로 달려가는 내가 책을 1, 2월 합쳐서 겨우 10권 읽었다는 사실이 요즘의 바쁨을 증명한다.


정말 써야 할 글은 너무 많은데, 학기 중의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1. 우선 시작해놓고 마무리하지 못한 여행기 네 편 (조만간 다섯)

- 북유럽: 탈린엔 북풍이 분다

- 엘살바도르: 수업 째고 엘살바도르로 튐

- 도미니카공화국 & 과테말라

- 아조레스 & 마데이라

- (이번 봄방학, 카리브해)


2. 서너 편으로 마무리해야 할 짧은 여행기 아홉 편 (후쿠오카는 안 쓸 것 같기는 하지만)

- 2024 여름: 후쿠오카, 브리즈번, 몽골

- 2024 가을: 칸쿤, 몬테고베이, 토론토

- 2025 봄: 내슈빌, 뉴욕

3. 기획은 끝났지만 손도 못 댄 장편 여행기

- 2024 여름 유럽 19개국 일주

- 2024 겨울 남미 7개국


그리고...


4. 프랑스 교환 학생 시절의 장편 여행기 둘

- 이집트

- 체코, 헝가리, 오스트리아, 스위스


5. 수없이 많은 주말 여행들: 옥토버페스트, 덴마크, 튀니지, 니스/모나코, 루마니아, 크로아티아, 리투아니아, 아이슬란드, 베를린/슈베린, 포르토, 브뤼셀, 슬로베니아, 페즈, 외시넨, 아부다비 (15주어치)


6. 옥스퍼드 여름학기... (그냥 한 편으로 하련다.)


적어놓고 보니 33개. 많다.


그래서 봄학기 후, 여름학기 전. 기존의 푸에르토리코 여행 계획을 취소하고, 2주 동안 글만 쓰기로 했다. 목표는 기존 여행기 세 편을 완성하는 것. 여름학기를 인도에서 수강해,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을 여행하겠다는 계획도 철회했다.


정말 징글징글하게도 돌아다녔다. 그나마 올해는 많이 줄였다.


계획대로라면, 이번 봄방학엔 카리브해 (트리니다드 토바고, 그레나다,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 바베이도스), 가을학기엔 시카고 (고등학교 동창들과 모일 예정), 그리고 겨울방학의 중남미(아마존, 로라이마를 필두로, 콜롬비아, 온두라스, 벨리즈). 대략 10개국을 여행할 계획이니 글 쓸 틈은 있겠다.


헤밍웨이 말마따나, 여전히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글을 쓰며 규칙적으로 물을 퍼올린다. 문제는 내가 건드린 게 얕은 우물이 아니라 사우디 유전처럼, 퍼도 퍼도 끝이 없고, 기름을 다 뽑아내면 옆 유전에 불이 붙는다는 점이다.


가끔은 낭만이 버겁지만, 그래도 낭만은 낭만이다. 다시 오지 않을 젊음의 페이지를 써내린다는 마음으로 기쁘게, 열심히 살고 있다.


그럼에도, 어서 빨리—복권에 당첨되지 않는 한 10년, 어쩌면 15년쯤 걸리겠지만—아마추어든 뭐든 전업 작가로 살고 싶다.


(부족한 글 읽어주시는 모든 분께 감사 드립니다. 더 좋은 글 쓸 수 있도록 계속 정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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