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국
“도시지?”라고 되묻는 경우가 많았다. 법인 살인의 송유관 사고로 유명한 트리니다드 토바고, 미군 침공의 과거를 지닌 그레나다, 세계 살인율 3위의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 그리고 럼 마운트 게이의 바베이도스로 떠난다는 내게 사람들은.
트리니다드 토바고에는 볼 게 없었다. 무수한 새가 지저귀어 좋았지만 그뿐이었다. 파나마를 경유하며 쫄쫄 굶던 난 트리니다드 섬의 입국 심사대를 통과하자 마자 KFC 버거를 네 개 해치웠다. KFC 할아버지의 넥타이가 작은 사람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깨닫고 혼자 “거참. 대단한 세기의 발견이로구만.” 중얼거릴 지경이었다.
돌아다닐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갱단 조직원이 경찰서를 나서는 상대 조직원을 총으로 갈겨댈 정도로 치안이 악화된 그곳을,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된 후 재차 연장되었으며, 역내를 담당하는 한국 대사관이 친절히 수도 포트오브스페인의 대다수 지역이 위험함을 고지해 놓은 그곳을, 나는 돌아다니고 싶지 않았다.
볼 것도 없고, 돌아다닐 엄두도 나지 않는 국가에서 나는 여정의 전반부와 후반부를 죽였다. 유리 천장 사이로 뜨거운 빛이 내리꽂는 공항 의자에 기대 잠을 청하며, 침대에 엎어져 물릴 대로 물린 치킨 버거를 흉물스러운 케첩버거로 바꾸어 가며.
고작 50분 날아 도착한 그레나다에서 나는 철저히 혼자였다.
잡지 속의 해변에서 발을 한 시간이고 끌어 숙소에 다다랐다. 숙소 앞의 흑인들은 “째키 찬”을 외쳐댔다. 해가 질 때 즈음해 다시 밖으로 나섰다. 도로는 도심을 빠져나가는 차의 행렬로 분주했다. 들러붙는 모기와 파리를 손으로 쫓아내며 나는 커다란 곶을 감아도는 그랜드 안세 해변에 다다랐다.
노을은 아름다웠으나 해가 짐에 따라 옆에 드리우는 하나의 그림자 역시 모래 적시는 파도처럼 커져만 갔다. 그러다 어둠이 내리기까지. 해가 지고 달이 뜨는 것의 경이를 나눌 사람이 없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공항으로 걸어가며 나는 한때 진영 싸움의 각축장으로 기능했으나 이제는 그저 카리브해의 관광지 중 하나로 남아버린 그레나다에 작별을 고했다.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에서 만난 일본인 M은 “나는 어디에도 속할 수 없었다”라고, “일본에서는 환영받지 못하는 기분이었다.”라고 말했고, 공항 가는 길의 택시 기사는 살인율 3위의 고국이 “슬픈 나라. 돈이 없어서 슬픈 나라.”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머문 바베이도스를 좋아하기란 또 어려운 일이었다.
일주일이 채 되지 않는 카리브해 아일랜드 테이스팅. 그레나다의 매거진 해변과 그랜드 안세 해변에서도,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의 베키아 섬, 그곳의 프린세스 마가랏트 해변에서도, 바베이도스의 브라운즈 해변에서도 바닷물은 짜고 또 비렸다.
그럼에도 외견상 더없이 푸르고 또 더없이 투명한 카리브해의 바다를 떠올리며, 나는 소앤틸레스 제도를 떠나간다.
그저 바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저 목을 축이려 한 모금 삼키는 것 만으로는,
그 아래의 짜고 비릿한 바닷물과 그 아래 가라앉은 침전물을 찬찬히 살필 수 없는 게 이번 아일랜드 테이스팅의 본질이었을까
무역풍은 비행기를 싣고 애틀란타로 흘러간다. 창밖의 시린 트리니다드 바다가 멀어지고, 이내 구름이 바다를 가둔다.
* 그 동안 여행기 읽어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다음 주부터는 미뤄뒀던 엘살바도르 여행기와 가능하면 남미 여행기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