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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베이도스를 좋아하기란

74번째 국가, 210번째 도시

by 노마드

순전히 나라 수를 채우기 위해 여행했냐는 질문은 불쾌하다.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여행의 본질을 스스로 훼손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어차피 끝이 있는 인생인데, 그 공백을 원하는 대로 채워나간들, 즉 소소한 허세나 약간의 낭비를 한들 어떤가. 정말 치열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순수하게 궁금해 묻는 것이라면 예를 들어, "리히텐슈타인은 정말 볼 게 없었지. 그런데 가던 길의 야간기차에서 말이야..."라며 즐겁게 대답해 주겠다. 그러나 본인의 시선으로 타인의 여행을 재하며, 입을 삐죽이며 "내 그럴 줄 알았다'는 식의 비웃음을 흘릴 때면, 솔직히 고깝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이 질문에 흠칫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그렇게 끼어넣어 '방문'한 국가들이 있기 때문이다. 갈라파고스를 찾기 위해 경유했던 콜롬비아, 세 번이나 찾았지만 공항 밖으로 나온 건 반나절에 불과했던 파나마에, 마찬가지로 세 번 찾았음에도 보낸 시간의 합이 채 하루가 되지 않는 바티칸. 기차에서 내려 비만 맞았던 리히텐슈타인은 말할 것도 없고, 당일치기로만 두 번 넘게 다녀온 룩셈부르크, 슬로바키아, 그리고 모나코와, 당일치기로 정말 한 번 다녀온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산 마리노, 우루과이에 파라과이까지. 대략 10개국.



바베이도스 역시 굳이 따지자면 개수를 늘리기 위해 찾은 나라였다.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에서 트리니다드 토바고로 바로 가는 비행기가 없어 2가지 선택에 내몰렸다. 9시간 경유와 30분 경유. 에콰도르의 수도 키토에서 갈라파고스로 가던 날, 과야킬에서의 1시간 경유가 실은 그저 같은 비행기에 앉아 승객들만 바뀌기를 기다리는 경유였음을 고려했을 때, 이번의 삼십 분 경유도 정말 땅에 발 내린 것이라곤 비행기의 랜딩 기어뿐일 것 같았다. 며칠 전, 그레나다에 착륙하며 승객 몇을 실은 비행기가 그대로 이륙했음을 따져보면 예상은 틀리지 않았고, 나는 “아무리 그래도 땅에 발은 붙여봐야지” 하는 심정으로 9시간 경유를 선택했다.



바베이도스의 초대 총리와 서인도 연방의 최초이자 유일한 총리를 역임한 그랜틀리 애덤스의 이름을 따 지어진 공항의 첫인상은 황량하다는 것. 섬 끝머리에 어떻게든 욱여넣은 그레나다와 세인트 빈센트 그레나딘의 공항과 다르게 국제공항이라는 명칭에 걸맞은 규격을 자랑한다. 다만 듬성듬성 주기된 전용기와 몇몇 보잉 787을 제외하면 공항은 한적하다.



예나 지금이나 바베이도스를 점령한 건 영국인들. 적갈색, 파란색 여권 겉면이 간간이 눈에 들어온다. 체크인 카운터를 비롯한 랜드 에리어 전부가 개방된 공항의 바닥을 새 한 마리가 총총 뛰어 지나간다.



시내로 들어가려면 동전이 필요하기에 화장실 옆 정수기에서 물을 받고, 다시 편의점에서 물 한 통을 더 산다. 풍차와 정어리 같은 생선이 새겨진 바베이도스의 동전은 특이해 시선을 잡아끈다.



공항 택시는 카리브해 여느 섬과 같이 70 바베이도스 달러, 즉 35달러로 결코 저렴하지는 않다. 25분의 거리를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하다. 반면 시내로 가는 버스 (버스라지만 밴에 가깝다) 요금은 왕복 3.75 달러. 배낭여행자에게 선택지는 애당초 하나.



건물 틈새로 비치는 바다는 아름답다. 시린 동해 바다에 캉리브해의 낭만을 한 스푼 담은 것 같달까.



설계가 잘못되었음이 분명한 해안가의 일 차선 도로는 북적인다. 되는 대로 주차한 차들에 좌우 일 차선의 도로는 가끔 정말 일 차선으로 바뀌고, 정차한 차를 지나치는 운전자들 역시 답답할 정도로 느긋하다.


섬 곳곳으로 사람을 실어 나르는 밴의 운전자들은 아는 얼굴이라도 보면 경적을 울리고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목소리의 크기가 반가움에 비례한다는 듯 안부를 묻는다. 또, 길 위에서 동료를 만나기라도 하면 핸드셰이크를 주고받거나 차에서 내려 잠시 담소를 나눈다.


심지어 운전수는 중간에 멈춰 풀밭에서 볼 일을 해결하는데, 그 옆 버스 정류장에서는 동공이 구름처럼 풀린 흑인 하나가 의자에 몸을 반쯤 걸친 채 누워 있다. 몸의 반은 땅바닥에 기대 있고, 머리는 먼지 나는 흙바닥에 처박고 있어 자세가 몹시 기괴한데, 그는 꿈속을 헤매고 있다. 약에 취해 있다.



내 옆의 흑인 여자는 내 허벅지를 짓뭉개겠다는 듯 몸을 붙여 오고, 오른쪽에서는 땀의 암모니아가 코를 찔러, 나는 브리지타운 표지판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자 정차를 요구하고 밴에서 내린다.



포장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바베이도스. 미성이 두드러지는 화음이 중간중간의 교회들에서 흘러나와 귀는 즐겁지만, 쩍쩍 갈라진 빛바랜 회색 아스팔트였던 무엇에 가 있는 시선은 썩 유쾌하지 않다. 도로의 실선은 눈치채기 쉽지 않고, 다 깨어진 돌조각 파편을 보도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건물들 역시 칙칙하다.



2세기가 지났음에도 영국은 여전히 바베이도스의 해변을 점령하고 있다. 브라운즈 해변의 카리브 차양 아래는 백인이 한가득이다.


이후 해변을 지나쳐 다리를 하나 건너면 스카이스캐너에 바베이도스를 검색했을 때의 배경으로 나오는 바베이도스 의회, 박물관이 나온다.



국기가 세찬 바람에 나부낀다.


조금 더 발걸음을 옮겨 상업지구 안으로 들어가면 건물 옆벽의 페인트들이 벗겨진 상가들이 나온다. 이곳 브리지타운의 황금기는 언제였을까. 거리에서 고칠 필요가 없는 건 에어컨뿐이다. 이따금, 한기가 보도를 덮쳐온다.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부의 요청을 들어준 후, 중앙 버스 터미널로 돌아간다.



다리와 터미널 사이에는 공립 도서관이 위치해 있다. 카리브해에 대한 사료가 많다는 게 특징. 1층에는 에어컨이 나와 나는 잠시 책을 읽으며 시간을 죽인다.



이후 도착한 버스 터미널 직원의 영어는 크레올에 가까워, 나는 세 번이나 공항으로 가는 버스 정류장이 어디인지 묻는다. 그럼에도 도저히 알아들을 길이 없어 옆의 직원에게 도움을 청한다. 왼손가락 하나, 오른손가락 둘. 12번.


배차 간격은 30분. 25분 정도 지났을까. 버스는 도착해 나는 줄의 마지막에서 버스의 턱을 오른 후 동전을 건네며 질문을 던진다.


“혹시 버스가 공항에 가나요? 아니면 근처라도? “


“내리고 싶은 데서 벨을 누르면 된다네. 샘 로드 성으로 가긴 하지만, 그렇다네. “ 버스 기사는 동전을 센 후, 50센트짜리 동전 하나를 되돌주고 운전대를 잡는다.


1627년부터 시작된 영국령 식민지의 잔재는 여전히 섬 여러 곳에 남아있다. 섬 반대 편의 샘 로드 성은 1820년 ‘샘 로드‘라 불렸던 악명 높은 버키니어 사무엘 홀 로드가 지은 조지아풍의 맨션이라고 한다. 반나절도 채 되지 않는 나의 경유에 추가할 수 없는 선택지를 하나 확인한 후 휴대폰을 덮는다.



층층이 쌓여 밀려오는 파도는 여전히 초현실적으로 아름답다. 암초에 다가와 이끼 묻은 흙빛으로, 그보다 조금 더 멀리 서는 어두운 숲의 나뭇잎처럼 번들거린다. 포말은 밀려와 하얗게 부서지고, 터쿼이즈는 투명하게 일렁이는데, 그 너머 시리게 푸른 바다가 하늘을 가른다.



여백처럼 하얀 모래와 옹기종기 모인 수생식물의 군락이 육지와 바다의 경계를 지키고, 매년 서핑 대회가 개최되는 나라답게 조금 먼바다에서는 카이트 서퍼들이 바람과 놀고 있다. 창문 손잡이를 앞쪽으로 살짝 밀어내고 손을 내밀어 손목을 굽혀오는 바닷바람에 저항하기를 잠시, 이내 머리를 창문 틈에 기대고 눈을 감아 바다를 듣는다.



30여 분을 달린 버스 저 앞에 그랜틀리 아담스 국제공항이 모습을 드러내고, 나는 두 손가락으로 턱을 두드리다, 결국 앞으로 나가 기사에게 정차를 요구한다. 밖은 습하고, 금세 옷에 땀이 찬다. 너무 일찍 하차했음을 깨닫는 데는 몇 방울의 땀이면 충분하다.



공항에서도 여전히 제국주의는 앞의 두 글자만 떼 간판만 자본으로 바꾼 후 성업 중이다. 높디높은 파란 버스가 공항에 들어오고, TUI 피켓 아래 결집한 영국인들의 줄은 공항을 휘감는다.


영국인의 행렬을 지켜보며 나는 잘게 부순 라면으로 오늘도 끼니를 때운다. 카리브해를 일주일 동안 여행하며 쓴 식비는 50달러가 채 되지 않는다.



길었던 여행은 사실상 막을 내렸고, 나는 트리니다드 토바고행 비행기에 올라탄다. 야간 비행. 비행기의 전등이 꺼지고, 71, 72, 73, 그리고 74. 74번째 국가에서의 9시간이 끝을 맞이한다.


다만 불분명한 것은 "나라 개수를 위해 여행한 적이 있어?"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 "바베이도스는 정말 볼 게 없었지." 그 뒤의 문장을 나는 도무지 떠올릴 수 없다.


바베이도스를 좋아하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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