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포(老鋪)의 주인

폐업 직전의 나날들

by 노마드

일진이 좋지 않은 하루들이 방송까지 타버린 유명 맛집의 줄처럼 길게 이어졌다.


나는 노포의 욕쟁이 할머니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욕을 하면 할수록 손님이 진득하게 늘어나는 기이한 식당의 점주 말이다.


문제는 손님의 질이 나쁘다는 것이었다. ‘행운’이라는 귀한 손님은 가뭄에 콩 나듯 식당을 찾다 발길을 끊어버린 지 오래. 단골로 거듭난 ‘불행’은 거머리처럼 진득하게도 내 삶에 들러붙었고, 요즘은 ‘불운’이라는 손놈까지 찾아와 시정잡배처럼 다 차린 상을 엎기 일쑤였다. 차라리 바이럴로 뜬 맛집이라면 좋으련만, 불행이라는 진상 손님으로 벅찬 이 낡은 노포에 방송을 보고 불운이라는 불청객까지 찾아온 모양새였다.


동료와 세 시간 동안 떠들 가벼운 아침 근무를 앞둔 어느 화요일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새벽 5시에 일어났다. 치미는 욕지거리를 알람과 함께 밀어 두고 침대를 내려오던 그때, 무릎을 찧었다. 눈물이 순간 핑 돌았다. 화장실로 향하다 이번에는 벽에 발가락을 박았다. 발톱이 조금 깨져 있었다. 샤워 물을 잘못 트니 머리에 냉수가 쏟아졌고,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아파트 밖으로 나서니 날씨는 하필 영하였고 나는 결국 욕을 뱉었다. “시발.” 정말이지 좆같은 하루의 시작이었다.


욕을 안 할 수 없었다. 며칠 전 항공비행동역학 시험에서 받은 50점은 4년 간의 대학 생활 중 받은 최하점이었다. 영사관을 두 번이나 찾고 DDS까지 가서 발급받은 신분증은 한 번은 주소가 틀려서, 한 번은 배송 중 분실되어 그 지난한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밟아야 했다. 덕분에 이번 학기 목표였던 드론 자격증 시험은 물 건너갔다. 올겨울 가기로 한 베네수엘라는 미국 대통령이 전쟁을 선포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고, 지난 데이트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악몽이었다.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고 덜 마른 머리에 청승맞게 덜덜 떨면서 학교 수영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에다 대고 욕을 퍼부으며 걷던 중, 길 위에서 무언가 꿈틀거리길래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노숙자였다.


순간, 얼굴이 확 달아오르며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나로서는 그가 어떠한 이유로 길바닥에서 자는 신세로 전락했는지 알 수 없다. 칠전팔기 끝에 아홉 번째 도전할 기력을 찾지 못해 포기해 버렸을 수도, 그저 술과 약에 찌든 인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의 가게는 지금 비를 피할 지붕조차 없는 폐업 상태라는 것.


그가 누운 아스팔트 틈에서 나는 내 마음의 폐업 신고서를 보았다. 불운을 핑계로 내가 먼저 셔터를 내리고 저 차가운 바닥에 눕고 싶었던 건 아닌가. 그 서늘한 공포가 나를 깨웠다.


폐업 신고조차 하지 못한 채 거리로 내몰린 삶. 진상 손님이 들이닥친다고 투덜댔지만, 적어도 내게는 문을 열고 장사를 할 ‘가게’가 있고 그 무엇보다도 가게를 변화시키겠다는 의지가 있다.


겉으로 바뀐 건 여전히 별로 없다. 고등학교 동창이 결혼한다는데 나는 이번 생에 할 수나 있을까 싶고, 내년 여름 인턴십은 지원하는 족족 거절당해 장장 40일짜리 동남아 여행 계획이나 세우고 앉아있다. 여전히 내 식당은 낡고 초라한 노포다.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더더욱 조금씩 식당을 고쳐나가기로 했다. 낡은 수저통의 젓가락이라도 바꿔보는 심정으로, 일터인 수영장에서는 동료들에게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넉살을 떨었다. 천장을 보며 한숨 쉬는 대신, 밖으로 나가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며 웃으려 노력했다.


21학점이라는 까다로운 재료를 손질하느라 진땀을 뺐고, 여행기라는 신메뉴를 개발하며 밤을 지새웠다. 북극의 추위는 가게의 묵은 환기구까지 씻어내리는 듯했다. 매주 네다섯 번씩 수영도 꾸준히 했다. 메뉴를 재정비하고 식탁의 묵은 먼지를 털어냈다. 여행의 도파민도 좋지만, 손님 없는 시간에도 준비하고 그 정적조차 즐기며 순간순간에 감사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내 가게가 위치한 골목의 풍경도 바뀌고 있다. 주변 상인들 역시 각자의 가게를 리모델링하고 부지런히 셔터를 올리기 시작했다. 상권이 살아난다는 건 반길 만한 일이다.


부산의 친구들은 모두 러닝을 시작했고, 이번에 만난 고교 동창들도 각자의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다. 사람이 변해야 상황도 변한다. 친구들이 변한다는 건 내가 속한 거리의 풍경이 좋아진다는 뜻이고, 나 또한 그 수준에 맞는 가게가 되어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이자 즐거운 자극이다.


친구들의 변화를 보며 롯데 자이언츠의 전 감독, 래리 서튼의 말을 떠올린다. 그는 "매일 1%씩 나아지자"라고 했다. 비록 그는 타인의 변화를 종용하지 못해 짐을 쌌지만, 그가 두고 간 레시피 하나는 여전히 유효하다. 만년 하위권을 맴도는 구단의 시행착오를 반면교사 삼아 내 인생을 잘 운영해나가고 싶다.


어제보다 오늘은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다. 그 조그마한 1%의 차이가 쌓여 전혀 다른 질의 식당으로 거듭날 것임을 믿는다.


대학 입학 때 세운 버킷리스트라는 초기 메뉴판은 거의 다 지웠다. 이제 남은 메뉴는 글 500편과 스쿠버다이빙, 그리고 '취직'이라는 가장 비싼 코스 요리다. 하면 된다. 못할 것 없다.


아직도 난 젊지만 마냥 파릇파릇한 18, 19세는 아니다. 그 시절의 생기발랄함 대신 중후한 멋이 자리 잡았다 믿고 싶지만, 그와 별개로 체력은 고점에서 내려오고 있다. 이제는 밤새 술을 마실 수도, 애당초 밤을 새울 수도 없는 현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니 더더욱 내실을 다져야 한다. 연애와 결혼은 나만의 의지로, 호객 행위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기에 최대한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려 한다. 내가 글로 쓰는 것만큼 근사한 사람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더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기 위해, 나 역시 더 좋은 주인으로 거듭나려 한다.


묵묵히 재료를 손질하고 가게를 쓸고 닦다 보면, 삶이라는 이 식당에 언젠가 '보상'이라는 귀한 손님도, '행운'이라는 단골도 제 발로 찾아오지 않을까.


다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이 넓디넓은 하늘 아래, 수많은 사람이 저만의 식당 문을 열고 또 다른 누군가의 식당을 찾아가고 있다. 내일은 진상 손님의 호통 대신 반가운 맑은 종소리가 들리길 기대하며, 나는 오늘도 셔터를 올린다. 어떠한 손님이 오든 도마 앞에 서, 곰삭은 깍두기 같은 뚝심으로. 어서 오십시오.


2025 결산:


196권 독서, 235편 작문, 20 개국 여행, 미국/EU 드론자격증 취득



* 가이아나, 수리남 등지를 여행 중이고 1월 17일까지 중남미 여행 예정이라 해당 기간 동안 글은 올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여행 중에는 순간순간을 느끼는 게 더 중요하다 생각해 글감이나 떠오른 생각을 메모하지, 따로 글을 쓰지 않기도 하고 노트북을 안 챙겨 온지라ㅎㅎ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따스한 연말들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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