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지에서 맞는 부조리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5시 반에 일어나 미적거리며 침대를 나왔고, 옷을 갈아입은 후 창을 내렸을 때였다. 여느 금요일과 다름없는 하루의 출발이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머니는 가족 단체 톡방에 '어제 날씨가 좋았어.'라고 얘기하듯, '오늘 할머니 돌아가셨어.'라고 카톡을 남기셨다. 우습게도 슬프다는 감정보다는 '어느?'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문을 닫고 아파트의 복도를 걸어가며 나는 복도의 빛이 이리도 밝았던가 생각했다. 휴대폰의 창은 여전히 내려가 있었고, 나는 한 번 더 눌러 사건을 현실로 가져올지 아니면 이대로 외면할지 고민했다. 그렇게 고개를 휴대폰에 박고 걷다 보니 사무실이었다. 뫼르소는 장례식이라도 찾아갔는데, 손자라는 가느다란 실로 이어진 객체는 저항 없이 출근해 오늘도 사무실을 찾았다.
나는 알림 창을 열어 확인하기를 주저했다. 이미 발생한 사건이지만, 창을 열어 3이 2가 된다면 어찌 해야 할까. 휴대폰을 덮어두고, 아래로 내려가 수영장의 pH를 검사했다. 모든 게 정상이었다. 몇 분 후 동생이 답장했다.
'외할머니?' 안도하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적어도 동생이라는 놈은 솔직하지 않은가. 몇 분 후 어머니께 답장이 왔다. '아니 친할머니.'
모든 게 어설프게 짜인 극만 같았다. 8시가 가까워 오는데 밖은 여전히 어두웠고, 롯데 자이언츠는 이제야 봄이 찾아왔다는 듯 어제와 오늘의 투수 모두가 8이닝을 던졌다. 야구를 본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스탠드 위에 올라, 대학의 수영 선수들이 물을 가르는 모습, 정확히는 갈려나가는 물의 끄트머리에 시선을 겨누었다. 파문이 일었다.
잘게 부서지는 물의 조각에 맞춰 이름을 발음해 보려 했지만, 그토록 할머니께 무심했나 보다. 매년 뵈려 노력하는 외할머니처럼 친할머니께 애착이 있는 것도 아니라고 말하면 변명이 될까. 마지막으로 뵌 것이 언제였던가. 병실 문 앞에서 아버지 이름만을 부르며 우리 형제를 보고 누구냐며 당황해하시던 그 모습처럼, 할머니만 나를 잊은 게 아니었다.
스탠드에서 내려온 나는 우선 교수님들께 메일을 돌렸다. 조모상을 당했으며, 장손이 한국에 들어가 봐야 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내용이었다. 뭐라고 써야 할지 횡설수설할 것만 같아 결국 AI에게 대필을 맡기고는 사무실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행기 표를 검색했다. 가장 빠르고 비싼 표는 400만 원에 18시간, 가장 느리고 저렴한 표는 120만 원에 63시간이 걸렸다. '가야 하나? 아니, 갈 수는 있나?' 때마침 통장에는 130만 원 정도의 돈이 남아 있었다. 63시간 후 도착하면 장례식은 끝나 있겠지. 나는 답을 찾지 못한 채로 다시 스탠드에 올라가 갈려 나가는 물을 바라보았다.
18시간. 그리고 400만 원. 친할머니의 죽음보다는 숫자들이 신경 쓰였다. '언젠가 아버지가, 어머니가 돌아가셔도 나는 임종을 지킬 수 없고, 상주는 동생이 맡겠지.' 아무리 돈을 많이 번들, 내가 배우는 항공우주공학이 발전해 18시간이 몇 시간으로 줄어든들. 비행기의 항속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한들 내가 표를 끊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스탠드에서 내려온 나는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어머니께서는 오지 않으셔도 된다고, 정확히는 오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녀석은 과외 중이라며 착신을 거절했다. 내려가보라는 내 말에, 몇 분 후 마찬가지로 어머니께서 오지 말라 하셨다고 전했다.
나는 어머니께 연신 "아빠 잘 챙겨줘."라는 말만 반복적으로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
언제까지 어머니가 아버지를, 아버지가 어머니를 챙겨드릴 수 있을까.
하루가 붕 뜬 채 지나갔다. 나는 친구들과 통화했다. 어머니는 친구들은 굳이 장례식장에 찾아오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하셨다. 나는 어디선가 점심을 먹었고, 저녁을 먹었고, 잠을 청했고, 새벽 4시 반에 다시 근무를 위해 일어났다. 근무를 마치고, 펜을 손에 쥐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먼지도 없는 바닥을 쓸고,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날씨는 화창했다. 이불을 개고 빨래를 정리했다. 몇 시간을 흘려보냈다. 가방을 싸고 학교로 걸어갔다.
책상에 앉아 멍하니 밖을 바라보았다. 나는 휴대폰을 덮어두었다가 다시 집어 들고, 비행기 표를 검색했다. 하룻밤을 더 자고 나면 장례식은 끝날 터였다. 내가 18시간을 뒤늦게 날아가야 하는 날도 오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병실에 앉아 아버지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상택아, 상택아" 하시던.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한 채 문에 엉거주춤 서 있는 우리 형제를 보며 누군지 궁금해하시던. 명절이면 1등 한 손자의 어깨를 토닥이고 탕국과 산적을 해먹이시던.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뜬 다음, 다시 카톡을 열어 아버지의 프로필 사진을 누르고는 보이스톡 버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몇 초를 그렇게 있다가 다시 손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