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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드 Jun 22. 2023

동유럽의 숨은 진주 브라티슬라바

슬로바키아 2.5시간 정복

2023. 06. 16,


다소 충동적으로 결정한 여행, 억지에 대한 반항. 그렇게 나는 동유럽의 숨은 진주를 찾아냈다.




뜬구름에 불과했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 유럽으로 넘어오기 전까지 난 슬로바키아의 수도가 어디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여행 계획이 의미를 지니기 시작한 것은 미켈란젤로의 바쿠스를 보기 위해 피렌체 바르젤로 미술관으로 향하던 아침의 일이었다.


빈에서의 일정을 그리며, 시간이 허락한다면 어디로 떠나볼까 고민하던 나와 룸메이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실없는, 몽상에 가까운 여행 계획들을 주저리주저리 떠들며 걷고 있었다.


그렇게 브라티슬라바에 대해 얘기를 나누던 중, 예술학 교수님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요지는 간단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브라티슬라바로의 일일 여행은 위험하다는 것.


다만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인답게 어디까지나 ‘금지(ban)’하는 것이 아닌 “가지 않을 것을 강력히 권고(highly recommend not to go)” 하셨고 (이런 건 참 좋다.) 전란에 휘말리면 책임은 너희가 져야 한다 말씀하셨다.


예술학에 대해서는 박학다식하시지만 브라티슬라바 시내를 걷다 폭격당할 확률이 애틀랜타 시내를 걷다 총에 맞아 죽을 확률보다 낮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시는 전형적인 미국인인 교수님의 말씀은 상식적인 선에서 도무지 납득이 불가능했다.


< 브라티슬라바가 위험하면 빈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다. >


백번 양보해서 전쟁이 일어나거나 브라티슬라바가 폭격당한다 한들, 차로 50분 거리에 있는 빈 대신 브라티슬라바를 먼저 폭격할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브라티슬라바 폭격 발언은,


강의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지만,


매 도시마다 자신의 식당을 지정해 학생의 출입을 엄금하고,


피렌체에서 유학했으며 유럽을 수차례 여행했다는 경험이 무색하게


“EU 국가들이 버스 기사들의 2시간 연속 운전을 금지했다.”, “파리 시내 길거리 음주(Drinking in public)는 불법이다. “ 등의 헛소리를 계속해던 교수님께 이골이 난 우리에게,


특히 반골 기질이 심한 내게,


브라티슬라바를 방문해야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심어줬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우려가 과장되었으며, 전쟁이 발발하면 빈도 안전할 수 없다며 논박하자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이런 문화도 좋다.) 결국 교수님께서는 슬로바키아가 동유럽이기에 위험하다는 논리를 다시 펼치셨고 결론적으로는 씨알도 안 먹혀들었다.


< 계획과 버스. 차로 50분 걸리는데 참… >


그룹 전체가 빈에 머무르는 6월 16일 저녁, 낮 호프부르크 궁전 일정 후, 마음이 맞는 친구 셋과 잠시, 아주 짧게 다녀오기로 결정한 후 계획을 수립하고 버스를 예약했다.


국제학생증 덕에 FLIXBUS 할인도 적용받아 왕복 20유로라는 저렴한 금액에 버스 좌석을 예매했다. 자리가 자동 배정되는지의 여부를 몰라 좌석을 지정하는데 4유로 정도를 쓰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당일치기도 아닌 오후 치기 쯤 되려나.


< 색깔만 다른 공공주택의 모습이 사뭇 섬뜩하다. >


VIB 역에서 버스를 잡아타고 훌쩍 떠났다. 빈 국제공항에서 추가로 승객을 태우느라 시간이 지연되긴 했지만 16:20에 출발한 버스는 17:40에 브라티슬라바 Most SNP 역에 정차했다. (브라티슬라바 성과 가장 가까운 역이자 구도심과도 가깝다. 도보로 15분 거리)


< UFO 타워. 브라티슬라바의 명물 >


정류장에 내리니 뒤편으로 브라티슬라바의 명물인 UFO 타워가 보였다. 인터넷으로 확인했을 때 볼품이 없어 실제로 보면 다르겠거니 생각했는데, 짐작이 빗나갔다. 독특한 외관을 제외하곤 특이할 게 없는 건물이 명물이라니… 솔직히 실망스러웠다.


< 올려다본 첨탑의 모습 >


다리 사이로 들어오는 성당 첨탑의 모습을 뒤로하고 언덕을 올라 브라티슬라바 성(Bratislava Castle)을 찾았다.


< 위에서 내려다본 브라티슬라바 >


타워 뒤로 빼곡히 늘어선 공공주택들이 인상적이었다. 이탈리아의 옛스러움도, 독일의 모던함도, 오스트리아의 아름다움도 아닌 동유럽 특유의 칙칙함이 한껏 묻어나, 우거진 녹음과 파아란 하늘,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


< 내부는 볼품없다. >


열린 성문을 따라 들어가니 황량하기 그지없는 광장이 나를 맞이했다. 외관을 제외하곤 볼 게 없다는 리뷰들이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크기만 무식하게 큰 광장이었다.


볼품없는 내부와 달리 성 외곽은 신경을 제법 쓴 티가 났다.


< 기념품 샵 내부 밖으로 난 창에서 찍었다. >


기념품 매장 내부에서 예쁜 사진도 한 장 찍고


< 성 뒤편으로 작은 공원이 있다. 한적하니 좋았다. >


성 뒤편으로 가 공원을 산책했다.


그림을 가려 버리는 루브르 모나리자 앞의 줄, EDM 페스티벌의 펜스 앞자리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베니스의 좁은 골목, 발 디딜 틈 없던 빈의 오페라 하우스와 달리 아직 관광객의 떼가 묻지 않은 브라티슬라바는 한적하고 쾌적했으며, 조용하고 평화로웠다.


가족 하나, 커플 둘셋, 벤치에 앉아 책을 읽어 내려가는 사람 둘 정도가 다였고, 알 수 없는 언어로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만이 잠시 머물다 떠나갔다.


< 하늘이 끝내줬다. >

 

우측으로 돌아 나오니 푸르른 잔디밭에 아이들이 놀 수 있는 자그마한 놀이공원이 조성돼 있었고, 몸을 편히 기댈 수 있는 목재 의자가 공원을 둘러싸고 있었다.


오후에 일이 끝난 후, 혹은 주말 점심에 잠시 들러 아이들은 뛰어놀고 부모는 낮잠을 청하거나 잔디에 몸을 뉘어 아무런 방해 없이 책을 읽을 수 있는 평화로운 곳…


어느 유럽 공원이 그렇지 않겠냐만은 브라티슬라바 성의 공원이 더 특별하게 다가온 것은 쓸쓸치 않은 적막함이 은연중에, 자연스럽게, 묻어 나와서가 아니었을까.


둘 셋이서, 혹은 가족이 함께 들러 울창한 나무와 더불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공원의 모습은 오래간 잊고 지내던 휴(休)식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 시원하니 눕기 딱이었다. >


공원과 성을 뒤로하고 골목을 따라 다시 정류장 근처로 내려왔다.


< 골목을 따라 내려간다. >


Happy hour을 맞아 맥주 한 잔이 1.9유로. 가격을 보고 눈이 돌아가 무작정 호프 집으로 들어가려는 나를 친구가 잡아 세우는 촌극이 있었기에 더 즐거운 산책이었다.


< 전란의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


구시가지로 내려왔다.


< 올드 카. 럭키! >


영문은 모르겠지만, 올드카를 전시하는 행사가 진행되고 있었기에 여러 차들 속을 거닐었다. 차에 대해서는 무지하지만, 딱 봐도 태가 나는, 문외한에게도 소유욕을 일게 하는 아름다운 차량들이었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모든 차들이 CZ, 체코, 번호판을 달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 로컬 마켓, 그리고 공연 >


올드카 전시를 뒤로 하고 공원을 지나 나아가니, 로컬 마켓이 열린 광장이 나왔다. 간혹 아이들이 한국인 두 명과 인도인 두 명의 조합이 사뭇 색다른지 쳐다보긴 했지만, 오일장에 들른 사람들이 어묵을 집어먹거나 자잘한 물건들을 구매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저기 나와는 격리된 어떠한 삶의 장이 넘어가고 있었다.


뒤편의 헝가리 가수가 부르는 노래에 맞춰 스윙하는 노부부와, 마켓 뒤 분수 주변을 자유로이 뛰며 돌아다니는 아이들과 맥주 한 잔을 손에 쥔 채 어디론가 걸어가는 사람들까지...


< 오페라 하우스 >


오페라 하우스를 지나 식당으로 향했다. 기존에 알아봤던 곳은 Gatto Manksa Panska라는 이탈리아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별점 4.7에 리뷰 3000개의 맛집이었으나 예약이 필요해 다른 식당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채식주의자를 찾아보기 힘든 한국과 달리, 서구권에서는 채식 혹은 비건이 사람들의 일상 속에 자리 잡고 있고, 일행 중 둘이 채식주의자였기에 신경을 써서 식당을 골랐다.


그렇게 고르고 고른 식당은 Le Papillon Slovak Fusion Restaurant였다. 내가 가졌던 둔하고 느린 동유럽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한국 서울 강남 시내 한복판에서 인스타 핫플로 유명할 듯한 비주얼의 음식을 내놓는 식당이어서 호기심이 갔다고나 할까. 


< 괜찮았다. >


일단은 우선 맥주부터.


직원에게 슬로바키아 맥주 중 괜찮다고 생각하는 맥주 한 잔을 주면 감사하겠다고 말했는데, 실제로도 나쁘지 않았다. 이름은 여전히 모르기에 다시 찾아가면 무엇을 주문해야 할지는 불확실하나 거의 희미한 곡물 맛을 뒤로한 채로 깔끔하고 톡톡 튀는 탄산을 느낄 겨를 없이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가는 맥주였다.


< 상당한 데코. 그에 상응하는 훌륭한 맛. >


식사는 보는 것부터 시작한다는 점에서 이미 합격이었고, 맛도 훌륭했다. 가격도 15유로 정도로 나쁘지 않았다.


< 시내 와이파이 >


음식을 기다리던 도중 발견한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시내에서 공공 와이파이가 잡힌다는 것. 관광산업 부흥의 일환으로 짐작되는데 간단한 설문조사 하나만 마치면 유튜브를 보기에는 애매하지만 웹사이트 접속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훌륭한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었다.


< 새우와 치즈를 곁들인 링귀니 알리오 올리오 >


소시지와 튀긴 돼지고기 스테이크, 그리고 무엇인지 짐작조차 어려운 메뉴 하나가 포함된 슬로바이카 특식을 도전할 용기는 없었기에 가장 무난하면서도 실패할 수 없는 알리오 올리오를 시켰다. 


새싹채소인 듯한 보랏빛 채소의 씁쓸한 맛이 치즈의 짭조름함과 썩 유쾌하지 못한 대비를 이루기는 했으나 파스타 자체는 정말 훌륭했다. 기본적으로 마늘로 간과 향을 잡되, 마지막에 은은한 풀내음이 입안을 감싸오는 구성이 만족스러웠고, 자칫 너무 미끄러울 수 있는 면 역시 치즈로 받쳐줘 부드럽게 감겨 들어갔다.


채식주의자인 친구가 주문한 비건 버거의 경우 비트루트로 만든 패티가 꽤 인상적이었다. 고구마처럼 달지는 않지만 끝에 단내가 나고, 식감 자체는 퍼석거려 부서지기 직전의 식감이랄까... 여하튼 독특했다.


< 빌런 등장 >


길거리에서 카트를 몰고 다니는 중국인? 여성의 모습이 퍽 충격적이었고


교수님이 걱정하신 바와는 다르게,


< 전쟁의 위협과 공포 >


시내는 너무도 평화로웠다. 


드문드문 눈에 띄는 우크라이나 국기가 그려진 셔츠를 입고 지나가는 사람들만이 저기 저편에서 오늘도 누군가 죽어나가고 있다는 슬픈 현실을 잠시 떠올리게 했다.


< Things to do 3위에 오른 츄밀 동상 >


골목을 돌아 특이한 츄밀(Cumil)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도 찍고 (츄밀 외에도 두세 개가 더 있다고 한다.), 뱀을 둘러맨 사나이를 지나쳤다. 


(지금 다시 보니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된 퍼포먼스였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느낄 수는 없지만 동쪽으로 갈수록 반전 여론이 사람들의 일상에 녹아있다는 사실을 체감한다.)

< 다시 보니 우크라이나 얘기였구나… >


폴라포와 차이점이 전무했던 아이스크림을 주워 먹고 


< 폴라포맛 아이스크림 >


버스에 타 국경을 넘어 돌아갔다.


< 대충 보더니 가버렸다. >


입국 당시에는 없었던 형식적인 출국 심사를 거치고 (여권을 챙기길 잘했다.)

지는 해를 뒤로 한 채 끔뻑끔뻑 졸다가 일어나니 다시 빈이었다.


< 해가 진다. >


3시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그러나 친구의 말마따나 작아서, 볼 게 없어서, 오히려 소소한 기쁨으로 다가왔던 브라티슬라바 여행은 오버투어리즘에 갇혀 지쳐가고 있던 내게 숨 돌릴 수 있는 자그마한 틈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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