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당백 독서록 #01.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류시화)
#1. 이미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
어쩌면 이미 오랜 예전부터 나는 이 글을 쓰게끔 정해져 있었다. 아니, ‘어쩌면’이 아니라 실제로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 나의 시간을 투자하여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나란 존재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전생의 전생부터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먼 전생부터 나는 지금 글을 쓰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그 수순대로 계속되는 이끌림에 의해 지금 이 순간에는 글을 쓰고 있다.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을 읽는 일만 해도 그러하다. 그것도 이번 생에 중에 나는 이 책을 언젠가 한번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이미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 지난 추석 특박 때 우연히(아니 이 역시도 나는 잘 모르지만 이미 잘 짜인 극의 한 부분처럼 정해진 우연으로) 보수동 헌책방 골목의 ‘우리 글방’이라는 북카페에 들어가 책장에 잘 정돈된 책들을 구경하다가 책장에서 벗어나 테이블 위에 놓인 책들 중 마침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덕분에 나는 전생 중 언젠가는 한 번은 가봄 직한 인도로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책의 저자 류시화는 이 여행의 동반자이자 가이드였다.
#2. 인도이니깐.
수많은 배낭여행객들이 찾는 인도, 수행을 위해 인도를 찾기도 하고,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어떠한 이끌림에 의해 인도를 찾기도 한다. 더럽고, 추악하고, 상식선 밖의 일들이 벌어지는 인도이지만 인도에서는 그 모든 일들이 ‘이곳은 인도니까요!’라는 말로 설명이 가능하다. 수행자라는 사람들은 뻔뻔히 구걸을 하고, 가난뱅이 릭샤 운전수도 철학자와 다를 바 없는 말들을 수없이 내뱉는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람에게 화를 내면 도리어 ‘다 지나간 일인데 왜 화를 내는 거냐.’며 도로 한 소리를 들어야 하고, 내 물건을 아무런 죄책감 없이 가져가는 소매치기들에게 한 소리 할라치면 곤란한 말싸움을 해야만 할 뿐이다. 그저 인도에서는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유일한 구도의 길이다. 허니 인도 사람들은 가난하면서도, 아프거나 불행한 것처럼 다른 나라 사람들이 취급을 해도 전혀 개의치 않는다. 모든 일은 받아들일 수만 있을 뿐, 본인이 개입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은 이미 아주 오래전부터 예정되어 있던 일인 것이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이내 그들의 생각에 나도 동화되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 나는 예정되어 있던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3. 모두가 철학자.
인도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신을 따르고, 신을 만나기 위해 수행하는 수행자도 있었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철학자와 다름없었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상대방 때문에 화를 내는 것은 감정에 휘말려 자신을 잃어버리는 일이라는 음악을 공부하는 대학생, 오늘은 아무런 소득이 없었지만 내일은 소득을 낼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하며 절대 절망하지 않는 어린 소매치기, 그리고 형이 죽어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이 없는 명상 센터에서 끝까지 남아 걱정해야 하는 것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에 사는 것이라며 문지기를 하고 있는 스와미 아난다까지. 인도에서 만난 모두는 철학자였다. 자기의 생각이 뚜렷했고, 남을 탓하는 경우는 없었다. 이런 사람들이 가득하니 아무리 더럽고, 추악해도 그들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인도란 그런 나라였다. 길 위에 있는 모두가 철학자인 그런 나라였다.
#4. 구두가 없어도 인도에 갈 수 있다.
류시화는 인도에 가려고 마음을 먹었었다. 그러나 계속 미루기만 하였다. 반드시 인도로 사라지는 거야, 뒷골목으로 말야, 하고 중얼거려도 계속 같은 자리였다. 미루는 일은 인간만이 발명한 일. 구두가 없다는 핑계로 성지순례를 떠나지 못한 여인의 내용을 담은 영화를 보곤 시화는 갑자기 머리를 한 대 ‘띵’하고 얻어 맞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곤 당장 일주일 뒤에 인도로 떠난다. 구두가 없다고 인도에 가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깐. 결국엔 인도에 갔지만 미룸으로써 인도에서 얻을 수 있는 많은 깨달음을 뒤늦게 깨달아야만 했다. 아니, 어쩌면 아예 인도에 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이 역시도 정해진 업보였겠지만.
나 역시도 많은 핑계로 나의 두려움을 숨기며 계속 미루고 있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여행일 수도, 공부일 수도, 운동일 수도 있지만, 하나 확실한 점은 이렇게 미루기만 하다 보면 결국엔 늦는다는 것이다. 늦는 것 이상으로 아니, 아예 못할 수도 있다. 그러니 구두가 없다고 인도를 못 가는 것도 아니니, 나도 이제 더 이상은 그만 미뤄야겠다. 그리고 여행을 떠나자.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한발 먼저 나서 보자. 그러다 보면 어느새 인도에 도착해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바라는 종착이 인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대학 새내기 시절, '영글거림'이라는 별명과 발음이 비슷합니다.
'영재+오글거림', 어쩌면 이것과 느낌이 비슷할지도.
글을 쓰기도, 글을 그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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