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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Aug 10. 2016

#08-3. 배낭 하나 짊어메고서

2016 제 4회 DMZ 평화통일대장정 (종합편)

이전 글.  #08-2. 배낭 하나 짊어메고서 (출발편)


#00. 처음은 '여행'


처음은 ‘여행’이었다. 대한민국 현역 해군으로 군 생활을 하는 중에 가장 길게 나갈 마지막 휴가, 그 기간 동안 나는 배낭 하나 어깨에 짊어지고서 ‘여행’을 떠날 생각이었다. 어디로 떠나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정해진 것은 내가 꽤 오랫동안 떠날 예정이라는 것뿐이었다. 군 생활의 마무리로 나는 어떤 여행을 하게 될까?


그러던 중 배낭만 덜렁 메고서 국토종주를 했다는 한 청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머리가 쭈뼛 서고, 온몸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바닥을 딛고 서있는 두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이거다! 국토 대장정이다! 나는 이걸 해야겠다!’ 군 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행군에서 열외가 되고, 평발이라는 핑계로 3km도 제대로 뛰지 못하던 나였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난 시간 마땅히 걸을 수 있었음에도 걷거나 뛰지 못했던 만큼을 내 두 다리로 걸어 나 자신에게 보상하고 싶었다. 그 순간부터 나의 마지막 휴가는 하나의 일정으로 채워졌다. ‘국토 대장정.’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떠나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배낭 하나 메고서 우리 국토 여기저기를 걷겠다는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 가득해진 뒤였다.


(사진 - 정용권님 / 캘리그라피 - 임영재)


그러다 엄홍길 휴먼재단의 <엄홍길 대장과 함께하는 제4회 DMZ 평화통일대장정>을 알게 되었다. DMZ 155마일, 350km를 7월 8일부터 7월 23일까지 15박 16일 동안 걷는 대장정. 나는 그보다 앞서 자기소개서를 쓰고, 체력테스트와 면접을 치루기 위해 휴가를 사용하고, 부대로 돌아가 다시 군대에서의 일상을 소화하는 대장정을 치렀다. 그리고 이 대장정의 끝에 ‘진짜 대장정’에 대원으로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렇게 나의 마지막 휴가의 행선지가 정해졌다. DMZ. 남북의 사이, 누구나 마땅히 걸을 수 있어야 하는 길이었지만 그러지 못하고 있는 길. 

 

내겐 마땅히 걸어야 했지만 걷지 못한 길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걸 보상하기 위해 이참에 나선 길이었다. DMZ와 나의 처지는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처지를 이겨내기 위해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우뚝이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DMZ도, 나도. 15박 16일의 짧지만은 않은 여행, 나는 그렇게 나의 마지막 휴가를 DMZ에 쏟아 부었다.


#01. 350km를 두 발로 걷기 위해 모인 사람들.
(사진 - 정용권님)

7월 8일, 마지막 휴가를 나와 대장정이 시작되는 신한대학교로 향했다. 군대를 벗어나 군인이 아닌 한명의 대학생으로 대원들의 무리에 섞였다. 나는 그저 115명의 대장정 대원 중 한 사람일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115명이 강당을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우린 아직 서로를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앞에서 마이크를 잡거나 단상 위에 오른 안내자들의 지시에 멍하니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그 사이론 익숙한 빨간 모자가 떠다니고 있었다. 우린 행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지시에 따라 움직이며 대장정 물품을 받았다. 훈련소의 첫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그랬다. 어설프게 짧게 머리를 깎은 우리들은 아직 서로를 잘 알지 못했고, 그저 빨간 모자를 쓴 훈련교관들의 지시에 맞춰 멍하니 움직일 뿐이었다. 밥을 먹을 때 훈련소에 쓰던 포크숟가락까지 같았다. 하지만 대장정을 위해 모인 사람들은 훈련소의 훈련병들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어쨌거나 350km를 두 발로 걷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아니던가.

 

(사진 - 정용권님)


첫날은 텐트 치는 법을 배웠고, 발대식을 연습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구호를 연습했다. 


 도전하지 않는 젊음은 낭비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다. 

도전! 도전! 도전! 
대한민국 DMZ 평화통일 대!장!정!

 

(사진 - 정용권님)

학생대표가 선창하고, 나머지 대원들이 따라했다. 그리고 15박 16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구호를 외쳤다. 대장정의 전체구호는 물론이고, 팀별로 만든 구호까지. 서로 다른 목소리가 하나의 구호를 외치다보면 곧 여러 개였던 목소리는 하나가 되었다. 도전, 열정, 평화, 통일 각 팀끼리 서로의 구호를 바꿔 부르며 서로 경쟁을 하듯 목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그래서 대장정 기간 동안 우리에게 구호는 중요했다. 350km를 걷기 위해 모였으나 350km를 온전히 다 걸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럴 때마다 외치는 구호는 머릿속의 걱정을 잊고 온전히 나아가야 할 길에 집중하도록 해주었다. 때로는 구호를 외치는 빈도가 너무 잦아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 구호는 350km를 걷는 자양분이었다.


각 지역에서 모인 서로 다른 사람들. 살아온 과정도, 살아갈 과정도 모두 다르지만 15박 16일 동안 걷게 될 길은 같았고, 같은 구호를 함께 외쳐야 했다. 그렇게 350km를 두 발로 걷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주위에 가득했다. 걸을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숙영지에서 텐트를 치고 잠을 잘 때도, 그리고 얼차려를 받을 때까지도.


(사진 - 정용권님)
#02. 타는 목마름으로, 느껴지는 벅차오름으로.


(사진 - 정용권님)

대장정을 함께 할 사람들이 모두 모였다. 하늘에서도 모든 종류의 태양들이 모였는지 강렬한 뜨거움이 내리쬈다. 발대식을 하는 날부터 그랬다. 그리고 본격적인 걷기를 시작한 날의 강원도에서도 역시. 이어지는 폭염과 이제 막 걷기를 시작한 걷기 초년병들인 우리. 우리는 아직 무더운 태양 아래에서 하루에 25-30km를 걷는 것에는 걸음마 수준일 뿐이었다. 태양을 피하는 방법도, 제대로 된 자세로 걷는 방법도, 그리고 마실 물의 양을 조절하는 것까지도 미숙하기만 했다. 그러다보니 지급해주는 물은 금세 바닥이 났다. 그렇다고 새로운 물이 계속해서 지급되지는 않았다. 이미 비어버린 물통과 말라버린 목구멍. 땀은 몸의 모든 구멍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왔지만 당장에 지급되는 새로운 물은 없었다. 


우린 타는 목마름으로 해파랑 길의 자전거도로 위를 걷고 있었다. 그 길의 옆은 논과 밭이었다. 그곳이 터전인 농부들은 찌는 뜨거움 아래에서도 묵묵히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운기 옆에 서 계시던 한 할아버지. 할아버지께서는 수건으로 땀을 닦으시더니 경운기 짐칸에서 물통을 하나 집어 드셨다. 그건 얼음물 이었다! 우리가 지니고 있던 비어버린 물통과 할아버지 손에 들린 시원한 얼음물. 우린 걸으며 그걸 지켜볼 뿐이었다. 


 “와 너도 봤어? 저기 할아버지 손에 얼음물? 나도 마시고 싶다.......” 


우리의 대화 주제는 곧장 할아버지 손의 얼음물이 되었다. 그러다가 각자가 지금 마시고 싶은 것들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커다란 얼음 한가득 큰 그릇에 아메리카노 가득  부어서 으으으!!!”, “나는 수박화채!!!” 그리고 대장정 기간 초반 제공되었던 헤라클레스에 빠졌던 한 형은 “나는 시원한 헤라클레스나 두병 원 샷!!!” 이라고 이야기하며 상상이로나마 목을 축였다.


그리고 도착한 오늘의 숙영지는 군부대. 군악대가 입구에서부터 우리를 맞아주고 안에서는 시원한 음료수를 제공해주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는 음료수를 당장에 들이마셨다. 하루 동안 땀으로 범벅된 몸을 쉬게 해줄 곳. 현역 군인이었지만 군부대가 이렇게 반가울 줄은 정말 꿈에도 알지 못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세면장에서 샤워를 할 시간도 주어졌다. 시간은 15분.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8개 정도의 세면대에서 씻기 시작했다. 비누는 없었고 팀원 형이 요원 몰래 챙긴 샴푸가 고작이었다. 그래도 그 샴푸로 머리와 몸에 대충 묻히고 몸을 씻어냈다. 가지고 있던 치약으로 땀으로 찌든 옷에 묻혀 빨래도 했다. 그리고 갈증이 사라지지 않아 샤워호스에서 나오는 물을 마시기까지 했다. 물을 마시고 싶을 때 마실 수 있음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새삼 느끼게 되었다. 15분이면 능숙한 셰프가 냉장고 속에서 재료를 꺼내 음식 하나를 뚝딱 만들기도 했지만 대장정 대원들이 씻고 빨래하고 목까지 축일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목마름이 심했던 며칠간이 지나고, 하루는 야간 교육이 끝난 뒤 잠시 진행 실장님과 대화의 시간이 있었다. 그때 우리가 겪고 있는 ‘물 부족 사태’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오죽하면 샤워 도중에 수돗물을 마셨겠냐는 이야기까지. 그런 식으로 목을 축인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니! 그건 진행 실장님도 물 공급을 담당하는 행정팀에 불만을 갖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렇게 불만을 소리 내어 이야기한 덕분이었을까? 다음날부터는 물이 전날에 비해 풍부하게 제공되었다. 게다가 하늘에서는 비까지 내려 ‘물 부족 사태’가 ‘물풍년’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우리는 타는 목마름을 잠시 내려두고 대장정을 이어갈 수 있게 되었다.


(사진 - 정용권님)

하늘에서 내리는 비는 큰 축복이었다. 구름이 태양을 가려 무더위는 잠시 우리를 비켜갔고, 그럼에도 흐르는 땀을 비가 조금은 식혀주었다. 바람막이를 걸치고 배낭엔 커버를 씌웠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빗방울 방울은 모자 위로, 바람막이 위로 떨어지며 온전히 내 몸에 느껴졌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빗속을 뚫고 가야 할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우리들의 모습. 언제 또 이렇게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걸을 수 있을까? 어쩌면 나는 이렇게 비를 맞기 위해서 이번 대장정에 참여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나의 어깨와 다리, 그리고 머리에 빗방울이 ‘타다닥’ 끊임없이 떨어지며 잘 왔고, 잘 하고 있다고 격려해주었다. 


평소에 가보지 못한 길, 평소에는 해보지 못한 일, 평소에는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들. 하루 종일 걸으며 그런 것들을 몸으로 익혀가는 중이었다. 그러자 조금씩 가슴 속이 벅차오르는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아직 행진의 도중이었지만 이렇게 느껴지는 벅차오름이 이번 대장정의 가장 큰 희열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는 목마름에서, 느껴지는 벅차오름으로. 바뀌어가는 감정 속에서 나는 또 묵묵히 걸음을 걷고 있었다.


#03. 군인 
(사진 - 정용권님)

대장정 기간 동안 우리는 마치 군대의 체계 안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단지 진행을 맡은 대부분의 진행요원들과 진행 실장님이 해군 특수부대인 UDT 출신이셨고, 꽤 많은 날을 군부대에서 묵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수차례의 인원보고, 지시와 통제, 오와 열, 불침번 그리고 얼차려까지. 군대 훈련소에서 했던 과정들은 간소화되어 대장정 일상에 적용되고 있었다. 거기에 대장정 중에 각 군 출신별로 군가를 부르기까지. 나는 현역 병장으로, 누군가는 지난 추억으로 그리고 누군가는 새로운 경험으로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평화통일대장정식 군대생활에 점점 적응을 해갔다. 그러나 그중 일부는 이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중도 포기하기도 하였다. 남은 사람들은 보낼 사람들을 떠나보내고 자유롭지 못한 환경, 몸에 치달아오는 고통 속에서도 자리를 지켜나갔다.


그런 와중에 나는 현역 병장으로 15박 16일의 대장정에 참여한 것에 대해 주목받게 되었다. 나는 그저 길게 나온 휴가동안 내가 하고 싶다고 생각한 일을 하러 온 것이었고, 그래서 한명의 대학생으로 무리에 섞여 있었지만 자기소개를 할 때마다 신분이 신분이니만큼 어쩔 수 없이 “현재 해군 병장으로 복무 중인 서강대학교 커뮤니케이션학부 임영재라고 합니다.” 라고 소개를 하며 팀원들에겐 현역 군인임을 알리게 되었다. 그 나머지 사람들에겐 면접 때를 제외하고는 현역 군인임을 알리지 않았지만 비가 내리기 시작한 37사단 풍차부대에서의 아침부터는 모든 사람들에게 현역 군인으로 대장정에 참여하게 되었음을 의도치 않게 공개하게 되었다.


그 내용은 이렇다. 풍차부대에서 출발 준비를 마치고 부대의 주인인 장병과 지휘관께 인사만 하고 떠날 참이었다. 그런데 사진작가님께서 갑자기 나를 찾으시는 것이 아닌가?


 현역 사병으로 대장정 참여한 대원 어디 있나요?

 ?! 여기 있습니다!


(사진 - 정용권님)

대답을 하고 작가님에게로 다가갔더니 대원들 격려차 부대를 찾은 3군단사령관께서 운영진에게 내 이야기를 듣고는 나를 보고 싶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사령관께선 말년휴가를 이용해 의미 있는 대장정에 참여한 병사가 대견하게 보였고, 그런 내게 3군단의 코인과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옆에 계시던 김태영 단장님과 엄홍길 대장님도 포옹과 악수를 해주시며 대견하고, 대단하다며 말씀을 해주셨다. 조선일보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엄대장님이 나를 언급하시기도 하셨다. (조선일보 기사 내용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7/14/2016071400135.html) 그렇게 나는 현역 군인임을 단원들에게 모두 알리게 되었다. 게다가 해군인 탓에 같은 해군인 UDT 출신 요원님들께서도 내게 관심을 보이셨고, 그 덕에 행진 중에 해군 군가인 앵카송도 목이 터져라 부르고 ‘조선수군’이라는 별명도 하나 얻게 되었다. 


이렇게 주목을 받게 되니 여기서부터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무조건 완주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에 박히게 되었다. 완주하지 못한다면 현역 군인으로서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너무나 부끄러울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몸에 고통이 오더라도, 귀찮은 일이 생기더라도 내가 먼저 나서서 주위의 동료를 도와주고  목이 쉬더라도 언제나 가장 큰 목소리로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을 옮기게 되었다. ‘진짜 군인’인만큼 그 누구보다 열심히 ‘군인 정신’을 발휘한 셈이었다.


#04. 똥차와 물집.


사진 오른쪽에 파란 컨테이너를 싣고 달리는 차가 바로 '똥차'다. (사진 - 정용권님)

한 번에 보통 50분여의 행진을 하다보면 처음부터 중반부까지는 대원들 모두는 팀별로 누가 더 목소리가 큰지 경쟁하듯 구호를 크게 외치기도 하고, 서로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며 소란했다. 하지만 후반부의 시간에는 다들 지쳐 그 소란스러움은 이내 사라졌다. 그렇게 짧은 고요가 이어진다. 그 고요 속에서 어느 순간 진행 실장님께서 선두 쪽으로 앞서가기 시작하고, 선두에서 고요를 깨는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파란 똥차가 눈에 들어왔다. 똥차가 있는 곳에서야 우리는 잠시나마 쉴 수 있었다. 배낭을 풀고 물을 꺼내 마시고 신발을 벗어 발을 편하게 해준다. 양말까지 벗고는 베이비파우더를 뿌리며 다음 순서의 행진을 준비하기도 한다. 똥차로 대소변 용무를 보러 가기도 하는데 대장정의 막바지로 이를수록 똥차에서 풍기는 암모니아 냄새는 심해졌다. 하지만 그만큼 우리가 도착해야 할 장소가 다다랐음을 생각하면 그런 냄새쯤이야 어렵지 않게 버틸 수 있었다.

 

(사진 - 정용권님)

똥차 옆에서 신발을 벗고 쉬고 있노라면 붕대나 밴드로 발에 덕지덕지 붙인 친구들을 볼 수 있었다. 모두 물집 때문이었다. 자그마한 물집에서부터 발가락 전부의 피부 살갗을 모두 도려내야 할 만큼 큰 물집까지 그 크기와 상태도 다양했다. 물집이 잡힌 친구들은 내딛는 걸음마다 고통스러워했는데 이상하게도 내 발에는 물집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대장정은 거의 막바지에 이르고 있는데 발은 깨끗했다. 쉬는 시간마다 발을 말려주고 파우더를 계속해서 뿌려주었던 효과를 본 것이다. 주위에서는 “역시 현역은 달라.” 라며 이야기 해주었다.


그런데 나는 발이 아니라 등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땀띠가 목에서부터 등 전체에 생긴 것이었다. 처음에는 뜨거운 태양 때문에 피부가 놀라 그런 줄 알고 알로에 젤을 발랐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다시 확인해보니 영락없이 땀띠였다. 등에서 가려움과 따가움이 몰려왔고 행진 도중보다도 쉬는 시간에 고통이 더 심했다. 얼른 숙영지로 돌아가 씻어내고 싶었다. 물을 꺼내 등에 조금씩 붓기도 하고 배낭과 옷을 손으로 들어 바람을 불어 넣기도 하였다. 그리고 쉬는 시간마다 파우더를 등에 뿌리며 숙영지에 도착하기 전까지 버텼다. 땀띠가 생긴 뒤부터는 모든 정신이 등으로 집중 되었다. 행진 도중에도, 쉬는 시간에도 그리고 숙영지에서도 느껴지는 고통을 잠재우려 지극정성으로 계속 등에 바람을 불어넣고 파우더를 뿌리는 노력을 더했다. 다행스럽게도 3일 정도의 고통 끝에 땀띠는 미세한 정도의 고통만 남기고 가라앉았다. 그렇게 누군가는 물집 때문에, 누군가는 땀띠 때문에, 또 누군가는 남들은 모르는 무엇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지만 참아내며 대장정을 해나가고 있었다.



#05. 도전, 열정, 평화, 통일 x 크로스.


 도전, 열정, 평화, 통일 네 팀은 팀별 노래와 구호를 여러 개 만들어서 번갈아가면서 외쳤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다른 팀의 노래와 구호를 그대로 가져와 본인 팀명을 넣어서 외치기도 하였고, 팀끼리 서로 한 번씩 선창-후창의 느낌으로 주고받으며 외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가 속한 팀이 아니더라도, 서로 ‘으쌰! 으쌰!’ 힘을 내기 위해서 통일팀이 평화팀의 구호를, 평화팀이 열정팀의 구호를, 열정팀이 도전팀의 구호를, 그리고 한 바퀴를 돌아 도전팀이 통일팀의 구호를 외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서부터, 누구부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우리는 그렇게 서로 연결되어갔다.


 그런 외침은 뒤에서부터 앞으로, 앞에서부터 뒤로 반복되었다. 그리고 가장 선두에 있는 엄홍길 대장님을 향해서도 우리는 외쳤다. 

     

(사진 - 정용권님)
 대장님도 파이팅! 으쌰으쌰으쌰으쌰~ 


 그러면 대장님께서는 양손에 쥐고 계시던 지팡이를 번뜩 드시면서 머리 위로 크로스하여 우리에게 화답해주셨다. 대장님은 매일 매일 선두에서 쉼 없이 걸으셨다. 대장님 가방 한 쪽에서 흘러나오는 작은 음악과 함께.

 크로스로 우리에게 화답해주시는 대장님이 한번은 언덕의 오르막을 오르는 길에 평소보다 배로 빠른 속도로 걸으셨다. 뒤를 졸졸 따라붙는 대원들 중 일부가 금세 뒤쳐졌다. 짧은 구간이었지만 우리는 배로 힘들었다. 오르막을 다 오르니 대장님께서는 뭐 이런 짧은 코스에 힘들어 하느냐 나지막하게 호통 치셨다. 하지만 그건 오르막길의 고통을 단시간에 끝내 우리에게 부담을 지우려는 대장님의 배려였음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느낄 수 있었다. 그 순간에는 뒤처지는 친구들을 뒤에서 밀어주고 당겨주느라 아무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런 순간들이 15박 16일 동안 꽤 많았음은 다 지난 지금에서야 떠올리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네 팀의 외침 속에서의 연결과 대장님의 크로스, DMZ의 많은 구간들을 지나고 전망대에 오르며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아이처럼 펼쳐진 DMZ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연결처럼, 대장님의 크로스처럼 남북이 함께 연결되는 모습이 얼른 오기를 그렸다. 그런 한편으로는 적의 도발에 항시 긴장하며 있어야 하는 육해공 모든 전우들의 모습도 떠올렸다. 실제로 서해안 바다에서 북한 함정이 NLL을 침범하여 새벽 중에 비상이 걸려 자다가 급하게 출동하곤 했다던 해군 동기의 말이 최전방에서 근무를 서고 있는 육군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함께 떠올랐다. 그래서 더더욱 이런 우리의 발걸음이 힘이 되어 남북이 평화롭게 통일하여 크로스 되기를 기원했고, 더 힘차게 하루하루의 일정을 소화하려 하였다.  


#06. 완주 그리고 여행의 끝.



(사진 - 정용권님)


어느새 강원도 고성에서 출발한 우리는 경기도 파주로 들어섰다. 이제 진짜 조금만 더 가면 목적지였다. 그런데 같은 팀의 아이 한명이 발에 물집이 너무 심해 도저히 혼자서 걷기 힘들겠다며 내게 도움을 청했다. 처음엔 배낭에 걸려있던 수건을 잡게 하고서 같이 걷다가 이내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걸었다. 대열에서 조금 뒤쳐졌다가 “하나, 둘, 셋.”을 외치면서 다시 대열에 합류했다가 다시 뒤쳐졌다가 다시 합류하기를 수차례, 잡고 있던 손은 땀으로 가득했고 그 아이는 발에 고통이 너무 심해서인지 눈물을 보이기도 하였다. ‘얼마나 힘들면 울기까지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손을 더 꼭 쥐면서 “하나, 둘, 셋.”



그런 식으로 115명의 대학생들 중 107명의 대학생이 파주 임진각에 도착했다. 350km를 완주한 것이다. 대장정 내내 눈물을 보인 적 없던 형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기도 했고, 대장정 중에는 고통 때문에 울상이었던 아이의 얼굴에 싱글벙글 웃음이 가득해지기도 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15박 16일 동안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사이에서, 산길로도, 도로 위로도 걸으며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목적지에 도착한 기쁨에 긴장이 풀려서 그랬을까? 간만에 의자 위에 앉아서 그랬을까? 완주식이 진행되는 와중에 졸음이 쏟아졌다. 그건 옆에 앉아 있던 아이도 마찬가지였는지 임진각에 도착 직후 눈물을 보이던 눈은 그새 반쯤 감겨 있었다. 눈이 스르르 감기다가 소리가 들리면 잠깐 깨고, 스르르 감기다가 잠깐 깨고. 스르르 감긴 눈에서 지난 15박 16일 동안 매일같이 걸었던 모습이 비쳐졌다. 어쩌면 꿈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이게 진짜 꿈이면 어쩌지?’ 하는 생각이 들자 급하게 눈을 뜰 수밖에 없었다. 눈 앞에는 대원들이 구호를 외치기 위해 자리에서 하나, 둘 일어서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도전하지 않는 젊음은 낭비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다. 도전! 도전! 도전! 

대한민국 DMZ 평화통일 대! 장! 정!”

대장정을 마쳤다. 휴가도 끝이 났다. 부대로 복귀했다. 많은 것들이 바뀌어있을 줄 알았다. 15박 16일 동안 그 많은 곳들을 돌아다니고, 많은 것들을 보고, 많은 것들을 떠올렸으니 내가 돌아온 자리도 많은 것들로 가득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휴가를 떠나기 전, 대장정을 떠나기 전과 다를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는 달랐다. 새까맣게 탔고 몸은 조금 더 가벼워졌다. 덩달아 마음도 가벼워진 듯했다. 군생활의 막바지 떠났던 대장정, 지난 시간동안 미처 걷지 못했던 지난 나를 보상하기 위해 떠났던 길. 나는 그 길을 충분히 걸었다.

 

여행도 끝이 났다. DMZ로 떠났고, 114명의 나와 다른 대학생들을 만났고,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이제 23개월의 군 생활이라는 대장정도 목적지에 거의 다다랐다. 어쩌면 대장정의 마지막처럼 군 생활의 마지막도 꿈처럼 느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장정 때처럼 여기저기 많이 다치기도 하고, 힘들기도 하고 때로는 즐거운 일로도 가득했던 군 생활.  그리고 그 막바지에 내 두 발로 걸었던 350km. 다시 사회로 새롭게 여행을 떠나게 될 내게 큰 밑천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밑천인 대장정처럼 나는 또 우뚝 걸어 나갈 것이다. 신발 끈 꽉 조여매고 몸도 가볍게 풀고, 목소리도 가장 크게 낼 준비를 하고서.



(사진 : 정용권님)

2016년 여름, 나는 그렇게 하나의 도착점과 새로운 출발점 위에 서 있다.


15박 16일 동안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이 피부에 새까맣게 남았고, 15박 16일간의 걸음동안 다리는 더 단단해지고, 그 기억들로 15박 16일 너머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너머로 나아가려 다시 신발 끈부터 꽉 조이고 있었다.

(사진 - 정용권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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