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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Mar 02. 2018

귤상첨화 유아독존.

[취향 : ㄱ에서 Z까지 "ㄱㅏZㅏ"] ㄱ 하나, <귤>

[취향 : ㄱ에서 Z까지 "ㄱㅏZㅏ"]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ABCDEFGHIJKLMNOPQRSTUVWXYZ으로 시작하는 취향을 모읍니다.

ㄱ에서 Z까지 모으다보면 세상의 모든 취향을 이야기하기 조금 더 쉽지 않을까요?

#세상의모든취향 #ㄱ에서Z까지 #ㄱㅏZㅏ


오늘은 비가 오진 않았다. 낮에는 해가 쨍했다. 바람은 차가웠다. 비가 온 뒤의 여운이었다. 이런 날은 '이불 밖은 위험해.'라는 노래 제목처럼 이불 밖은 위험하다. 햇살에 속아 얇게 입고 나왔다면 감기 걸리기 더없이 좋았다.



이불 밖은 위험한데, 아까운 내 온기.


하지만 개강 날이라 어쩔 수 없이 이불에서 꾸물꾸물 나왔다. 전기 장판의 온기가 가득한 이불 안을 벗어나는 일이란, 물이 가득한 독에 구멍을 뚫는 일과 같다. 사용하지도 않는 어플 탓에 배터리와 데이터가 나가는 일과 같다. 온기를 가두기 바빴던 이불 속에 큰 구멍이 생긴다. 한 순간에 이불 밖의 차가운 공기가 스민다. 그 때문에 온기가 모두 새어 나간다. 아까운 내 온기.


만일 한창의 겨울이었다면 전기장판에 불을 올려두고 얼굴과 팔만 이불 밖으로 내민 채로 귤을 까먹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손톱에 귤색 물이 스미고, 한없이 먹다보면 입 안의 온갖 신경이 귤이 되는 기분이 들 정도가 되기도 한다. 이불 옆엔 귤 껍질이 쌓인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귤은 죽어 껍질을 남긴다. 멋진 일이다.



귤에 대해선 귤 껍질을 어떻게 까느냐부터, 귤이 죽어 남긴 귤 껍질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귤을 한 알씩 먹느냐 혹은 한꺼번에 많이 집어 입에 넣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귤취(귤에 대한 취향)가 있다. 전기장판과 귤의 조합은 두 말 하면 입 아픈 조합이고.


기미상귤


그중에는 귤의 시큼함을 싫어하는 취향도 있다. 아버지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온갖 종류의 신 맛을 좋아하지 않는다. 


전기장판이 깔린 거실에서, 이불 사이로 발을 맞대고 둘러앉아 TV를 보면서 귤을 먹을 때, 귤이 아버지에게 먼저 가는 일은 없다. 귤을 깐 뒤면 아버지를 제외한 가족들이 먼저 귤을 한 알, 두 알 먹는다. 그리고 시지 않은 귤을 발견하면 아버지와 귤을 공유한다. 그 예전 임금님의 수랏상의 찬을 먼저 먹어보는 '기미상궁'같은 '기미상귤'이다.


가끔씩은 신 맛의 귤을 먹으며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귤을 먹은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아버지 입에 손수 귤을 넣어 드린다. 이내 아버지의 표정이 찡그려진다. 화가 난게 아니다. 귤이 셔서 그럴 뿐이다. '비타민입니다.'


귤이 귤 맛이 나서 귤 맛이 난다고 했을 뿐인데,
어찌 귤 맛이 나냐고 물으시면,
소인은 어찌 대답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소인은 그저 귤을 입에 넣어 드렸을 뿐입니다.


다 사랑이라서 그래


1박 2일의 복불복을 하는 멤버가 까나리 액젓을 아메리카노처럼 마시고, 소금 우유를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우유처럼 마시는 이유는 그 맛을 함께 공유하고 싶은 사랑 때문일 것이다(?)


나도 신 맛이 나는 귤을 아버지 입에 넣어 드린 것은 모두 사랑 때문이다. 그 시큼함 속에 비타민이 가득하지 않은가.




밖에 찬 바람이 분다. 이렇게 찬 바람이 불면 전기장판이 켜진 이불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이불에서 얼굴과 팔만 빼고 귤을 까먹고 싶어진다. 그 옆에 만화책이나 좋아하는 프로그램 다시보기가 있다면 금상첨화, 아니, 귤상첨화다. 그 하늘 아래에선 귤상첨화 유아독존이다. 찬 바람 불 때, 귤과 전기장판이면 하늘 아래 홀로 행복할 수 있다.


물론 시큼한 귤을 싫어할 수도 있긴 하지만.


귤상첨화 유아독존. 


#취향관

#취향관일지 

#취향

#세상의모든취향 

#ㄱ에서Z까지 

#ㄱㅏZㅏ


180302 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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