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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꽃 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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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라이세이 Sep 24. 2020

해국(침묵)

그리고_해국

입을 닫고 지낸다. 괜히 다른 사람과 말을 섞다 보면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많이 듣고, 많이 뱉어야 할 것 같아서 이왕이면 말을 하지 않는다. 업무적으로 필요한 말만 하고 입을 닫는다. 감정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사실적인 말을 사무적으로 뱉어 낸다. 그러다 종종 감정을 드러내려면 어설프다. 


회사를 마치고 곧장 집으로 돌아오면, 그때부터는 더 할 말이 없다. 혼자 있는 방, 마음속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면 그만이다. 침묵의 시간. 이 시간이 길어지자 지금은 내 호흡에 집중하는 시간이라고, 내가 만드는 소음에 귀 기울이는 시간이라고 정한다. 발바닥이 바닥에 닿았다 떨어지는 소리, 냉장고의 냉각기가 돌아가는 소리, 얼굴도 모르는 이웃이 문을 여닫는 소리. 코로 숨을 내뱉고 마시는 소리.


오늘은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바람 소리가 집 안을 맴돌았다. 하늘이 맑아 구름이 떠다니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었는데 바람 소리만큼 빠르게 구름이 움직이는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집에는 바람 소리가 세차게 맴돌았다. 어딘가 구멍이 난 것은 아닌가 할 정도였다. 그런 집에서 오늘은 하염없이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챙겨 먹고는 소파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가 침대로 이동. 침대에서 일어나 과자를 몇 개 주워 먹고는 어지러워서 다시 자리 돌아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그런데 난 생각보다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말을 많이 하면서 속에 있는 것을 풀어내는 사람이었다. 회사와 집에서 침묵하고 있긴 하지만, 말을 많이 한 날에 마음이 후련해지는 걸 느꼈다. 어제가 딱 그랬다. 오래간만에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자리였고, 질문과 대답이 오가는 자리였다. 마주 앉은 사람이 질문하고 나는 대답했다. 짧은 질문에 긴 답변. 내가 말을 더 많이 하는 자리였다. 시원하게 떠들어댔다. 말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생각을 정리하면 말을 뱉었다. 그렇게 1시간여를 떠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개운했다.


고등학생 때는 점심시간마다 나와 함께하는 친구가 있었다. 굳이 우리 반까지 와서 조금 늦게 식당으로 향했고, 식당에서 밥을 다 먹고는 함께 운동장을 뱅뱅 돌았다. 그러면서 나는 계속 말을 했다. 교실에 돌아와 수업 종이 치기 전까지 낮잠을 자는 순간을 빼놓고선. 군대에서는 같은 부대에 발령 난 동기가 있었다. 사무실도 같았고, 방도 거의 같이 썼으니 2년 동안 계속 붙어 다녔다. 선임들이 없을 때 선임 욕을 하고, 군인인 우리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 주로 내가 말했고, 동기는 듣는 쪽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고 나면 불만을 가지고 있던 그 일도 그냥저냥 할 수 있었다. 그만큼 말을 많이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침묵이다. 회사 안에서, 집에서. 사적인 일을 입으로 내뱉으려 하지 않는다. 이 말을 받아 줄 사람을 아직 찾지 못하여 그런지 조용하다. 그런 침묵만큼 생활도 큰 변화 없이, 심심하게 보내는 중이다. 가끔은 무기력하고, 가끔은 재미가 없다. 그래서 그런 조용함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아직은 그저 조용히 다른 소리를 듣는 것이 고작이지만.


_에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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