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라이세이 Feb 21. 2016

#05. 유치환 우체통을 찾은 유치한 이유.

이바구길인데 이바구가 없었다.


부산사람, 낯선 부산역.


부산역이다. 많은 이들에게 부산역은 부산여행을 시작하는 시작점이자 종점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부산역은 부산에서 꽤나 친숙하고 낯익은 공간이다. 하지만 정작 부산사람인 나는 이 부산역이 낯설다. 부산여행을 나서려 부산역을 찾은 적도 없으며, 다른 곳으로 떠날 때에도 부산역을 이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나에게 부산역은 낯설다. 낯선 공간에서의 출발은 어색하다. 여행은 이 어색함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한다. 어색한 출발, 어색한 발걸음. 지극히 정상적인 여행의 시작. 


그래서 나도 낯선 부산역에서 하루간, 심지어 그것도 오후 잠깐 동안만의 여정을 시작한다. 

부산역은 역시나 나에게 낯설다.


초량 이바구길(이바구는 '이야기'의 경상도 방언)


부산역에서 출발해서 초량 이바구길을 통해 <유치환 우체통>으로 가려고 마음 먹었다. 이바구길을 통해 걸으면 168계단이 나오고 그 계단을 따라 쭉 올라가면  <유치환 우체통>이 있을 것이라고 잡지에서 읽은 바 있었기 때문에 무작정 이바구길을 찾으려 했는데 보이지가 않았다. <유치환 우체통>에 가서 1년 뒤에 도착하는 느린우편으로 1년 뒤에 나에게 편지를 써야하는데....... 


부산역은 낯설지만 초량은 친척집이 있는 동네라서 익숙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결국엔 휴대폰 어플의 도움으로 이바구길의 표지판을 찾았다. 그리고 휴대폰을 닫았다. 더이상 어플의 도움은 필요 없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그런데 휴대폰 어플을 닫자마자 길을 잃은건지, 이바구길은 전혀 아닌 것 같은 길로 걷고 있었다. 도저히 아무리 걸어도 168계단이라는 곳은 보이지 않고, 우체통의 형상 비슷한 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것은 노란 테이프로 싸매어진 빈 공중전화 박스. 


<빈 공중전화 박스를 보고서>


부동산 옆에 위치하고 있어서인지 부동산 소식이 붙는 알림판의 역할을 하고 있더라. 옛날에는 이 공중전화로 꽤 많은 사람들이 애인에게 전화를 하거나, 엄마에게 전화를 하거나, 아니면 그저 수화기만 들고서 어디에 전화를 걸어야 할 지 모르는 듯 우두커니 가만히 서 있기도 많이 했겠지.



그런 생각에 나는 잠시 멈춰서서 카메라를 들었어. 나도 대학 들어오기 전까지는 휴대폰이 없어서 공중전화를 많이 썼었거든. 특히 콜렉트콜. 군인이라서 군대 안에서도 공중전화 같은 기능의 전화기를 쓰는데 옛날 모양의 공중전화는 아닌지라 이 모습이 더 애틋하게 느껴졌달까. 그래서 이렇게 잠깐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돼.




이바구길이 아닌 이바구길


하는 수 없이 휴대폰을 다시 꺼내서 길을 찾게 되었다. 이바구길은 아닌 것 같았고 휴대폰은 그냥 초량의 산복도로와 밀집된 주택들이 뒷편으로 보이는 골목 골목으로 길을 안내했다. 


이바구길이 아닌 곳을 걸었고, 이야기 할 사람없이 혼자 걸으니 내가 왜 이바구길을 걷는건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날씨도 흐리고 점차 추워졌다. 집은 많았으나 사람은 없었다. 차들도 한 무리가 서 있었고, 꽃이 피기까지 했지만 외로웠다.



유치환 우체통


그렇게 이읃고 도착한 <유치환 우체통> 생각보다 너무 덩그라니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 곳을 찾은 이유는 유치하게도 엽서 한 장을 붙이기 위해서였기 때문에 그런 것쯤은 아무 상관 없었다. 우체통 아래층에 위치한 시인의 방에서 엽서를 한 장 얻어서 1년 뒤 나에게 보내는 엽서를 썼다. 이 엽서를 쓰기 위해서 발걸음을 옮긴 것이었지만 막상 엽서를 쓰고자 펜을 들었을 때는 그다지 쓸 말이 없었다. 나는 정말로, 엽서를 한 장 1년 뒤의 나에게 부치기 위해 이 곳에 온 것이었을까. 어쨌든 큰 의미없이, 유치하게도 이 곳에 왔다.

 
















168계단을 찾아서


엽서를 하나 써서 우체통에 넣음으로써 <유치환 우체통>을 찾은 목적이 달성 되었다. 그래서 곧장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올라오면서 밟지 못했던 168계단이 가고 싶어졌다. 또다시 휴대폰 어플을 켰다. 동네가 너무 골목골목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어플도 역시나 골목골목으로 나를 안내했다. 


골목 끝에서 보이는 반대편 골목 끝의 아이, 다 해진 페인트, 골목 사이마다의 계단... 이런 것들을 하나씩 지나가면서 168계단으로 향했다. 지도 어플을 보고 있으면서도 내가 가는 이 골목이 맞는건지 헷갈려 하면서.



공사 중

그런데 왠열? 도착한 168계단은 공사 중이었다. 168계단에 있는 계단이 168개가 맞는지 세어보겠다는 생각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의욕을 잃고는 그냥 아래로 내려왔다. 이 계단을 찾으려고 오르내린 골목마다의 계단이 168개는 넘었을텐데,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그 밑의 계단에서 다시 생기를 찾았다. 


168계단이라는 명성을 얻어 유명해진 계단은 아니었지만, 색색 바람개비가 있어 괜히 동심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계단이 있었기 때문. 


바람이 가득 불어 바람개비가 쌩쌩 돌아가고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 정도의 바람이 나를 맞이해주지는 않았다.







올드보이, 차이나타운, 그리고 군만두.


길을 따라 쭈욱 내려오자 부산역 맞은편에 위치한 부산 차이나타운에 접어들었다. 이 곳에 영화 <올드보이>에 등장한 중국집이 있다는 소식에 그 중국집을 찾아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간짜장 하나와 군만두 작은 것을 시켰다. 간짜장의 가격과 군만두의 가격은 같았다. 나에게는 무척이나 비싼 군만두였다.


영화 <올드보이>를 제대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올드보이>라는 영화에 등장한 중국집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중국집을 찾게 된 나는, 어쩔 수 없이 미디어의 희생량이 되었다.


그러니깐 이 말은, 기대하고 먹었던 영화 <올드보이>에 등장한 중국집의 군만두의 맛이 영 별로였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간짜장까지도. 속은 느끼함으로 가득 찼고, 나는 이 느끼함은 간직한 채로 여정을 마쳐야 했다.




유치한 이유로 여정을 시작하고, 느끼하게 여정을 마쳤다. 


골목골목마다 걸으며 느끼는 정취는 좋으나,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꽤나 큰 실망으로 가득했다.


그래서 여행은 여행을 떠나는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들 말하는 것이었을까. 그 과정에서 느끼는 것들이 여행의 참 묘미가 아닌가 싶다. 이 맛으로 느끼함을 달래야 겠다는 생각으로 이 글도 마친다.


1년 뒤에 도착할 내 엽서는 무사히 잘 도착하겠지? 곧 내가 이 엽서를 보냈다는 것도 잊겠지만 말이다.





나만의 청춘로드 '빛글로.'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기록을 남기며.
글을 쓰기도, 글을 그리기도 합니다.

(Copyright ⓒ 2016  빛글로다.  All Rights Reserved.) 

페이스북   facebook.com/move.writing
인스타그램   instagram.com/lim6922
매거진의 이전글 #04. 거 가면 바람이 막 불 것 같고 왠지 좋잖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