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돌아오지 않을 시간 속에서

"어디선가 미소 짓고 있어 주면 좋으련만..."

by 돌아보면

그날은 여느 때랑 별반 다르지 않은 흔한 직장인의 평일 아침이었다. 굳이 다른 게 있었다면 간밤에 시작한 웹툰 정주행을 새벽 3시에 마친 탓에 퀭해진 눈가 정도일 것이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세수를 하고 화장실에서 나오니 출근하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보인다. 조심히 다녀오라는 말에 아버지는 쿨하게 손을 들어 인사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다. 최근 3일간 같은 모습의 아침 인사다. 그 모습을 보신 어머니는 그 인사법의 최초 전파자인, 함께 즐겨 보는 월화드라마 남자 주인공의 손목을 언젠가 기필코 자르겠노라며 잠시 투덜댄 후 내 아침밥을 준비해 주셨다.


출근 후 약 2시간 내 외면 내가 먹었던 아침 메뉴를 곰곰이 생각해야 할 만큼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출근을 준비한다. 비슷한 시간에 샤워를 하고 옷 고민을 잠시 하다가 이내 무난한 걸로 골라 입고 항상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선다. 기계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어떤 노래 가사 말을 빌리자면, 카드빚 갚는 기계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대중교통을 이용하건 차를 이용하건 아침 출근길은 정교한 흐름 같은 게 있어서 이 흐름을 조금이라도 놓치게 되면 회사 도착 시간은 훨씬 늦게 된다. 처음엔 이런 사실을 본인만 발견한 줄 알고 엄청난 발견이라며 이론 같은 걸 써볼까 한 적이 있었다.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며 그 자리에서 여자친구에게 장문의 카톡을 보냈다가 'ㅋ'으로 약 다섯 줄 가량 뒤덮인 답장을 받기 전까지는. 자기가 뭐든 다 알 수 있다는 굉장한 통찰력을 지닌 양 살았던 과거를 잠시 추억한 뒤 어머니께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섰다.


집 안이야 난방이 잘 돼서 신경 쓰지 않지만 당장 현관문만 나서도 신세계가 기다리고 있다. 열이 많은 체질에 다시 한번 감사하며 - 여름에는 저주하겠지만 - 집 앞 정류장에서 회사 근처까지 가는 버스를 탄다. 버스에 몸을 싣고 30분 정도 기절해 있노라면 어느 순간 회사 근처다. 그녀와 아직 만나고 있던 신입사원 시절, 거기서 정확히 30분을 더 자서 또 다른 신세계에 도착했던 기억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요즘 느끼는 거지만 내 일이 뭔지 도대체 모르겠다. 분명히 해외영업 직무로 들어왔고 입사한지 두 달 만에 해외 출장도 다녀오는 기염을 토했다. 심지어 험상궂게 생긴 클라이언트들 앞에서의 프레젠테이션도 성공적으로 마쳤었다. 그랬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이번 주 분 세금계산서를 처리한 후 홈페이지 고객 문의 게시판의 답변을 일일이 작성한 후 전화해서 상담을 하고 일러스트레이터를 켜서 새로 나올 제품의 브로슈어를 제작한다. 중간에 오는 문의전화는 모두 내 몫이다. 문의전화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으므로 입사 초 가끔 02나 031로 시작하지 않는 불특정 다수의 숫자들이 잔뜩 내 사무실 전화기의 액정 화면을 채울 때면 이번엔 어떤 외국인이 한국 영어 교과과정에는 없는 다이나믹한 발음으로 내 귀를 혼란에 빠트릴까 긴장하며 전화를 받곤 했다. 내 자리 옆에 있는 사장님 방문 안에서는 사장님이 90% 확률로 MLB 경기를 보고 있을 것이며 내 자리 맞은편의 개발 이사님은 광대가 평소보다 3cm가량 상승해 있는 것으로 보아 코딩을 하며 유튜브로 신동엽 씨가 진행하는 안녕하세요 라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일을 멈출 수 없다. 나열한 일들 모두 오롯이 내 일은 아니지만 지시받았으니까 해야 된다. 그리고 오늘 다 해야 하니까 쉴 틈은 없다. 이러다가 일이랑 결혼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을 이내 털어버리고 일에 집중했다. 그렇게 내 오전이 사라졌다.


점심시간이 되어 직원들과 구내식당에서 밥을 흡입한 후 사무실로 복귀한다. 빨리 먹으면 많이 쉴 수 있으므로 우리 모두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거짓말 같은 호흡으로 같은 타이밍에 식사를 마친다. 구내식당치고는 놀라운 퀄리티가 우리 회사의 거의 유일한 장점이다. 그녀에게 내 식판에 가득 담긴 깐풍기와 소시지, 폭 찹과 소고기가 가득한 소고기 무국, 새우볶음밥 사진을 찍어 보내며 자랑하자 한 5분 후에 병원 환자식 같은 처량한 사진을 받은 적이 있었다. 사진을 그렇게 보낸 죄로 나는 그날 저녁 데이트를 그녀의 멱잡이로 시작했다.


남은 점심시간을 의자에 기대앉으며 - 사장님이 끝없이 생색내시는 우리 회사의 몇 없는 복지 중 하나인 인체공학적 설계로 제작된 비싼 의자님이시다. 그 돈으로 월급이나 올려 주시지. - 최근 2년을 돌아보았다. 다음 주에는 신입사원이 올 테고 나는 이제부터 내 일을 맡게 될 그에게 동정심이 피처링된 인수인계를 마친 후 일을 그만둘 예정이다.


사실 이 일이 좋아서 한 건 아니었다. 그냥 계속 집에서 취업 준비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기엔 부모님께도, 여자친구에게도, 여자친구 부모님에게도 미안했으니까. 그렇게 시작한 직장 생활이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와 헤어지게 되었다. 거창한 이유는 없었다.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그냥 남들 헤어지는 것처럼 흔한 이유였다.


월요일 출근길에 이별 통보를 받을 당시에는 아무렇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출근해서 아무렇지 않게 오전 업무들을 깔끔하게 처리했고 아무렇지 않게 직원들과 농담을 나누며 밥을 먹고 아무렇지 않게 오후 업무도 처리하고 야근하는 옆 부서 과장님의 눈을 최대한 마주치지 않으며 인사를 한 후 퇴근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체육관에서 운동을 하고 아무렇지 않게 집에 와서 닭 가슴살을 삶아 먹었다. 그렇게 하루의 마무리를 하고 침대에 누웠고 아무렇지 않게 밀렸던 웹툰을 보며 노래를 듣다가 시간이 늦은 것을 보고 자야겠다라고 마음먹은 순간부터 2시간이 넘어가던 시점에서 핸드폰을 안 봤으니까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계속 눈물이 나와서 울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출근시간이 되면 몸은 움직였고 거짓말처럼 정상적인 하루 일과를 보낸 후 집에 와서 잘 준비를 끝내면 또 같은 과정을 반복했고 이 짓을 3일 동안 계속했다.


그녀를 잊기 위해서라면 뭐든 해야 했다. 그것이 일이든 공부든 운동이든 술자리든 나는 내 몸이 집에 와서 지쳐 쓰러져 잠들게끔 스스로를 몰아쳤고 그게 벌써 2년 전 이야기다. 나를 몰아치던 그런 삶조차도 정형화가 되어버려 나는 가끔 쳇바퀴나 레일 같은 곳에 올라와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잘 지내라고 말하며 떠나간 그녀가 바란 건 분명 이런 것은 아니었을 텐데. 그렇지? 늘 반복되는 하루였지만 오늘은 이상하게도 무슨 일을 하던 그녀와 연관된 에피소드가 떠올랐고 나는 몇 겹을 겹쳐 깊숙이 묻어두었던 그녀를 2년 만에 조심스레 꺼내어 추억했다.


우린 다른 연인들과 별로 다를 것은 없었다. 비슷한 이유로 싸우고 비슷한 이유로 화해했으며 비슷한 이유로 사이가 깊어지기도 하고 비슷한 이유로 사이가 멀어지기도 했으며 비슷한 이유로 이별했다. 하지만 단 하나 특별한 것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만났던 그 누구보다도 내가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알게 해 준 여자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상냥하게 대해주던 그 모습에 나는 괜히 센 척을 하며 그녀가 원하는 반응을 해 주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내 속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이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장담하건대 타임머신이 있어 그때로 돌아간다면 내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서서히 지쳐갔고 우리는 사랑을 나누는 사이에서 상처를 주는 사이가 되고 말았으며 결국 이별하게 되었다.


너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언니와 부모님은 잘 지내고 건강하실까? 유쾌하던 친구들과도 잘 지내고 있을까? 벌써 두 번째 겨울이 지나가 아프고 나빴던 기억은 흐려지고 좋았던 기억만 뚜렷해지고 있네. 이런 나를 너는 가끔 떠올릴까? 기다리고 있을까? 내가 너를 기다리는 만큼 너도 나를 기다릴까? 아니면 돌아오지 않을 그 세월 속의 서로를 그리워하며 이렇게 현재를 살아갈까? 아니면 그저 미움만이 남아 나를 잊었을까? 어떤 대답이든 상관없어. 그냥... 돌아갈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지금 이 순간에서, 그리고 앞으로도 어딘가에서 나한테 보여주었던 그 예쁜 미소를 지으며 살아가길 바랄게.




영원할 것만 같았던, 헬렐레 거리던 어린 시절을 지나 사람마다 시점은 다르겠지만 우리는 언제부턴가 '바쁘게 살고'있다. 그리고 누구나 그리워하는 과거 한 시점쯤은 있을 것이다.


과거를 그리워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고통스러운 과거가 있더라도 고통스럽기 이전 시점을 그리워하지 않을까? 지금이 힘들기에, 미래는 알 수 없기에 시간이 지나서 흐려진 과거가 상대적으로 괜찮았으니까 그리워하는 게 아닐까?


그게 좋은 기억이 미화된 원본도 아름다운 과거든 아픈 기억이 시간이 지나 희미해져서 그래도 그 정도면 괜찮았다고 하는 자기합리화를 끼얹은 과거라도 말이다.




[Zard - 歸らぬ時間の中で(돌아오지 않을 시간 속에서)]


조금 잰 걸음으로

빌딩의 골목을 빠져나가.

고독한 매일매일이

어느샌가 나를 어른으로 만들었네.


일을 사랑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널 잊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좋았어.


돌아오지 않을 시간 속에서

두 번째의 겨울이 지나가.

서로 상처 주었던 먼 옛날이

이유도 없이 그리워지네.


지금까지의 생활은... 틀에 박혀 있었지.

그런 생각이 들었어.

네가 바라던 건 분명

그런 건 아니었을 텐데.


네가 상냥하게 대해 줄 때면 괜히 강한 척해보고 싶었어.

내 마음속을 꿰뚫어봐 주었으면 좋으련만...


돌아오지 않을 시간 속에서

각자 기다리는 사람이 있겠지만,

서로 상처 주었던 먼 옛날이

이유도 없이 그리워지네.


돌아오지 않을 시간 속에서

두 번째의 겨울이 지나가.

서로 상처 주었던 먼 옛날이

이유도 없이 그리워지네.


돌아오지 않을 시간 속에서

각자 기다리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대, 돌아오지 않을 그 세월 속에서

어디선가 미소 짓고 있어주면 좋으련만...


Zard 19th single 'Don't you See!'(1997.1.6)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