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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처음 울던 날

"이젠 더 볼 수가 없네. 그녀의 웃는 모습을."

by 돌아보면

지금도 그렇고 그때도 그렇고 내가 나이를 많이 먹은 건 아니었지만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자리에서 처음 본 그녀를 쭉 관찰한 결과는 다음과 같다.


"살다 살다 저런 애 처음 봤다."


그래, 그녀는 항상 웃었다. 신이 그녀를 만들 때 성실함 한 스푼, 외모 한 스푼, 그리고 웃음을 한스ㅍ...이라고 하다가 그만 손이 미끄러져 으어어어 하고 웃음 통을 통째로 들이붓지 않고서야 저럴 수가 없을 것이다. 별로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에 즐겁게 웃는 그녀와 대화를 한다면 누구라도 대화에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심지어 복학생 형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선정되는 신입생 미모 랭킹에서도 3위를 차지할 정도로 예뻤고 웃는 얼굴은 말할 것도 없이 예뻤다. 그런 웃는 얼굴은 누구라도 볼 수 있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처음 만난 날 사람들에 치이던 내가 발을 헛디뎌 실수로 발을 밟았어도 웃었고 오리엔테이션 행사가 끝난 후 각자 방에서 열린 술자리에서 진상 선배로 소문난 형이 치근덕댈 때도 웃었고 술에 취해서도 웃었고 자는 모습마저도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으며 집에 갈 때도 아쉽다며 연신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수업 시간에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웃는 표정으로 수업을 들었고 함께 밥을 먹을 때, 공강시간에 시간을 때울 때, 도서관에서 과제를 할 때, 내가 약속에 늦거나 본인이 약속에 늦었을 때도 웃었고 학자금 대출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쉴 수 없을 때도 괜찮다며 웃었다. 그리고 내가 고백하던 그날, 그녀는 지금까지 보여준 웃음 중 가장 환한 웃음으로 내 고백에 보답해 주었다.


여전히 모두가 그녀의 웃음을 볼 수 있었다. 밝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날 보았던 그 미소는 둘이 있을 때만 볼 수 있었고 남자 동기들이 군대를 갈 때도 ROTC에 지원했던 나는 대학 4년을 온전히 그녀와 함께 보낼 수 있었다. 나는 네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는 동안 그녀와 함께 항상 봄날이었다.

임관 후 내가 갔던 부임지는 내 환상과는 많이 달랐다. 그동안 배웠던 건 말 그대로 기본 중의 기본이었고 어디의 누가 '인생 실전이다'라고 했었는데 정말 그랬다. 기본과 실전은 달랐다. 나는 이등병이나 다름없는 초급 간부 신세를 벗어나기 위해 밤낮으로 공부하고 연습했다. 늦은 퇴근과 이른 출근은 기본이었다. 무시당하는 것이 싫었던 나는 좀 더 치열한 소위 생활을 보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사들과 부대 간부들의 달라진 시선을 느꼈다.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은 것... 그래,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녀가 떠나갔다는 사실만 빼면 말이다.


지금 와서 그때를 돌아보면 내가 봐도 내가 참 어이가 없다. 치열한 건 치열한 거고 연락은 자주 할 수 있었으며 내가 짜증이 난 것은 일 때문이었지 여자친구 때문이 아니었다. 그걸 모르는 게 아니지만 생각과 행동은 자꾸 의견을 달리했다. 휴가를 나와서도 내 행동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다음 휴가 때 함께 여행을 가기로 했었는데 대대 전술훈련 평가 일정이 바뀌어서 우리가 여행을 가기로 한 바로 그다음 주 월요일부터 훈련이 시작되는 것으로 변경이 되었다. 짜증도 났지만 이걸 여자친구한테 어떻게 설명을 하고 설득을 해야 하나 걱정부터 앞섰다. 여자친구가 유난히 기대를 많이 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괜찮다며 웃고 있었지만 4년을 함께 한 나는 조금도 안 괜찮다는 걸 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어떻게든 그녀를 어르고 달랬더라면 우리는 이제껏 잘 지내왔던 것처럼 잘 풀었을 것이다. 또 그러면 죽는다며 웃는 얼굴로 명치를 향해 날리는 오른손 스트레이트를 나는 필사적으로 피하려다가 결국 맞았을 것이고 그렇게 투닥거리다가 그냥 그 자리에서 그냥 여행 일정을 변경했을 것이다. 그 후 맛있는 것도 함께 먹고 즐거운 시간을 보낸 후 아쉬움을 안고 나는 부대로 복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 했다.


"우리 여행 말인데, 못 갈 것 같아. 상급부대 지침이 내려왔는데 그것 때문에 부대들 훈련 일정이 전부 다 꼬였어. 그래서 여행 다녀오는 일요일 바로 다음날이 우리 훈련 시작일이 됐어. 이번 훈련은 대대 평가라서 주말에도 출근해서 훈련 준비 좀 해야 될 것 같아... 다른 간부들은 이미 다 휴가 변경했어. 나는 그래도 너한테 말하고서 바꾸는 게 맞는 것 같아서..."


"그랬구나. 그래 알았어... 근데 그 얘기를 왜 지금 해? 예전에 알았었던 거 아냐?"


욱할 말은 아니었는데 그때의 나는 그녀가 내게 따지는 듯이 묻는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사실은 그저 섭섭해서 괜한 투정 한 번 부려본 것뿐일 텐데.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내가 훈련 바꿨어? 내가 가기 싫어서 안 가는 거야?"


그렇게 시작해서 뭐라고 했는지 다 기억나지도 않는, 대충 위의 어조 같은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낸 후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보았다. 웃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은 처음 봤다. 마치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평소에 내 얼굴이 잘 비친다고 거울로 써야겠다며 놀려먹을 정도로 컸던 그녀의 두 눈이 이내 그렁그렁 해지더니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날은 4년을 함께 지내며 아무리 괴롭고 힘들어도 웃던 그녀가, 다퉜어도 미안하다며 항상 웃으며 다가와 주던 그녀가 처음으로 눈물을 보인 날이자 우리가 헤어진 날이기도 했다. 한참을 울던 그녀는 울먹거리며 내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떠났고 그 말을 들은 나는 차마 그녀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너는 내가 항상 웃고 있어서 그 모습이 너무 예뻐서 내가 좋다고 했지. 내가 항상 웃었던 건, 나를 보는 네가 항상 웃고 있었기 때문이야. 내가 어디에 있든 너는 나를 보고 웃고 있었고, 그 웃는 얼굴이 너무 좋아서 나는 항상 웃고 있었던 거야. 그런데 더 이상 나를 위해주고, 배려해주고, 웃어주던 예전의 너는 없어. 뭐가 너를 이렇게 만든지도 알고 네 탓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 그런데 나도 너무 힘들어. 아무리 내가 계속 웃고 있어도 너는 항상 매사에 짜증뿐이고 더는 나한테 웃어주지 않잖아. 나도 힘든 일 많아. 학자금 대출도 한참 갚아야 해서 아르바이트도 해야 되고 대학원 생활도 해야 되는데 나 너무 힘들어. 가끔은 실험실이 아니라 감옥에 있는 기분마저도 들 때가 있어. 그래도 널 보면서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하며 견뎠는데 내게 힘을 주던 너는 이젠 없어. 힘들어서 이렇게 곁에 계속 있다간 내가 어떻게 될 것 같아. 이제 더는 기대하고 상처받는 게 싫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고 싶어. 당장은 더 힘들겠지만 서로를 위해서 이게 더 나은 것 같아. 그러니까... 갈게."


울먹이며, 하지만 또렷하게 말한 그녀는 그대로 카페를 나서 떠나갔다. 나는 바보같이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혼자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때 따라 나갔으면 뭐가 달라졌을까? 싹싹 빌었다면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하고 용서를 구했다면 그 웃는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을까? 그렇게 내 곁을 떠나간 그녀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그녀의 웃는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었다.




'지금 알고 있던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 킴벌리 커버거(Kimberly Kirberger) -


근데 그걸 어떻게 알 건데? 도무지 알 도리가 없으니 나온 말이 아닐까. '있을 때 잘 해'라는 말도 어쩌면 위 말과 같은 맥락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 저런 메아리뿐인 넋두리를 하며 한탄하기보다는 더 늦어 돌이킬 수 없기 전에 소중한 사람들에게 '잘'해보는 게 어떨까 싶다. 이런 슬픈 노래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다면.




https://youtu.be/7OJUMiJSdy4


[김광석 - 그녀가 처음 울던 날]


그녀의 웃는 모습은 활짝 핀 목련꽃 같애

그녀만 바라보면 언제나 따뜻한 봄날이었지

그녀가 처음 울던 날. 난 너무 깜짝 놀랐네

그녀의 고운 얼굴 가득히 눈물로 얼룩이 졌네


아무리 괴로워도 웃던 그녀가 처음으로 눈물 흘리던 날

온 세상 한꺼번에 무너지는 듯

내 가슴 답답했는데


이젠 더 볼 수가 없네

그녀의 웃는 모습을

그녀가 처음으로 울던 날

내 곁을 떠나갔다네


아무리 괴로워도 웃던 그녀가

처음으로 눈물 흘리던 날. 온 세상 한꺼번에

무너지는 듯 내 가슴 답답했는데


이젠 더 볼 수가 없네.

그녀의 웃는 모습을

그녀가 처음으로 울던 날. 내 곁을 떠나갔다네

그녀가 처음으로 울던 날. 내 곁을 떠나갔다네

故 김광석 '김광석 다시 부르기 Ⅱ'(1995.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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