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눈빛에 나 너무 떨려서 고갤 숙이니 어색한 새 구두..."
내 고등학교 생활의 시작은 평범하지는 않았다. 자세한 건 여기서 그렇게 중요하지 않고, 그냥 어른들의 사정 탓에 나는 3월 중순에 처음 배정받았던 고등학교에서 같은 지역에 있는 내 모교로 전학을 오게 되었다. 어른들의 사정이라고 하면 이상한 생각 나쁜 생각할까봐 노파심에 말해두는데 우리 부모님 두 분 다 살아계시고 이혼은커녕 과하게 화목하시다.
전학 간 학교가 마음에 들었느냐고 묻는다면 처음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일단 집에서 멀기는 기존 학교나 지금 학교나 매한가지였고 심지어 학교는 산에 있었다. 전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언덕 경사를 가졌다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들려오는 그 학교에 내가 들어가게 되었다고 하자 가장 많이 들은 말은 '거기 겨울에는 로프 잡고 등교한다더라.'는 우스갯소리였다. 교복이 예뻤고 공기가 좋았으며 옥상이 개방되어 있어 탁 트인 뷰를 가진 점, 식당과 매점이 좋다는 점은 나에게는 그렇게 위안이 되지 않았다. 배정된 반에 들어가 반 아이들과 첫인사를 하고 그녀를 보기 전까지는.
그녀는 키가 작아서 맨 앞자리에 앉아 있었고 교탁 앞에서 아이들에게 자기소개를 하게 된 나는 자연스레 그녀와 가장 먼저 눈을 마주치게 되었다. 사람이 첫눈에 반한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예쁘기도 예뻤지만 생글생글 웃는 그 모습이 좋았던 것 같다. 말할 때마다 귀엽게 오물거리는 작은 입술도 좋았고 단발머리 옆으로 살짝 삐져나온 귀를 본 나는 게임 속에서 본 엘프를 떠올렸다. 머지 않아 반 아이들과 친해지고, 이런저런 고민이나 비밀 이야기를 나누는 친구들도 생기게 되면서 그렇게 연애 지원군들이 생겼다. 물론 마냥 든든하지는 못 했다. 나랑 그 친구들이랑 왜 친해졌겠는가?
쑥스럽게도 나는 그날까지 단 한 번도 연애를 해 보지 못 했다. 관심이 가는 여자아이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사귀면 그다음엔 뭘 하는데?'라는 질문에 스스로 막힌 나는 이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대신 지금도 정말 좋아하는 축구를 점심시간, 체육시간, 방과 후 친구들과 밥 먹듯이 하곤 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그렇게들 각종 우연들이 종합선물세트로 겹쳐서 결국 둘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결과부터 이야기하면 나는 고등학교 1학년부터 2학년을 마칠 때까지 총 2번의 고백을 하고 2번 다 차였다. 아마 처음에는 뜬금없었을 것이고 두 번째는 연애 지원군들의 간접적 지원사격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러게 이놈들이 그냥 가만히 있으라니까, 쫌.
고백의 장소가 학교 교실이었던 것, 그리고 키만 컸지 별로 내세울 게 없는 나 같은 남자가 고백해왔다는 것도 사춘기 소녀에게는 나름 창피한 일이었으리라.
2전 2패의 초라한 성적표를 든 나는 이렇게 된 이상 성공해서 다시 데리러 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공부를 시작했다. 내 자랑 같아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그래도 내가 공부는 좀 했었다. 성적은 가파르게 뛰어올라 학교에서 운영하는 심화반에도 들어가게 되었고 반에서 1~2등 하는 친구들과 자웅을 겨루곤 했다. 그 당시 성공의 기준이 뭘까 생각해 본 결과 돈이었고 그럼 돈을 잘 버는 건 뭘까? 의사? 그래 의사가 되자 의예과를 가자 라는 너무 단순하고 어린 사고방식이었다.
단순하면 용감하다고 했나. 성적은 계속 올랐고 고3 6월 모의고사 성적도 최상위였다. 주변에서 좋겠다 이대로만 가라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도 사실 안 들렸고 알 바도 아니었다. '성공해서 연락한다.'라는 단순 명료한 목표 아래 나는 복습했고 예습했다. 그 좋아하던 축구도 체육시간에만 하는 걸로 스스로와 합의를 봤다. 다 아는 문제였지만 조금의 실수도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같은 유형을 공부했었다. 그렇게 속세에서 거의 벗어난 마음가짐으로 학교 학원 집을 반복하던 어느 날 내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잘 지내?ㅋ오랜만이다'
2006년 9월 24일 일요일 오후 3시 57분. 학원 보충을 마치고 독서실로 향하던 버스 안에서 그녀에게 받은 문자를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지금의 나라면 '잘 지내는지 뻔히 알면서, 학교에서 오며 가며 봤으면서 왜 물어?'라고 삐딱하게 생각했겠지만 때묻지 않았던 그때의 나는 쿵쾅대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하고 내려야 할 정류장도 지나쳐버린 채 조용히 집으로 와서는 방문을 잠그고 침대에서 한참을 방방 굴러다녔다.
좋아서.
'난 그냥 똑같지 뭐. 학교 학원 집이야ㅠㅠ넌 잘 지냈어?'
보내놓고 나도 참 거짓말을 잘 하는구나 하면서 모태솔로인데 이 정도면 밀당 좀 하는 거 아닌가? 하고 혼자 뿌듯했었다. 사실 누구보다 그녀가 잘 지내는지 아는 사람은 나였으니까. 두 번 씩이나 차인 내가 불쌍했는지 그녀의 친구들이 지원군으로 합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녀가 점심 먹고 쉬고 있는 위치, 매점을 가는 시기, 자율학습을 하는지 안 하는지의 여부 등을 따로 말 안 해도 실시간으로 제보해 주었다. 딱히 별다른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수험 생활에 지쳤던 사춘기 소녀들의 작은 놀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 '미연시'를 빗대어 찌질이 연애 시뮬레이션, 줄여서 찌연시 정도가 될 것 같다.
아무튼 그녀들은 그렇게 마주친 우리들에게서 특별한 에피소드 같은 것이 일어나길 기대했겠지만 나는 그저 먼 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하기, 핸드폰을 보거나 친구들과 얘기하는 척하며 못 본 척 지나가기 등의 답답한 행태를 보이며 그들에게 찌질미의 정수를 선보였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날 도와주었던 그들에게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다시 한 번 감사의 뜻을 전한다.
그녀들의 노력과 반비례한 나의 답답한 행동에 분통터진 운명이 옛다 하고 만들어준 기적이었을까. 어쨌든 그렇게 두 번째 고백 후 거의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연락이 닿았고 첫 데이트 약속을 잡은 날 나는 친구들 한 명 한 명에게 전화해서 수상소감 같은 데이트 성사 소식을 알렸다.
"야!!!나!!!한다!!!데이트!!!"
약속을 잡았다고 끝이 아니었다. 일단 문자는 주고받았지만 그다음은? 그저 막막하기만 했다. 10년 후의 내가 보면 답답해서 죽으려고 하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따로 학교 밖에서, 그것도 여자와 단둘이 만나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한 가지, 평소에 입고 다니는 옷 그대로 입고 나가면 절대 안 되겠다는 사실 하나는 직감으로 알았다.
이번에도 역시 지원군들이 도와줬다. 데이트 전날, 입학 후 처음으로 자율학습 땡땡이를 치고 친구들과 지하상가로 갔다. 새 신발, 새 옷을 사고 너무 새것 같으면 티 난다고 지하상가 화장실에서 옷도 다 갈아입었다. 한 친구는 집에 있는 가방도 가지고 나와 빌려줬다. 어딜 가라 뭘 해라 이때쯤 무슨 말을 해라 이때쯤 살짝 보고 손을 잡아라 말아라 하는 참모들의 조언을 얼마나 들었을까. 마침내 그녀가 약속 장소에 나타났다.
교복이나 체육복이 아닌 다른 옷을 입은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짦은 치마에 굽 높은 구두를 신어도 여전히 저 아래에 있는 그녀는 예쁜데 귀엽기까지 했다. 가슴은 또 바보같이 쿵쾅거렸지만 의외로 말은 술술 나왔다. 우리가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함께 갔던 곳, 함께 걸은 길, 함께 본 영화는 아직도 볼 때마다 그때 생각이 나곤 한다.
그 이후 우리는 많이 가까워졌다. 서로의 고민과 꿈을 나누었고 나는 의예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고 싶었던 대학교에 수시 합격을 했다. 빼빼로 데이에는 세 번째 고백을 감행했으며 수능날 대답해 주겠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번엔 느낌이 너무 좋았다. 연락은 계속 했었고 학교에서 마주쳐도 더 반갑게 인사를 했으며 그녀 옆에서 함께 인사하던 두 친구들은 네가 이제야 사람 구실을 하는구나 하는 표정으로 뿌듯해했다. 수능 이틀 전에는 공부를 가르쳐 달라고 해서 그녀의 집에도 가서 함께 공부도 했다. 진짜 공부만 했다. 그러다 집에 오신 아버님과도 함께 밥을 먹었다. 내숭도 못 떨고 두 공기 씩이나 먹었다. 뿌듯하게 바라보시던 아버님의 표정을 아직도 기억한다. 덕분에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이불을 찬다.
수능날 아침 그녀가 시험 보는 곳에 함께 갔다. 아침부터 날씨가 제법 쌀쌀해서 차가운 손을 서로 꼭 잡고는 한동안 서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도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저녁에 보자며 손을 꽉 한번 잡아주고 이내 시험장으로 들어갔다. 그 손의 온기를 놓치지 않고 꼭 잡고 있으려니 어느새 저녁이 되었고 친구들과 있다가 집에 들어가려고 한다는 그녀의 연락을 받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그동안 너무 고생 많았어. 춥지?"
"응. 그래도 따뜻한 데 있다가 방금 나와서 괜찮아."
이런 특별할 것 없는 대화를 나누며 그녀의 집이 있는 학교 근처로 향했다. 매일 지나다니던 가게들, 언덕을 따라 있는 버스 정류장들, 자주 가던 토스트집 등등 우리에게 익숙한 거리였지만 그날의 대답을 듣고 싶었던 내 가슴은 또 쿵쾅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적당한 타이밍과 멘트를 찾지 못했고 그렇게 그녀의 집 앞까지 도착했다.
"다 왔네?"
"응. 어제 이맘땐 되게 떨렸는데 지금은 후련해."
"그래? 나는 아직도 떨리는데..."
"왜?"
"아니 그게..."
"왜??"
"그......"
"왜???"
"그...대답 있잖아..."
가로등이 늘어선 조용한 골목길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내 옆에 나란히 섰고 우리는 벽에 기대 조용히 하늘만 바라보았다.
"처음엔 싫었어."
"?"
"그냥...우리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었고 좀 부담스러웠어. 너 친구들도 날 보면 뭔가 아는 듯한 눈빛으로 자기들끼리 웃는 것도 싫었고."
"......"
"그런데 신기했어. 3년 내내 같은 마음일 수 있다는 게. 나도 잘 기억 안 나는 내 이야기를 대화 중간중간에 말해주는 걸 보고 알았어. 아, 얘는 진짜구나."
"응..."
그리고 그녀는 떨고 있는 내 손을 조그마한 두 손으로 꼭 잡아주며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1일이야."
누구에게나 첫 느낌이란 건 각별하다. 특히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그 사람과 관련해 일어난 일들 하나 하나가 평생 잊지 못 할 일생 일대의 대 사건이다. 그것이 비록 '야 대박!! 걔 나랑 똑같이 생긴 체크카드 쓰더라!'하는 시답잖게 신기한 것이라도 말이다.
허둥대던 날 기억하나요
바보 같은 질문만 던지던
그대 눈빛에 나 너무 떨려서
고갤 숙이니 어색한 새 구두
어제 찾은 지갑 속에 돈이
모자랄까 괜히 걱정했던
몇 해 전 그 밤 삼청동 거리에
그대와 나 그리고 하늘의 눈꽃
하얀 입김과 겹두른 목도리에
조심스레 넘어질까 내게 기대어 걷던
그대 모습 그 옆엔 처음 보는
행복한 미소로 가득한 내 얼굴
예쁜 불빛 포근했던 공기
그 카페를 난 기억합니다
몇 해 전 그 밤 삼청동 거리에
그대와 나 그리고 하늘의 눈꽃
어릴 적 꿈과 그대 친구들 얘기
하나라도 놓칠까 봐 그대만 바라보던 내 눈동자
그 속에 영원토록 새겨진
그대의 얼굴 그대 이름
오랜 가게 언덕 위 정류장
그댈 처음 바래다주던 길
돌아오는 버스에 앉아서
손을 펴고 맘에 담습니다
그대 글씨와 그리고 그대의 향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