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그렇게 살고 있지만..."
졸업 후 그렇게 끝나고 그녀를 다시는 못 볼 줄 알았다. 학교 학원 집을 반복하며 무채색 같은 삶을 살고 있던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우연히 같은 꿈을 가지고 있는 그녀를 알게 되었다. 마치 자석처럼 우리는 서로에게 끌렸고 함께하는 미래를 꿈꿨다. 어떤 때는 뜨거운 빨강, 어떤 때는 부드러운 노랑, 어떤 때는 귀여운 핑크. 함께 하는 동안 다채로운 색으로 빛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눈부시고 좋았다. 그러나 내가 대학 진학에 실패하면서 처음에는 몸이, 나중에는 마음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작은 말다툼을 끝으로 우리는 헤어졌고 당시의 나는 가슴 한구석이 뻥 뚫려 휑해진 기분이었다.
집에서는 그러게 왜 잘 하던 공부 그만두고 갑자기 입시미술 같은 걸 했냐며 다시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갈 것을 권유했고 헤어져서 실의에 빠져 있던 나는 그렇게 열일곱 그때 그녀와 함께 꿨던 꿈을 자포자기 식으로 접었다. 그리고 재수 끝에 졸업장이 대기업 서류전형 하이패스와도 같다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아는 대학에 입학했다.
오티, 신입생 환영회, 엠티, 축제, 체육대회, 중간고사, 농활, 기말고사, 군대, 개인과제, 팀 과제, 장학금, 동아리, 아르바이트, 예비군, 휴학, 국내여행, 해외여행, 복학, 졸업논문, 토익, 오픽, 스터디 모임, 몇 번의 연애, 이별, 캠퍼스 리쿠르팅, 면접 등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나를 스치고 지나갔고 나는 결혼정보 회사에서 그렇게 좋아하고 취업카페에서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는 공기업에 덜컥 입사했다. 그리고 시간이 좀 더 흘러 처음 나갔던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나는 그녀를 9년 만에 다시 만났다.
낮에는 본인 그림을 그리거나 외주 받은 작업을 하고 밤에는 입시 미술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고 했다. 그림에만 재능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었는지 그녀가 사는 지역 일대에서는 유명한 학원 선생님이라고 했다. 술집 한편에서 친구들과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는 처음 그때보다는 성숙해졌지만 화사한 느낌만은 여전했다. 그때도 지금도 존재 자체만으로 주변을 빛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처음 그녀 눈에도 당시의 내가 그렇게 보였을까? 잘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지금 내 모습은 많이 바뀌어 있다는 점이다. 색깔로 치면 그녀는 화사한 로즈 쿼츠, 나는 칙칙한 딥 그레이 정도겠지.
그렇게 잠시 물끄러미 생각에 잠겨 있는 나를 그녀가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고 얼른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이내 그녀에게 붙잡혔다.
"뭐야~왔으면 인사를 해야지 귀신 본 것처럼 그렇게 서있기만 하면 어떡해?"
"아... 그냥 애들이 너무 많아서 잠시 벙 쪘었어."
"싱겁기는... 잘 지냈어?"
그렇게 다투고 헤어졌는데도 그녀는 퍽 살가웠다. 9년이라는 시간이 우리를 그렇게 만든 거겠지. 그 밝은 에너지에 나도 모르게 영향을 받았는지 나는 어느새 그녀와 자연스럽게 근황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래서 넌 요즘은 뭐 하는데?"
"나? 난 그냥 회사 다녀."
"그래? 어쩐지 조금 찌들어 보이긴 하더라."
"..."
"왜 그래~농담이야 농담! 그래서 어디 다니는데?"
"나 지금 공항공사에 있어. 그 인천에..."
"헐~야 거기 완전 신의 직장 아냐? 연봉도 짱짱하고? 능력자 다 됐네~"
그러면서 그녀는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예전에 함께 이야기하던 일과 비슷한 일을 하고 있어서 나는 그녀가 행복할 거라고만 생각했지만 여자 혼자 살면서 박봉으로 일한다는 건 마냥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 일하는 거? 좋기야 좋지. 근데 요즘 들어서 드는 생각인데...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진 모르겠지만 이런
건 아니었던 것 같아. 내 꿈 말이야. 내가 다른 애들한테 이런 얘기하면 뭐라고 하는지 알아? 나이 먹어서 꿈은 무슨 꿈이냐며, 지금이라도 입에 풀칠 제대로 할 다른 일을 찾거나 그냥 좋은 남자 만나서 빨리 시집이나 가랜다."
그러면서 그녀는 화장실 쪽 테이블을 잠시 찌릿하고 쳐다봤다. 그 망언의 원흉이 아마도 저기 어딘가에 있을 것이었다.
"그게 됐으면 내가 벌써 했지. 내가 저 답 없는 것들한테 말하는 게 아니었는데. 그래도... 넌 쟤들하고는 다르잖아? 그때 기억나? 체육시간."
"응. 네가 아픈척하고 내가 부축하는 척 한 다음에 옥상 가서 한참 동안 얘기하다가 잠들었잖아. 점심시간도 지났겠다 배부르고 등 따시고 잠이 솔솔 왔지."
"그러다 담임이 직접 우리 찾아가지고 신성한 학교에서 연애질이라고 엄청 혼냈잖아."
"그러니 시집을 못 갔지 아직도."
"아직도 못 가셨대? 어쩜 좋아... 예전엔 그냥 싫었는데 담임 처지가 남 일 같지가 않네. 야 잠깐, 너 방금 그거 나한테 한 말 아니지?"
그녀에게 가볍게 멱살을 잡혀 흔들리면서 생각했다. 낭만과 현실은 다르다고 누군가 그랬다. 그녀와 나는 같은 꿈을 가지고 있었지만 나는 꿈을 접고 현실에 복종했고 그녀는 꿈이라는 무기로 몇 년 째 현실과 싸우고 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모두는 결과적으로 아직 우리가 꿈꾸던 사람이 되지는 못 했다. 그리고 저런 과거의 별 것 아닌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나는 내가 여전히 헤어진 그 시간 속에 멈춰 서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아 묻어 두었던 감정이 다시 꿈틀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아마 내가 그녀에게 다시 고백하는 일은 지금 이 순간에도,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물론 우리 둘 다 만나고 있는 사람이 없고 애초에 우리가 헤어진 게 서로가 정말 싫거나 미워서 헤어진 게 아니긴 하지만 그게 우리가 다시 만나야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아직 그녀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가장 컬러풀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이상과 너무나도 다른 현실을 많이 겪었다. 서로의 근황을 나누면서 화사한 그녀의 가면 뒤에 있는 어두운 모습을 잠깐 본 것만 같았고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웠다. 꿈의 그림자 뒤에 숨어있는 현실을 그동안 많이 봐 왔는데 그녀도 그 에피소드들의 주인공 중 하나가 되는 것이 두려웠다.
어쩌면 그녀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어서 나 혼자 김칫국을 오모가리찌개 수준으로 맛있게 끓인 걸지도 모르겠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젊은 날의 빛나는 모습 그대로 내 기억 속에 남아줬으면 한다. 동창회가 끝나고 서로의 번호를 교환했지만 아마 내가 그녀에게 연락을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늦은 시간에 집에 도착해서 잘 준비를 마치고 나니 그녀에게서 온 잘 들어갔냐는 문자가 눈에 보였다. 졸린 얼굴로 잠시 미소 지은 나는 휴대폰을 그대로 내려놓고는 돌아누워 잠들었다.
옥상에서 함께 이야기하던 그날의 꿈을 꿨다.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우리였지만 희망에 가득 차 있는 우리의 표정은 열일곱 그때 그날의 표정이었다. 말미에 그녀는 내 무릎에 머리를 대고 드러누우며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눈을 감으면 말야, 언제라도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 하고 싶은 게 참 많았고 많이 웃기도 했던 함께 했던 그때로 말야. 그냥 어린 시절이라 아련한 마음이 들어서 그리운 것도 있겠지만 진짜 이유는 아마도... 너랑 함께 했던 날들이 너무 빛나고 아름다워서였을 꺼야. 그때 꿈을 이야기하는 너는 다양한 색으로 가득 차서 빛나 보였거든."
'꿈'이라고 검색해 보면 '[명사] 1. 잠자는 동안에 깨어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사물을 보고 듣는 정신 현상.'이라고 나온다. 이런 걸 찾으려고 했던 게 아닌데...'희망'정도를 찾아야 그나마 원래 생각했던 '꿈'의 정의와 비슷한 정의가 '희망'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난다. 생각하던 '꿈'이라는 게 어떠어떠하게 살고 싶다, 어떠어떠한 모습이 되고 싶다는 거니까 결국 희망과 같은 말이구나 싶다. 그리고 그 희망... 꿈이 실제로 이루어지는지 이루어지지 못하는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삶이 충만해지는 게 꿈 아니던가.
언젠가 너를 다시 만나면 털어놓을 수 있을까. 나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지만 꿈을 버리지는 않았다고. 늦은 밤 홀로 걷는 퇴근길에서 가끔씩 이루지 못한 꿈과 함께 네 생각이 났었다고. 함께 꿨던 꿈들에 대한 기억 덕분에 웃었던 날들이 많았다고. 무채색 같은 내 삶이 그 순간만큼은 화사해졌다고. 그러니 많이 감사하다고.
언젠가 스치듯 내뱉은 너의 말을 기억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진 모르겠지만 이런 건 아니었던 것 같아"
하고 싶은 게 참 많았고 많이 웃기도 했던
열일곱 그때, 그 찬란했던 날들은
다시는 오지 않을 날들이었나
미러볼처럼 반짝였지 영원히 빛날 것만 같았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그렇게 살고 있지만
여전히 지난 시간 속에 멈춰 서있고
컬러풀했던 표정들과 웃는 모습은 어느새
무채색으로 변해버린 얼굴을 하고서
어딜 보는지
언젠가 스치듯 내뱉은 너의 말을 기억해
"서울의 낮은 하늘처럼 흐릿해진 채도는 다시 돌이킬 수 없겠지"
다채로운 색으로 빛난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그렇게 살고 있지만
여전히 지난 시간 속에 멈춰 서있고
컬러풀했던 표정들과 웃는 모습은 어느새
무채색으로 변해버린 얼굴을 하고서
어딜 보는지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 그렇게 살고 있지만
여전히 지난 시간 속에 멈춰 서있고
컬러풀했던 표정들과 웃는 모습은 어느새
무채색으로 변해버린 얼굴을 하고서
어딜 보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