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태어난다면 나의 마음 속이지 않고..."
이렇게 말하면 아무도 안 믿지만 나는 겁이 많은 편이다. 덩치는 어딜 가든 세 손가락 안에는 들고 철없던 시절 걸어왔던 싸움에서도 져 본 적이 없다. 군 생활 시절 이등병 때 내 별명은 세스코였다. 팅커벨이라고 불리는 큰 나방이나 다리 여럿 달린 각종 벌레들이 나타나면 선임들은 나를 찾았고 나는 그들의 기대를 한 번도 저버린 적 없이 위험요소 제거에 앞장섰다.
이런 나지만 무서운 이야기나 귀신의 존재는 정말 싫다. 실체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겠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공포영화는 물론 '이야기 속으로'나 '토요 미스테리 극장'같은 프로그램이 TV에서 할 때는 거실 근처에도 안 갔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처음 만난 그녀는 키가 나와 머리 두 개 차이 정도는 났다. 이마에 딱밤 한대 정타로 날리면 그 작고 가녀린 몸이 지면에서 붕 뜰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내 맞은편에 앉아있던 그녀는 그런 나를 볼 때마다 재빨리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곤 했다. 술이 조금 들어간 그녀가 무서운 이야기를 한창 하다가 경직되어 있는 나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혹시 오빠 무서운 이야기 싫어하세요?"
"응? 아니 난 뭐..."
"에이~무서워 하시는거 맞는데 지금?"
처음하고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 저 눈빛이 뭔지 아주 잘 안다. 먹이를 본 사냥감의 눈빛이다. 비슷한 눈빛을 보고 싶다면 토요일 오후 1시 10분, 일요일 오후 05시 40분 KBS 1TV 동물의 왕국을 참조하면 된다.
"야 윤정아 걔는 강도도 때려잡는 애야. 너 그렇게 기어오르다가 죽어."
그날은 어떻게 그렇게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친구의 저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은 그녀는 몇 번의 술자리를 함께 더 가지며 그 눈빛으로 계속 나를 바라보았다. 사람 인연이 참 알 수 없는 게 그것이 인연이 되어 결국 우리는 사귀게 되었다. 외모와는 반대로 그녀는 나를 꽉 잡고 살았고 친구들은 우리의 만남을 신기해하면서도 축복해 주었다.
그녀는 스릴러, 공포영화에 관해서는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심지어 즐겨 보기까지 했다. 한사코 괜찮다고 거절하는 나에게 무서운 이야기뿐만 아니라 진짜인지 아닌지 잘 모를 여러 가지 이야기도 함께 해 주었다. 그 이야기는 무섭다기보다는 진위를 떠나 재미있었으므로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퍽 좋아했다. 덕분에 각종 미스터리 관련 지식 및 도시전설에 관한 이야기도 많이 알게 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그럴싸했던 이야기는 인류 멸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종말론이었다.
사실 종말론이란 건 믿을 게 못 된다. 종교에는 교리적 장치로 말세가 포함되어 있으며 고대 로마 시대부터 얼마 전 공포의 대왕이 어쩌고 하던 1999년 노스트라다무스 예언, 'Y2K'로 알려져 있는 밀레니엄 관련 이야기까지 이런 얘기를 하면 끝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굉장히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잘 했고 처음에는 믿지 않던 나조차도 그녀가 주장하는, 다가오는 2012년 12월 21일에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했다.
"오빠는 만약 그날 그렇게 끝나면 어떻게 할 거야?"
"끝나긴 뭘 끝나. 그거 다 거짓말이라니까?"
"아냐 진짜야. 마야 달력에도 보면..."
"됐어 됐어. 안 믿어.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
"와 오빠 진짜 너무한다. 더는 나를 못 본다니까? 아무렇지도 않아?"
"그럴 일이 없어서 그런 생각도 안 해봤고 그런 생각하기도 싫네요. 삼겹살에 소주 한 잔 똑딱?"
"...주(酒)인님의 뜻대로!"
그래. 그때는 그랬다. 그녀와의 오싹하지만 평온하고 유쾌한 나날들이 계속될 줄 알았다. 뉴스나 인터넷에 나오는 흉흉하고 충격적인 이야기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 대체 어디서 그런 이야기들을 잘도 알아 오는지 지금도 모를 노릇이다. - 그렇게 유쾌하진 않은 이야기들은 다 남들 일인 줄만 알았다.
어느 날 그녀가 죽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이없고 허무한 죽음이었다.
사인은 음주운전 교통사고였고 그녀는 시속 90km/h로 인도로 돌진해 오는 SUV 차량을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차에 들이받혔다. 그녀의 동생을 통해 소식을 접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녀가 언젠가 했던 말이었다.
'더는 나를 못 본다니까? 아무렇지도 않아?'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무슨 정신으로 장례식장까지 가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그녀의 동생과 함께 자리를 지키고, 발인을 하고 입관까지 지켜봤는지 모르겠다. 3일장이 다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 귀신도 소도 다 때려잡게 생긴 총각이 너무 많이 운다고 그녀의 할머니에게 오히려 위로를 받기도 했다.
연 초에 일어난 그 끔찍한 사고 후,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살던 나는 그녀가 이야기하던 2012년 12월 21일을 맞이했다. 전국 곳곳에는 비나 눈이 내리고 있었고 TV에서는 18대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 일색이었으며 종말론과 관련해서는 마야 치첸이트사 등 마야 유적지에 이른바 '종말 관광'이 호사를 누리고 있다는 뉴스도 있었고, 호주 상공에 헬게이트가 열렸다는 소동이 있긴 했지만 사진이 잘못 찍힌 해프닝으로 끝났다. 관련 뉴스도 많지 않았고 사람들은 종말론보다는 곧 찾아올 크리스마스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래. 그녀가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며 기어코 날 설득시키려 하던 종말은 찾아오지 않았고, 우리는 2012년을 지나 어제도 오늘도 계속 살아가고 있지만 그 해 나와 그녀와의 관계는 종말을 고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 그녀가 내게 그런 걸 물으며 기대했던 것은 툴툴거리며 그런 일 없을 거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런 건 생각도 하기 싫다며, 사랑한다고 말하며 안아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문득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빠르려 해도 늦는 것이 몇 개 있다. 퇴근길, 승진, 그리고 후회. 그중 가장 공감하는 것은 아무래도 후회가 아닐까 싶다. '후회 없이 최선을 다했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마음 한편에는 일말의 후회가 남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같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뒤를 돌아보는 것, 그를 바탕으로 다가올 미래에는 지금보다 후회를 더 줄이고자 다짐하는 것, 그리하여 결국에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이 따라잡을 수 없는 후회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일 것이다.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끝나버릴 수 있나요
좋았던 그때가 다시 돌아올 수는 있나요
너무 살고 싶고 너와 웃고 싶어
곁에 있을 거라 말해줄 거야
새로운 세상에서 나는 너와
사랑하겠어 나의 마음 다해서
안아주겠어 너를 잃지 않도록
다시 태어난다면 나의 마음 속이지 않고
언제까지나 너만 바라보겠어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끝나버릴 수 있나요
좋았던 그때가 다시 돌아올 수는 있나요
너무 살고 싶고 너와 웃고 싶어
곁에 있을 거라 말해줄 거야
새로운 세상에서 나는 너와
사랑하겠어 나의 마음 다해서
안아주겠어 너를 잃지 않도록
다시 태어난다면 나의 마음 속이지 않고
언제까지나 너만 바라보겠어
사랑하겠어 나의 마음 다해서
안아주겠어 너를 잃지 않도록
다시 태어난다면 나의 마음 속이지 않고
언제까지나 너만 바라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