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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내가 일어설 수 있게 해준.."

by 돌아보면

우린 꽤 오랫동안 친구들과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나름 유명한 커플이었다. 꾸미는 걸 좋아하고 또 그런 게 잘 어울렸던, 누가 봐도 예뻤던 그녀와는 다르게 나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인상에 - 물론 남자들이 항상 그렇듯 나도 화장실 거울을 볼 때면 이 정도면 괜찮지 않나 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지금도 말이다. - 옷이나 신발 등 패션에는 영 관심이 없었다. 그런 우리를 두고서 갖가지 말들이 많았다. 정리해보면 아래와 같다.


1. 남자 쪽 집에 돈이 많다. 둘이 스폰 관계다. 매월 돈을 주고받는 사이다.

-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 집이 좀 산다. 그런데 그녀는 그런 우리 집보다 훨씬 잘 산다. 아니 애초에 이게 할 말이야?


2. 여자가 남자에게 공개됐을 경우 사회에서 매장을 당할 만큼 치명적인 약점을 잡혔다.

- 매장을 당하긴 했지. 서로의 가슴속에.


3. 남자의 정력 및 밤 기술이 놀라울 만큼 절륜하다.

- 이것도 그래 미성년자한테 할 말이냐고 이게.

그나저나 꺼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렇게 드러나는구나.


친구처럼 지내오던 우리가 연애를 시작한 때가 고등학교 1학년 때다. 아마 눈치 없는 내가 연애라는 것에 눈을 조금 더 늦게 떴다면 더 늦게 시작했을 것이다. 당사자인 우리는 별 소릴 다 듣는다며 웃어넘겼지만 그녀의 오빠는 어린애들한테 도무지 못 하는 소리가 없다고 최초 유포자를 찾아 식식거리며 돌아다니곤 했었다. 당연하지만 1~3번 그리고 그 외 자잘한 수많은 루머들은 우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아, 3번은 사실이므로 루머에서 제외하도록 하겠다.


우리는 국민학교 1학년 때 전학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길을 잃고 울고 있던 그녀를 내가 집으로 데려다준 일을 계기로 온 가족이 친해져서 자주 교류했다. 상상 속에서 이야기를 지어내 말하거나 글을 쓰는 것을 좋아했던 나를 그녀는 그때부터 어른이 되어서까지 좋아해 주었다. 내 글의 1호 구독자이자 팬이었고 내 인생의 첫 여자였다.


으레 동갑이라면 여자 쪽이 남자 쪽보다 정신 연령이 높다고 하고 그 점은 우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연애에 있어서도 뭔가 여유 있어 보였던 그녀에 비해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나는 그녀에게 이유 모를 마음의 짐 같은 것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은 연애 중간중간 짜증이라는 이름으로 표출되었다.


그런 나를 그녀는 변함없이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었다.


영화 '부당거래'의 류승범 대사 중 호의가 계속되면 권리인 줄 안다는 말이 있다. 내가 딱 그랬다. 내 인생 첫 여자는 나의 모든 것을 이해해주고 나의 모든 것을 응원해주는, 나의 모든 것을 사랑해주는 여자였다.


사춘기를 거쳐 어른이 되면서 친구들의 연애 고민 이야기도 많이 듣긴 했지만 솔직히 공감은 되지 못 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속으로 '우린 안 그러는데?' 라며 다른 여자들에 비해 그녀가 주었던 헌신과 사랑을 당연시했다.


물론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워서 나도 그녀가 스치듯 말했었던 좋아하는 것들을 기억해 뒀다가 깜짝 선물을 주기도 하고 무심코 써 준 생일날 손편지에 크게 감동하는 모습을 보고는 기념일마다 편지지 가득 빼곡히 편지를 써서 선물과 함께 주기도 했다.


평소엔 툴툴대기만 하면서 편지는 왜 그렇게 달달하게 쓰냐며, 나중에 노래 가사 한번 써보라고도 이야기를 들었었다. 내가 작곡을 하면 노래에 일가견이 있는 자기가 불러 주겠단다. 그런 우리였다. 내가 뭘 해도 그녀라면 나를 이해해 주고 내 편이 되어줄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로 그랬다.


그렇게 17살의 우리는 10년이 흘러 27살이 되었고 흘러가는 세월이 무색할 만큼 그녀는 예전의 모습 그대로 아름다웠고 나는 그래도 예전보다는 사람답게 꾸미고 사람답게 옷을 입을 줄 알게 되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기념일 날 그녀에게 옷을 유난히 자주 선물 받았던 건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10년 전과 다른 게 있었다면 그때는 둘 다 학생이었지만 27살의 우리는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한 쪽은 작가 지망생이라고 쓰고 백수라고 읽는 흔한 반도의 대졸 한량이 되었고, 다른 한 쪽은 육군 소장인 아버님과 대위인 오빠의 뒤를 이어 간호장교로써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입는 옷과 생활 공간이 달라졌지만 우리의 관계는 끊기지 않았다. 마치 사인곡선처럼 위기가 생겨 밑바닥으로 치닫더라도 이내 다시 회복해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날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거의 1년간 준비해오던 시나리오 공모전이 있었다. 마감이 임박했을 때쯤 몇 번이고 확인하고 수정한 시나리오를 제출했고 중간중간 도와주던 그녀도 진심으로 응원한다며 몇 번이고 나에게 힘을 주곤 했었다.


시나리오 공모전 결과 발표일이 되었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고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그냥 내가 실력이 모자랐던 거고 내가 운이 없었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모든 짜증의 화살을 곁에 있던 그녀에게 쏘아 보냈고 급기야 오는 전화와 문자, 온라인 메신저 모두 연락을 끊어 버렸다. 핸드폰도 꺼 버리고 옷가지만 몇 개 챙겨 무작정 집을 나서 지방을 떠돌았다. 창피했다. 이 날 이때까지 아무것도 해 놓은 것이 없는 내가 너무 창피했다. 여자친구는 곧 대위 진급을 할 텐데 나는 여전히 작가 지망생인 게 너무 창피했다. 어디든 좋으니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렇게 한다고 딱히 달라질 것도 없었지만 그때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정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냥 도망치고 싶었다.


어렸다.


어렸고 어리석었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철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길지 않은 1주일 정도의 방황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갔다. 가방 한 쪽에 쑤셔 넣어두었던 핸드폰을 꺼내 충전기에 연결한 후 전원 버튼을 누르고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사방이 어두컴컴해져서야 나는 눈을 떴고 덜 깬 눈으로 핸드폰을 확인한 나는 그 자리에서 곧바로 뛰쳐나갔다. 몇 백 통이 넘는 부재중 전화와 백 통이 넘는 문자 메시지는 그녀와 그녀의 아버님, 어머님, 오빠, 그리고 가족들과 친구들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요약하자면, 그렇게 다투고 잠적해버린 내가 나쁜 생각을,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닐까 걱정한 그녀는 수차례 연락해도 내가 전화를 받지 않자 그 야밤에 숙소를 뛰쳐나와 내 방으로 찾아왔다. 문을 두드려도 응답이 없자 그녀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왔고 아무도 없는 내 방 안에서 내가 충격을 견디지 못해 자살이나 뭐 그런 걸 하러 간 줄 알고 혼자 한참을 울다가 지쳐 잠들었고 부대에서는 난리가 났다고 한다. 사단장님 따님이 간밤에 탈영 후 소식이 없다는 보고를 받은 아버님은 사단 당직사령과 상황장교 및 병원 위병조장을 사단장실로 호출했고 뭔가 깨지는 소리, 고함 소리 같은 영 좋지 못한 소리가 한참 들린 후 최소 근무자만 남기고 당직사령이었던 작전참모 예하 전 간부들은 그녀를 찾아 사단 전체 및 인근 지역을 다 뒤지기 시작했다.


충혈된 눈으로 BOQ 밖으로 뛰어나가는 걸 봤다는 목격자의 증언을 들은 아버님은 전 병력을 복귀시킨 후 홀로 곧장 내 방으로 오셨고 현관문도 잠그지 않은 채 내 방 안에서 눈이 퉁퉁 부은 채 잠든 딸을 발견하셨다. 아버님은 그녀를 안정시킨 후 며칠간의 고민 끝에 우리 부모님께 전화해 자초지종을 설명하셨고 부모님으로부터 수십 통의 전화 및 문자가 온 것이 바로 어제 일이었다. 전화기를 꺼 놓은 나는 당연히 그 사실을 몰랐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자 익숙한 아버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님은 화를 잔뜩 억누르시는 목소리로 다시는 내 딸에게 연락하지도 찾아오지도 말라는 말만 남기고 전화를 끊으셨다.


이렇게 내 경솔한 행동으로 발생한 해프닝은 스케일이 점점 커져 그녀의 탈영으로까지 이어졌으며 결국에는 이별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나는 부모님에게 기존 핸드폰을 압수당하고 새 핸드폰을 받았으며 그녀의 전화번호로 통화가 안 되는 것으로 보아 그녀에게도 같은 조치가 취해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병원에 찾아가 보았으나 위병소 내부에 내 얼굴이 인쇄되어 접근 시 사단장에게 직접 보고하라는 특명이 내려졌으니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그나마 친하게 지내던 위병조장에게 들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는 무기력함을 느꼈고 새로운 지역에서 새롭게 시작하고 싶다는 부탁을 부모님께 드려 상경하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 돌아갈 것이다. 그녀도 반드시 날 기다려 줄 것이다. 이것은 어리석었던 과거의 나에게 스스로 주는 벌이다.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 다시 돌아가자. 그리고 아버님께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그녀를 다시 만나자. 그런 생각들을 하며 서울역행 KTX에 몸을 실었었다. 그렇게 또 몇 년의 시간이 흘렀다.


낮에는 새로 들어간 마케팅 회사에서 어떻게 하면 썩 대단하지는 않은 고객사를 그럴싸하게 포장해서 탈바꿈시킬지를 고민하고 밤에는 종종 야근을 해서 늦게 들어오긴 하지만 간단히 운동을 하고 책상에 앉아 글을 쓰다가 1시쯤 잠드는 일상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내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죽자 사자할 땐 안 되더니 마음을 가볍게 하고 블로그에 틈틈이 썼던 글들이 나도 모르는 새에 인기를 얻어 책을 한 번 내 보자는 제의를 받은 것이다.


무슨 문학상을 받은 것도 아니었고 돈벼락을 맞은 것도 아니었지만 내 글이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은 기분이 좋았다. 스스로에게 주는 상으로 치킨을 시켜 먹으며 오랜만에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고, 부모님은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었다며 그녀의 결혼 소식을 먼저 알려주었다.


나중에 알게 된 바로는, 처음 1년간 그녀는 들어오는 구애와 맞선, 소개팅을 맹렬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다시 한 번 블록버스터급 탈출을 감행해 내 방으로 다시 찾아간 적도 있었지만 나는 이미 이사를 간 후였고 우리 부모님에게도 찾아가 봤지만 우리 부모님은 그녀의 부모님과 약속했다며 내가 있는 곳을 끝내 알려주지 않으셨다고 한다. SNS를 안 하던 나는 당연히 그녀의 레이더망에 걸릴 수가 없었고 그렇게 그녀는 조금씩 지쳐갔다.


그때쯤 만난 결혼 상대가 지금의 예비 신랑이었고, 그는 인근 부대의 패기 넘치는 2살 연하 중위였다. 부대에서 병원까지 외진을 나가는 병력 인솔 간부가 사정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투덜대면서 병원까지 왔다가 그녀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고 들었다. 패기 넘치는 김 중위의 대시를 그녀는 첫 번째엔 웃어넘겼지만 세 번째쯤엔 정색을 했고 여섯 번째로 대시했을 때는 들고 있던 차트를 집어던지며 꺼지라고 했단다.


하지만 그렇게 일방적인 구애 모습에서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았던 건지 그냥 열 번 찍어서 넘어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중위는 본인의 임무 수행에 성공했고 다음 달 중순, 그녀는 오월의 신부가 된다. 예전에 물의를 일으켰던 것과 관련해서 군 생활도 계속하지는 못하고 전역도 한다고 했다.


내가 당연시했던 그녀의 모든 행동들 하나하나 전부가 사랑이었고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닿을 수가 없고 겪을 수가 없는 것들도 그녀의 사랑이었다. 결혼식에 갈지 말지 며칠을 고민했다. 간다면 이런 불청객이 또 없을 것이었지만 안 간다면 평생을 두고 후회하겠다는 생각을 해서 결국 휴가를 내고 집으로 내려가기로 했다.


결혼식장에서 제일 먼저 마주친 것은 그녀의 아버님이었다. 욕먹을 각오를 하고 찾아갔지만 하필 예식장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제일 먼저 눈이 마주쳤다. 아버님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이내 뜨시고는 내게로 다가오셨다.


"왔구나."


"예 아버님. 염치없이 왔습니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다 지난 일이니..."


"..."


"..."


"결혼 축하드립니다."


"그래, 너도 좋은 소식이 있다고 들었는데."


"예, 대단한 건 아니고... 제 이름을 단 책이 나올 예정입니다."


"그래. 축하한다.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해라. 앞으로도 응원하마."


"아직 많이 모자랍니다. 감사합니다."


"내키진 않지만 이렇게 왔는데 얼굴은 보고 가야겠지. 이만 가 보거라."


"예.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짧은 대화가 끝나고 아버님은 다시 밀려드는 환영객들의 축하 인사를 받느라 바빠지셨다. 신부 대기실로 가자 마침 한 무리의 여자들이 사진을 막 찍고 나오는 길이었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며 서성이고 있었는데 멍청하게도 신부 대기실 안쪽에서 다 보이는 곳에서 서성대고 있었고 그러다 눈이 마주쳤다.


어색한 인사 후 침묵이 흘렀다. 딱히 무슨 말을 해야겠다 하고 내려온 것도 아니었고 노래 가사 말처럼 당황시키려는 못된 맘이 있었거나 이 결혼 무효야 하고 괜히 훼방 한 번 놓으려고 간 건 더더욱 아니었다. 먼저 입을 연 건 그녀였다.


"직접 연락할 길이 없어서... 그런데 너라면 찾아올 줄 알았어."


"응..."


"회사 다니더니 더 말끔해졌네. 책도 나온다면서?"


"응..."


"언니!!!!결혼 축하해요!!!!거기 남자분 저희가 사진 찍어 드릴게요. 저희도 좀 찍어 주실래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그녀의 말에 대답만 하고 있었다. 결혼 축하한다는 말이 목구멍으로 올라왔다가 내려갔다가를 반복하는 와중에 그녀의 지인들로 보이는 여자들 한 무리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분위기에 휩쓸려 얼떨결에 내 폰을 내주고 그녀와 사진을 찍었고, 그녀들의 사진도 찍어 주었다.


왠지 거기 계속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나가기 전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다 안다는 표정으로 손을 흔드는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뒤돌아 나오면서 나는 그제야 과거의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온몸으로 느끼게 되었다.


화장실에서 한참을 울고 나오니 마침 신부 입장이 막 완료된 시점이었다. 예식장 맨 뒤 구석에서 결혼식을 지켜보는 동안 의미 없고 특별할 것 없는 주례사와 혼인 서약 과정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축가는 신랑이 신부에게 먼저 불러 주었고 노래가 끝나자 큰 박수가 예식장 안에 울려 퍼졌다.


"다음은 신부의 축가가 이어지겠습니다."


사회자의 멘트가 끝나고 이어지는 반주를 듣자마자 나는 그녀를 쳐다보았다. 이 노래를 알고 있다. 이 노래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식장을 한 바퀴 둘러보던 그녀는 이내 나를 발견하고 나를 잠시 동안 바라본 후 노래를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신랑에게 보내는 축가가 아니다. 사람들에게는 축가로 보이겠지만 노래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 눈빛을 본 나는 이 노래는 그녀가 나에게 보내는 노래임을 확신했다.


착각이 아니다. 함께 카페에서, 거리에서, 방에서 부르고 듣던 그 노래였다. 그때는 그냥 절절하고 슬픈 사랑 노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그 어떤 노래보다도 지금의 우리를 잘 표현해 주는 노래였다. 만난 지 몇 년 안된 신랑에게 불러줄 만한 노래는 더더욱 아니었다.


이 노래를 불러야 할 것은 그녀가 아니라 나였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진짜 사랑이란 걸 알게 해 주었고 내가 지쳐가던 모든 나날들, 모든 시간에 날 일으켜 주던 그녀에게 내가 불러 주어야 할 노래였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가 예식장 한가득 울려 퍼지던 그 시점에서 나는 그럴 자격이 없었고, 그녀는 그렇게 그날 나를 떠나갔다.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는 것은 흔한 일이기에 사람들은 노래가 끝나고 눈물을 펑펑 흘리는 그녀를 보고도 별다른 의심은커녕 더 큰 박수를 치며 그들의 결혼을 축복했다.


그래. 고맙다. 나야말로 고맙다.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살아와줘서, 마지막으로 인사해 줘서 고맙다. 그리고 미안했다.




누구에게나 눈부시도록 사랑한 순간이 있다. 너무 즐거워서 웃느라 눈이 감겨서인지, 밝은 빛에 적응이 되어서 눈부신 줄 몰라서인지는 모르지만 당시에는 그 사실을 모르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어느 순간 찾아온 슬픔에 눈을 뜨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슬퍼한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슬픔은 언젠가 끝나서, 잊히거나 가슴 깊숙이 묻히지만 사랑해서 빛났던 순간은 그보다 오래도록 우리와 함께 한다. 오랜 세월이 지나 뒤를 돌아볼 때 슬펐던 순간보다는 기뻤던 순간이 먼저 기억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사랑을 잃고 노래하던 그날은 이제 희미하지만 사랑으로 충만하던 나날들은 지금 이 날까지도 또렷하지 않은가.


물론 철없던 내 행동들을 생각하면 침울해지기도 하지만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슬픔과 죄책감은 희미해질 것이고 사랑했던 기억들은 적당히 아련하게 희미해져 내 삶을 더 아름답고 행복하게 해 줄 것이다. 분명 그녀도 그럴 것이라 생각하고 또한 그랬으면 좋겠다.




https://youtu.be/2Gq-RScAKXU


[부활 - 사랑]


사랑이었던 걸 모르고 만났었다면

헤어진 후 느끼게 된다고

시간이 흘러서 보고싶어질쯤

아픔이란게 찾아오고


알 수 없는 그 어느 날에

그리움이 다가오고

돌아가려 해보면 이미 멀어져가는

슬픈 얘기가 만들어지고


고마워요 내 마음속에

그토록 오랫동안 살아와줘서

지쳐가던 시간에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일어설 수 있게 해준 그대..


알 수 없는 그 어느 날에

외로움이 다가오고

돌아가려 해보면 이미 멀어져가는

슬픈 얘기가 만들어지고


고마워요 내 마음속에

그토록 오랫동안 살아와줘서

지쳐가던 시간에 그대를 생각하면서

내가 일어설 수 있게 해준


사랑해요 기억이 나요

언제나 간직할 수 있었기에

너무 늦었지만 너무 몰랐었지만

사랑이란걸 알게해준


고마워요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살아와줘서

고마워요..

부활.jpg 부활 '11집 사랑'(2006.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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