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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물고기

"나도 언젠가 바다로 돌아갈 수 있겠지."

by 돌아보면

[A.M. 05:30]

휴대폰 알람음으로 해 놓는 노래는 아무리 신나고 좋아하는 노래라도 싫어지게 되는 법이다. 그렇다고 그냥 새 소리나 기본 알람음으로 해 놓으면 소리 자체가 그다지 신나지 않기 때문에 활기차게 아침을 시작하지 못할 것 같아서 싫다. 좋아하는 노래로 알람을 설정해 둔다고 해서 아침이 썩 활기차지지는 않지만.


이런 생각들을 하며 이불을 대강 정리하고 간밤에 끓여 둔 찌개를 데우며 전자레인지에 햇반을 넣어 돌린다. 그리고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나오면 찌개가 어서 빨리 먹어주세요 보글보글 하고 끓고 있다.


머리를 짧게 잘라버렸더니 아침에 준비하는 시간도 줄어들고 회사에서도 깔끔해졌다며 좋아한다. 짧은 머리가 잘 어울린다는 칭찬도 곧잘 듣는다. 하지만 가슴 한구석 뭔가 씁쓸한 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 같다.


상을 편 후 냉장고에서 김치까지 꺼내 놓으면 식사 준비가 끝난다. 자취를 하게 되면 보통 아침은 건너뛰거나 대충 먹게 마련인데 나는 절대 그럴 수가 없다. 나에게 있어서 밥을 굶는 것은 말 많은 팀장님의 잔소리를 듣는 것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싫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밥을 이렇게 먹어도 나가는 시간이 애초에 이른 시간이기 때문에 상관없다.


설거지는 저녁에 하니까 물에만 대충 담가 두고 어젯밤에 생각해 둔, 오늘 입고 나갈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선다. 가끔 이렇게 옷 고민을 할 때면 차라리 정장이 낫겠다 싶을 때도 있지만, 우선 덥고 불편하며 매번 다려 입어야 하니까 자유 복장으로 출근하게 해 주는 회사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을 전하며 집을 나섰다.



[A.M. 06:00]

집 앞 정류장에서 다행히 바로 버스를 탔다. 버스 기사님 입장에서는 정류장에 승객이 없으면 그냥 지나치는 것이 당연하지만 아침 출근길 1분 1초가 직장인에게 정말 중요한 것임을 인지하셔서 부디 출발 전에 백미러를 한 번 봐주는 여유를 가지셨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바로 일주일 전에 한 적이 있었다. 짝사랑하던 여자아이 앞에서 운동회 계주를 할 때 이후로 내 생애 그렇게 빠른 속도로 뛰었던 적이 또 있었을까 싶다.


그렇게 버스 - 지하철 - 버스로 이어지는 일정한 아침 출근길 흐름을 타면 몸은 피곤해질지언정 여유 있게 회사에 도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은 여유로워진다. 혹시나 내 앞에 빈 자리가 나더라도 어르신이나 여자분들께 자리를 양보하겠다는 제스처로 한걸음 뒤로 물러선다. 감사의 표시를 받은 적은 거의 없지만 뭔가 뿌듯하다. 1일 1선이라고, 바쁜 세상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그리 많지 않은 착한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A.M. 08:00]

회사 출근시간은 9시까지지만 보통 이때 도착한다. 뭐야 여유롭잖아? 하고 집에서 10분 늦게 나왔다가 08시 55분에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후로 그냥 마음 편하게 일찍 오고 있다. 서울 지하철 노선도를 원망한 적도 있지만 내가 선택한 길인 걸 어쩌겠는가. 메일을 확인하고 - 사실 메일 온 건 간밤에 핸드폰 푸시 알림으로 받았지만 퇴근했기 때문에 쿨하게 알림 표시를 지웠다. - 급하게 보내 달라는 것들만 일단 보내 주었다. 잠시 후 도착한 박 주임님에게 인사를 하고 함께 1층으로 내려가 박 주임님 카드로 커피를 사고 밖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는 박 주임님께 쪼르르 달려가 함께 앉아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한다. '주임님' 발음을 잘못하면 '주인님'이 되기 때문에 항상 발음에 주의하고 있다.


[A.M. 09:30]

부서 회의가 시작되었다. 요새 애들이 쓰는 말로 '설명충'이라는 단어가 있더라. 그 설명충의 훌륭한 표본인 팀장님이 10분이면 끝날 이야기를 앞으로 최소 1시간가량 할 예정이다. 이제 갓 수습기간을 벗어난 신입인 나와 내 동기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펜과 수첩을 펼치고 최대한 팀장님 말씀에 경청하는 듯한 눈빛 몸짓을 장착하고 다른 생각에 잠겼다. 어쩌다 팀장님이 말을 걸면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라던지 '그렇긴 하지만 여러 측면에서 함께 검토 후 결정하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한 후 하던 생각을 마저 하면 된다. 맞은편에서는 주임님이 이미 다른 세상에서 노닐고 계셨다.


[A.M. 11:40]

회의는 의외로 일찍 끝났지만 할 일들이 많이 생겨 오전이 바쁘다. 연이어 해야 하는 일들인데 이것저것 다른 일들을 처리하고 나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다. 어차피 곧 점심시간이니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일단 대충 구상만 해 두기로 한다. 회의 전에 못 끝낸 홈페이지 및 페이스북 페이지를 마저 점검하고 어제가 마감이었던 이벤트 당첨자 발표 공지를 준비했다. 그러고 나니 1시간이 화살처럼 지나가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P.M. 01:00]

'데스노트'라는 일본 만화가 있다. 노트에 그 사람의 이름을 적으면 그 사람이 죽는다는 기발한 설정으로 인기를 끌었던 만화다. 나에게 그 데스노트가 있다면 팀장님의 이름을 제일 먼저 적을 것이다. 사인은 순대국을 먹다가 심장마비로 사망 정도가 적당할 것 같다. 순대국집 이모와 모종의 거래를 체결했는지 어쩐지는 알 수 없지만 일주일에 3번을 순대국집을 간다는 건 좀 심하지 않은가? 이런 나와는 반대로 순대국을 먹기 위해 태어난 내 동기는 아무리 오전에 크게 혼나거나 실수해서 시무룩한 일이 생기더라도 60%의 확률로 - 주 3회 순대국이니까 - 점심시간만 지나면 새로 태어난다. 머리를 새로 갈아 끼운 호빵맨이 딱 저 모양일 것이다.


오후엔 블로그 콘텐츠와 페이스북 콘텐츠를 만들고 또 다른 이벤트를 기획해서 주임님과 팀장님께 보고해야 한다. 원래는 주임님 일인데 우리 팀 팀원 한 명이 그만두면서 주임님 일이 엄청 늘었다. 매일 커피도 사주고 가끔은 저녁에 술도 사주고 모르는 것도 잘 알려주는 착한 주임님이 힘들어하셔서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와드리고 싶다고 했고 그 결과가 이거다. 함께 야근하는 일이 늘어서 힘들 때도 있지만 주임님이 팀장님께 받아온 법인카드를 보여주며 씩 웃는 순간 모든 근심 걱정은 사라져 버린다. 아아, 남자가 저렇게 매력적이어도 되는 건가?


[P.M. 04:00]

콘텐츠 때문에 팀장님에게 혼났다. 고객이 원하는 콘셉트가 있는데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팀장님께 받은 메일에 있는 내용을 보고 그대로 적용해서 만든 건데 이걸 변명이라고 하면 왜 확인도 안 받고 일을 진행하느냐고 소리를 지를 것이다. 평소에 확인을 받으러 가면 이미 메일로 보내 주지 않았느냐며 언제까지 확인해 줘야 하냐며 목소리를 높인다. 어느 장단에 놀아나든 혼나는 건 매한가지이기 때문에 나는 상상 속에서 데스노트에 팀장님 이름을 - 사인 : 소리 지르다가 심장마비로 사망. - 다시 한 번 적었다.


[P.M. 07:00]

원래는 퇴근시간이지만 오늘은 혼자 야근을 해야 한다. 다른 때 같으면 동기나 주임님이 도와주는데 동기는 상갓집을 가고 주임님은 소개팅이 잡혔단다. 혼자 남아있는 회사는 이젠 내 방 마냥 편할 때도 있지만 때론 너무 조용해서 으스스할 때도 있다.

저녁을 간단히 때우고 들어와 일을 계속한다. 글 쓰는 것이 좋아 마케팅 회사에서 콘텐츠를 만드는 직무를 맡고 있지만 마냥 글만 쓰는 것도 아니고 지시받은 일을 그냥 이것저것 다 하곤 한다. 최대한 톡톡 튀는 멘트로 제품 홍보 게시글을 작성할 때면 사람들이 보고 재미있어할 생각에 즐거울 때도 있지만 대부분 드는 생각은 이렇게 해도 그냥 웃고 말지 이 제품을 살까 하는 투덜댐이다.


[P.M. 09:00]

퇴근 후 집 근처의 체육관에 도착했다. 하루 중 유일하게 아무 생각 없이 있을 수 있는 시간이다. 내년이면 서른이 되는 나는 30살이 되기 전에 여름 바다에서 상반신을 탈의하고 놀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매일 밤 운동에 매진하고 있다. 가장 큰 장애물은 간혹가다 있는 술자리 탓에 내 허리 주변에 자리 잡은 배둘레햄이다. 하지만 올해는 기필코 이놈들을 몰아내고 해변 위의 젊은 오빠가 될 것이다.


[P.M. 11:00]

주말에는 혼자 전시회나 영화도 보러 가기도 하지만 평일에는 피곤하기도 하고 다음날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집에 오면 별다른 일 없이 거의 바로 잘 준비를 하고 눕는다. 대학 때부터 해서 지방에서 올라와 살게 된지 어언 9년, 나는 대체 뭘 위해서 여기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나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한다. 원래 내 꿈은 작가였지만 어렸을 때는 꿈보다는 당장 눈앞의 시험 점수에만 더 신경을 썼던 것 같다. 꽤 이름 있는 학교의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할 때쯤 온전히 나를 돌아보게 되었고 나는 다른 일을 할 때보다 글을 쓸 때 가장 행복함을 느낀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기업에서 원하는 것은 글을 쓸 때 내가 행복함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나의 스펙과 그동안의 발자취였고, 철저하게 공대생 step을 밟아온 나는 그들이 원하는 인재는 아니었다.


물론 다른 일을 하다가도 작가로 성공한 케이스가 있기는 있다. 아니, 꽤 많다. 하지만 나는 그들처럼 되지 못했고 매달 내야 하는 공과금, 통신요금, 카드값을 온전히 내고서 일상생활을 유지하려면 아르바이트만으로는 버거웠다. 이 나이 먹고 집에다가 손 벌리기도 우습다고 생각해서 일단 비슷한 일이라도 취직을 먼저 한 후 틈틈이 글을 쓰자고 결심했다. 그 결과가 이거다.


틈 나는 시간엔 잠자기 바쁘고 주말에는 주말대로 또 일이 계속 생긴다. 평일 일과는 위에 썼던 시간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므로 또 여유가 없다. 꿈을 이루지 못한 이런저런 변명을 대자면 사실 끝도 없다.


이런 나지만, 그래도 언젠간 내 꿈을 이룰 수 있길 바라며,

내일은 오늘과는 조금 다르길 바라며 잠이 들었다.




어렸을 때는 스무 살이 되면 굉장히 많은 것들이 바뀔 줄 알았다. 스무 살이 된 후엔 군대를 다녀오면 철이 들 것이라 생각했다. 군대를 다녀온 후엔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면 세상을 보는 시선이 바뀔 것이라 생각했다. 졸업을 하고 취업 준비를 할 때는 다들 이런 과정을 거친다며 자기 자신을 합리화하며 취업만 하면 많은 것들이 달라질 줄 알았다. 취업한 후에는 한 서른 살쯤 되면 차근차근 쌓인 경력을 바탕으로 상사에게 받은 일을 능숙하게 처리하여 신임 받고, 직급과 연봉이 오르고, 그런 후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 헬조선 라이프를 살아갈 딸아이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딸은 나보다는 부인 쪽을 닮았으면 좋겠다. - 그 어렵다는 '평범하게 사는 삶'을 영위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 서른 살을 1년 앞두고 나는 아직도 무엇 하나 능숙해지지 못했으며 뒤늦게 생긴 꿈은 밀려드는 현실이라는 놈을 맞이하느라 저 뒤편에 아무렇게나 던져뒀다. 남들은 저런 '평범하게' 살기 위한 인생의 과제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것 같은데 나는 남들이 해내는 것을 하지 못 해서 마치 초등학교 시절 숙제를 안 해 교실 뒤로 나갈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말로는 '이제 우리 나이에 어디 다치면 잘 낫지도 않어.'라며 몸의 노화를 체감하지만 마음은 그것에 발맞추어 따라오지는 못한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고,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절망을 보기보다는 앞으로 이룰 수 있을 것들에 대한 희망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기에 오늘도 잠든다.

그래야 내일이 또 올 테니까, 희망이 또 올 테니까.




https://youtu.be/3P6D7YapmA4


[박상민 - 나무물고기]


하늘을 날고 싶어 저 하늘 구름 위로

그리워하지만 살아 숨 쉴 수 없었던 나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어두운 밤이 되면 저 바다 물결 속에

내가 태어난 곳 아주 깊은 곳 어딘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제는 말라버린 내 비늘

세월의 아픔만 쌓여가고

아무리 기도해도 내 꿈은

이루어질 수는 없는 걸까


이제 나는 돌아갈래

썩지 않고선 살아갈래

눈물만큼 피어나는 꽃처럼

나도 언젠가

바다로 돌아갈 수 있겠지


이제는 말라버린 내 비늘

세월의 아픔만 쌓여가고

아무리 기도해도 내 꿈은

이루어질 수는 없는 걸까


이제 나는 돌아갈래

썩지 않고선 살아갈래

눈물만큼 피어나는 꽃처럼

나도 언젠가

바다로 돌아갈 수 있겠지


이제 나는 돌아갈래

썩지 않고선 살아갈래

눈물만큼 피어나는 꽃처럼

나도 언젠가

바다로 돌아갈 수 있겠지

박상민 '박상민 MAX'(2007.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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