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내 꿈을 꾸고 있다고 믿고 싶어요."
※ 이번 포스팅은 메일을 통해 받은 사연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익명)
우리가 언제 무슨 계기로 알게 됐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만큼 우리는 오래됐고 서로에 대해 많이 알았었다. 그랬던 우리였지만 진학한 고등학교가 달랐고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연락이 한번 끊긴 적이 있었다.
연락처 같은 걸 조금만 더 많은 친구들에게 수소문해봤다면 그런 것쯤 금방 알 수 있었겠지만 나는 그러지 못 했다. 어린 마음에 친구들로부터 너 걔 좋아하냐며 추궁 받는 것이 싫었던 것이 첫 번째 이유, 내가 연락 못 한건 생각 안하고서 그렇게 연락이 끊긴 것에 대해 서운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그렇게 그녀는 내 추억 속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고서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조금씩 빛이 바래진 모습으로 계속 그렇게 있을 것만 같았다.
그 사이 우리는 어른이 되었고 나는 네덜란드에 있는 학교로 진학하게 되어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학교생활은 재미있었고 이 동네 애들은 동양인들을 무시하고 뭐 그런 것도 없어서 처음에 걱정했던 것과 반대로 나는 금방 그들과 친해졌고 곧 원래 그곳에 살았던 사람처럼 훌륭하게 적응했다.
원래 한국에는 당분간 안 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초등학교 시절 함께 축구도 하고 여기저기 같이 뛰어다니며 장난치고 놀던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 학교도 방학 중이었고 해서 나는 방학 기간 동안 한국에 돌아오기로 했다. 생애 처음 맞는 친구의 죽음에 어리둥절한 채로 정신없이 찾아간 친구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그녀를 다시 만났다.
그때는 둘 다 눈도 퉁퉁 부어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반가운 건 반가운 거였지만 아마 속으로 그녀는 나와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아니?? 왜 하필 세상에서 제일 못생겼을 때인 지금?!'
며칠 후에 만난 그녀와 나는 그날에 비해 몇 배나 또랑또랑한 눈으로 서로를 마주했다. 몇 년 만에 제대로 만나는 서로였기 때문에 둘 다 엄청 힘을 주고 온 것이 누가 봐도 느껴질 정도였다. 그게 서로 느껴졌는지 첫 만남부터 서로 웃었고 왜 웃었는지 이유를 서로에게 공개하면서 그게 웃겨서 또 웃었다.
우리는 그동안 살아온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술잔을 나누며 같은 시간을 추억했다. 몇 달 전에 남자친구와 헤어진 그녀는 그동안 많이 심심했었고 꼭 그런 이유뿐만이 아니라도 살면서 틈틈이 내 생각을 했다고 했다. 그때는 어려서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그때도 나름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로에게 호감이 있는 두 남녀가, 단둘이 술을 마시고 서로의 추억을 공유했다. 밤이 깊어가며 우리의 눈빛도 깊어져 갔고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거라고 믿는다.
아침에 눈을 뜨자 그녀의 방 안이었다. 시계는 거의 열두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녀는 옆에서 내 팔을 베고 새근거리면서 자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가 입고 있던 셔츠를 그녀가 입고 있었고 나는 맨몸이었다. 잠도 덜 깼고 이불과 그녀가 내게 주는 그 따스함과 포근함이 너무 좋아서 나는 다시 팔을 뻗어 이불을 덮어 주면서 그녀를 안고 얼마간 더 잤고 그렇게 나는 그녀의 집에 눌러 살게 되었다.
우리는 오락실을 누구보다 좋아해서 한 번 오락실을 갈 때면 빵빵한 동전지갑을 들고 함께 가서 격투 게임, 비행기 게임, 코인 노래방 등 오락실이 제공하는 모든 콘텐츠를 이용하고 돌아왔고 아무리 비바람이 치는 날이라도 돌아오는 길에 떡볶이와 순대는 꼭 사 왔다. 치킨도 너무 좋아해서 집에서 치킨을 시킬 때면 항상 두 마리를 시켰다. 저 가녀린 몸 어디에 치킨 한 마리가 다 들어가는지 의아했지만 자려고 누웠을 때 살짝 튀어나온 윗배가 귀여워서 꼭 안아 주었다. 뜬금없는 백허그에 당황한 그녀였지만 이내 내 손을 꼭 잡고는 잠들었다.
그녀는 노래도 잘 했지만 기타도 퍽 잘 다뤘다.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노래, 특히 팝송 같은 걸 내 셔츠를 걸쳐 입고 기타로 연주해 주는 것을 좋아했다. 남자들은 여자가 자기 옷을 입고 뭔가를 하면 되게 뿌듯하게 느끼지 않느냐고, 자기가 인터넷에서 다 봤다며 웃으면서 온갖 치명적인 척 섹시한 척은 다 하며 기타 연주를 해 주었다. 나는 살다 살다 별 걸 다 본다며 잠시 집에 있는 랜 선을 끊어야 하나 고민했지만 어쨌든 너무나 사랑스러웠기 때문에 랜 선은 그냥 두기로 했다.
"이 노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래야. 되게 사랑스럽다?"
"그... 그래? 진짜 오늘 눈... 아니 귀 호강 제대로 하네."
"뭐래~이건 Birdy의 Tee Shirt라는 노래야."
"응 그래? 그래! 티샤쓰! 저도 막 기대가 됩니다. 얼른 들려줘."
"아 티샤쓰 아니라고 티셔츠라고 티!셔!츠!"
"아 그래 티! 샤! 쓰! 셋 둘 하나 시작!"
"아 티셔츠라니까!!!!!!"
그렇게 좀 많이 큰 내 셔츠를 입고서 그녀는 웃으면서 내 등짝을 내리쳤다. 손이 매운 그녀였던지라 아프긴 아팠지만 그 뚱해있는 표정을 보는 것이 너무 귀여워서 나는 계속 티셔츠를 굳이 티샤쓰라고 부르며 그녀를 놀렸다. 그렇게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꿈결 같던 2개월이 지나갔고 나는 서서히 꿈에서 깨어나 네덜란드로 돌아가야 하는 현실 앞에 마주 섰다.
애초에 그녀도 나도 알고 있었다. 그걸 감수하고서라도 만나고 싶어 할 만큼 서로가 서로를 원했다. 단순히 서로의 몸을 원하는 가볍고 본능적인 사이가 아니었다. 우리는 과거의 추억을 함께 공유하고 현재를 함께 살아가며 미래를 함께 이야기했다. 네덜란드로 돌아가기 전 그녀와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다.
"나 그냥 가지 말고 1년 더 있다가 갈까?"
"그러면 나야 좋은데... 나 때문에 네 미래와 계획이 틀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솔직히 이번에 가면 내년이나 되어야 돌아올 텐데... 뭐야 이게. 나 군대 보내는 것도 아니고."
"그건 그래... 이제 목소리 듣고 얼굴 보려면 스카이프 같은 거 써서 해야겠네?"
"그래야지."
"..."
"..."
"..."
"저기 그냥, 나 안 기다려도 돼."
"?"
"정말 우리가 서로에게 인연이고 만날 운명이라면 여기서 우리가 어떻게 되든 언젠가 다시 만날 거라고 믿어."
"그게 무슨 말이야?"
사실 이런 말을 꺼내게 된 계기가 있다. 그녀는 모르고 있었겠지만, 나와 만나기 전 헤어졌던 전 남자친구에게서 연락이 와서 이야기를 주고 받은 걸 우연히 알게 되었었다. 외로움을 유난히 많이 타던 그녀에게 외로움을 줬던 사람이었지만 사람 자체는 나쁘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안다. 내가 없다면 그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나가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더라도 아무 말 안 할게. 혹시 나를 떠나더라도 내가 다시 돌아와서 너 잡을 거야."
사람은 언제나 과거를 돌아보게 마련이고 후회를 하게 마련이라지만 이 일은 내가 살면서 겪은 일 중 가장 후회하는 일 Top 3 안에 들어갈 만큼 어리석은 일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고 이해도 안 됐지만 그녀는 웃으며 알겠다고 했고 나는 바보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한국을 다시 떠났다. 그때는 아무 일도 없이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될 줄만 알았다.
나는 네덜란드에 가서도 항상 그녀 생각뿐이었다. 아침 등굣길에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도 귀 한쪽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었고 그 안에서는 그녀가 들려주었던 노래인 티샤ㅆ... 티셔츠가 울려 퍼졌다. 옷장 문을 열면 그 안에는 그녀가 입던 내 티셔츠가 그녀의 향기를 간직한 채 얌전히 개어져 있었고 나는 미관상 참 보기 안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차피 혼자 사니까 상관없다고 생각하고는 이내 티셔츠에 코를 파묻어 그녀의 향기를 느꼈다.
연락은 따로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다시 그 남자를 만나고 있을 것이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토록 연락 한 통 없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모든 면에서 그 남자보다 훨씬 나았고, 특히 그녀와 함께 지내온 세월에 대해서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나는 그래서 한국에만 가면 그녀와 다시 잘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혼자서 상상하곤 했었다. 어릴 때 연락 안 하던 그것과는 다르다. 믿기에 굳이 연락을 안 하는 거라고, 여자를 정말 모르는 남자들이 흔히 보이는 행동들을 했다. 진짜 그게 맞는 건 줄만 알았다. 진짜로.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든 교과 과정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다시 그녀와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었다. 한창 예쁠 때인 그녀를 열 번 찍어보겠다며 사방에서 많은 나무꾼들이 나무 베기를 시도해 오곤 했었다. 그중에는 그녀의 취향에 딱 맞는 나무꾼도 있었어서 몇 번 만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과거의 추억을 공유하는 것 이외에는 굳이 내가 아니라도 다른 사람들과 얼마든지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정작 나는 나가서 연락 한 통 없는데 이 듣도 보도 못한 애들은 하루에도 몇 번 씩 뭐 하냐고 연락이 왔다. 변명을 하자면, 나는 당연히 그녀가 다시 구남친과 만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방해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연락을 안 했던 거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구남친과 다시 완전히 헤어졌고 연락 한 번 없는 나보다는 조금 귀찮더라도 내 안부를 묻고 나에 대해 묻는 이 남자가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단다.
이 모든 것들을 본인이 아닌 타인 - 그녀의 친구 - 입에서 들으려니 더욱 미안하고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왜 연락을 안 했던 걸까. 이역만리 타지에서 살고 있는데 그냥 안부 정도만이라도 물을 수 있지 않았을까. 잘 지내냐고, 오늘은 어땠냐고, 나는 어땠다고, 아 근데 나 매일 티샤쓰 그거 듣는다고, 너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라 듣는다고, 들으면서 항상 네 생각 하고 있다고. 그랬다면 그녀는 날 기다릴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었을까.
모르겠다. 그녀는 연락은 따로 안 해줬으면 한다는 말을 남기고 나를 떠나갔고 나는 텅 빈 방 안에서 아직도 그녀의 향기가 남아있는 티샤쓰를 꺼내서 몇 번이고 끌어안곤 했다. 향기를 맡을 때마다 향기는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또렷하게 남아 그녀를 추억하게 했다. 시간이 한참 지난 지금도 향기는 아직 남아있고 나는 여전히 그녀를 그리워하고 있다. 어디서 뭘 하고 지내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저 그녀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또다시 여름이 찾아왔고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진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수많은 티샤쓰를 보면 나는 또 네 생각에 잠긴다. 내 티샤쓰에서 너의 향기가 사라지는 날이 오면, 나도 아팠던 지금을 추억하며 웃을 수 있을까. 달콤한 이 노래를 들으며 슬퍼하지 않고 웃음 지을 수 있을까.
보고 싶은, 그리운 사람이 생기면.
언제나 네 곁에서
그 입술에, 그 숨결에 닿을 수만 있다면.
이제는 다시 만날 수조차 없지만.
In the morning when you wake up
I like to believe you are thinking of me
And when the sun comes through your window
I like to believe you've been dreaming of me
Dreaming...
I know
Cause I'd spend half this morning
Thinking about the t-shirt you sleep in
I should know
Cause I'd spend all the whole day
Listening to your message I'm keeping
And never deleting
When I saw you,
Everyone knew
I liked the effect that you had on my eyes
But no one else heard
The weight of your words
Or felt the effect that they have on my mind
Falling...
I know
Cause I'd spend half this morning
Thinking about the t-shirt you sleep in
I should know
Cause I'd spend all the whole day
Listening to your message I'm keeping
And never deleting
아침에 당신이 눈을 떴을 때
난 당신이 내 생각을 하고 있다고 믿고 싶어요
그리고 당신의 창문 사이로 해가 들 때면
당신이 내 꿈을 꾸고 있다고 믿고 싶어요.
꿈을 꾸는 중이라고...
알아요
왜냐면 난 거의 아침 내내 당신이 잘 때 입었던 티셔츠를 생각하고 있거든요
난 알아야 해요
난 매일매일을 내가 간직하고,
또 절대 지우지 않을 당신의 메시지를 듣는 데 쓰고 있거든요.
내가 당신을 봤을 때 모두가 알았어요
내 두 눈에 당신이 담긴 그 느낌을 난 좋아했어요.
하지만 그 누구도 당신의 언어나 감정이 표현되는 걸 듣지 못했죠.
왜냐면 그것들은 내 마음 속에 있거든요.
빠져들고 있죠...
알아요
왜냐면 난 거의 아침 내내 당신이 잘 때 입었던 티셔츠를 생각하고 있거든요
난 알아야 해요
난 매일매일을 내가 간직하고,
또 절대 지우지 않을 당신의 메시지를 듣는 데 쓰고 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