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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그저 내 목소리만이 무안하게 들려오네."

by 돌아보면

몇 년 전 모 오디션 프로그램 참가자가 포스트맨의 '신촌을 못 가'라는 곡을 불러 이슈가 됐었다. 모르는 노래라 한 번 들어보니 과연 이슈가 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갈 수 없는 '신촌'은 있다. 연인과 오랫동안 다녔던 그곳은 헤어진 후에는 혹시나 마주칠까 보통은 근처도 안 가고 서서히 그 지역엔 뭐가 유명한지, 뭐가 맛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잃게 되고, 그렇게 시간이 흘러 또렷했던 기억들은 어느새 흐려지게 된다.


영지와 헤어진 지 어느새 반 년 정도가 흘렀다. 별로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고 그녀가 평소 친구와도 자주 오는 곳이기 때문에 나는 이곳 홍대, 합정, 상수 일대 쪽으로의 발길을 끊었다. 뭐 우리 몸에 센서 같은 게 부착되어 있어서 일정 거리 이내로 접근하게 되면 '주의! 주의! 전남친(전여친)접근중!'이라는 알림이 뜨는 것도 아니고 사실 만날 확률보다는 안 만날 확률이 더 높겠지만 사람 일이라는 게 모르는 것 아니겠는가.


'홍대'하면 사람들이 주로 떠올리는 건 길거리 공연, 클럽, 바글바글한 사람들, 다양한 패션을 소화하는 사람들, 중국인 관광객들 등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오직 그녀와 함께 한 장소와 함께 한 기억들뿐이었다.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홍대에서 만나자고 하면 나는 다음과 같은 변명으로 약속 장소를 굳이 바꾸곤 했다.


"아 거기 젊은 애들 너무 많아. 홍대 평균 연령 올리기 싫다 다른 데서 보자."


그랬던 내가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이곳 홍대에 다시 오게 되었다. 친구들과 가기로 했던 여행이 한 달 뒤로 연기되면서 휴가 일정이 텅 비어버린 탓이었다. 사실 그냥 집에서 쉬어도 되고 내가 좋아하는 전시회를 보러 가도 됐지만 내가 완전히 그녀를 잊었는지 시험해보기 위해서라는 거창한 이유를 스스로에게 대며 굳이 다시 이곳에 왔다. 생각해보면 웃기다. 삼년상 치르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잊기 위해서 피해 다녔던 이 골목, 이 가게들, 이 거리를 다시 오게 되다니 말이다.


평일 낮의 홍대는 비교적 평화롭다. 점심시간 이후라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 이곳이 인기 없는 장소였다면 인기 없는 시간에 인기 없는 남자가 인기 없는 장소에 위치해있는 인기 없음의 삼위일체를 이뤄낼 수 있었을 텐데 퍽 아쉽다는 생각을 하며 혼자 웃다가 맞은편에 오는 여대생과 눈이 마주쳤다. 그 여대생을 또 볼 일은 없겠지만 이 창피함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더위가 한 풀 꺾이긴 했지만 그래도 여름이다. 나는 열이 많은 내 체질과 늦여름 날씨를 얕본 죄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으며 우리가 자주 가던 합정 쪽의 카페로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어머나, 이게 누구예요? 정말 오랜만에 찾아 주셨네요."


주인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 주신다. 세월이 흐를 만큼 흘렀음에도 나를 기억해주는 모습에 놀라며 처음 이곳에 왔을 때를 떠올렸다. 주인 할머니가 홀로 운영하는 이곳은 커피값도 그리 비싸지 않은 점이 첫째로 좋았고 반지하 구조라 적당히 들어오는 햇빛과 앤티크한 가구들, 하지만 할머니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귀여운 캐릭터 굿즈와 화분, 캔들, 피규어 등의 산뜻한 장식품들이 곳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중 백미는 한 쪽에서 돌아가고 있는 미러볼이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손녀딸이 직접 진열해 놓은 것이라 했다. 평소에는 여자 손님들이나 커플 손님들이 많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이곳을 좋아하게 된 세 번째 이유와도 같다. 사진이 그렇게 잘 나온다며 그녀는 침이 마르도록 이곳을 칭찬했었고 커피 마시랴 사진 찍으랴 나랑 수다도 떨면서 사진들 SNS에 올리랴 혼자 참 분주했었다.


아니, 이런저런 이유 다 떠나서 커피가 맛있었다. 할머니 바리스타라니... 하며 반신반의한 태도로 커피를 받아든 우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 순간부터 할머니에 대한 충성도가 100이 되었다. 할머니는 그런 우리들에게 다가오며 말을 걸기도 하셨다.


"이 아메리카노는 말입니다. 스트로우를 통해 드시게 되면 스트로우의 플라스틱 때문에 원두 본연의 맛을 조금은 잃게 됩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까지는 스트로우 없이 드시는 것을 권해 드립니다."


할머니의 공손한 말투와 설명에 듣는 우리들은 우리도 모르게 두 손을 모으고 아... 예 예 그렇군요 등의 리액션을 보였다. 해당 원두의 역사와 로스팅 요령, 함께 맛보면 좋은 디저트류, 그에 얽힌 할머니의 에피소드에 대한, 주례사를 연상케 하는 설명을 한동안 들은 후에야 할머니는 자리로 돌아가셨고 그제야 우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캐러멜 마키아토를 시켜도, 카페모카를 시켜도 처음 주문하는 음료에 대해서는 어떻게 다 기억을 하시는지 음료와 함께 찾아와 저 특유의 말투로 설명을 해 주시곤 하셨다. 그런 점이 처음에는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할머니 말투를 따라 하기도 하며 그녀를 웃겨주곤 했었다.


비상한 기억력의 할머니가 그녀를 기억 못하실 리가 없는데 굳이 언급해주시지 않으심에 속으로 고마움을 표시하고는 항상 함께 앉던 창가 자리에 혼자 앉아 창밖을 둘러보기도, 카페 안을 둘러보기도 하고 마침 사진이 잘 나오는 곳에 왔으니 사진을 찍기도 했다. 평일 낮이라 카페 안에는 나와 할머니 둘 뿐이었다. 무작정 '일단 홍대를 가자'하고 나온 거라 가져온 책을 다 읽고 나니 별로 할 게 없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많이 했지만 특별한 감흥은 없었다.


지난 세월 묵혀둔 그리움이 한 번에 몰려와 나를 덮칠까 봐 그게 무서워서 홍대를 오지 않았던 것도 있다. 하지만 막상 와보니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내가 카페를 다시 나서는 그 순간까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소 지어 주시는 것 이외에는 다른 말씀이 없으셨고 영화 같은 데서 흔히 나오는, 같이 듣던 노래가 흘러나오는 일도 없었으며 당연하지만 그녀를 마주치는 일 따위도 없었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우리만 변한 그곳에서 나는 두 번 다시는 그 때로 돌아갈 수 없음을 더 똑똑히 실감했다. 이런다고 비어있는 맞은편 자리가 그녀로 채워지는 것도 아니고 지금 이 마당에 그녀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건 더더욱 아니다. 그럼 난 무슨 마음으로 여기 왔던 걸까? 청승도 이런 청승이 없다. 그럴 리 없겠지만 그녀가 본다면 한심하게 쳐다볼 것만 같아 혼자 무안해진 나는 서둘러 카페를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언제 또 이곳에 다시 오게 될까. 그때도 혼자 오게 될까. 그때의 마음은 지금처럼 혼란스럽지는 않을까. 혹시 누군가와 같이 오게 된다면 할머니는 나를 모 해주실까. 또 언제 이곳에 오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때의 마음은 분명 지금과는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 본다.




사실 헤어지고 나서 혹시나 마주칠 때를 대비해서 머리 속으로 시나리오를 작성해 둔 적이 있다. 냉정하게 무시하는 방법도, 간만에 죽마고우라도 만난 양 살갑게 대하는 방법도 생각해봤지만 세상은 그렇게 드라마틱하지는 않더라. 오히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SNS를 통해 본의 아니게 전 남친이나 전 여친의 결혼 소식을 접하게 되는 등 온라인을 통해 일방적으로 마주치는 일이 잦다. 그 때는 뭐라고 해줄 말도 없고 기분은 뒤숭숭하지만 그래도 한편으로는 잘 살고 있다니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시간이 지나서 여유로워진 탓일까.


이제는 신촌도 가고 홍대도 가고 수원, 사당, 종로 가리지 않고 다시 종종 다녀볼까 한다. 한때 내 영토였던 그곳들을 수복하고 분위기 좋고 조용한 단골 카페를 만들어 사장님들과 친분을 만들어 둘 것이며 맛집 database도 다시 구축해 놓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여나 과거의 그녀들과 마주친다면

긴 말 필요없이 한번 씩 웃어주고 돌아서리라.




https://youtu.be/PP0jPIdeRf0


[윤종신 - 모처럼]


모처럼 나와 보았네 아직도 익숙한 거리

그렇게 잊기 위해서 피해 다닌 골목골목 낯익은 가게들


모처럼 마셔 보았네 그때와 똑같은 잔에

하나도 바뀌지 않은 그 의자와 그 향기와 날 알아보는 주인까지


시간이 멈춘 걸까 여긴 모든 게 그대로인데

창가에 비친 내 얼굴과 맞은편 자리는


이젠 초라하게 변해 이곳은 어울리지 않아

마침 흘러나온 그때 그 노래를 다시 따라 해봐도

그저 내 목소리만이 무안하게 들려오네

비어있는 내 맞은편과 더 이상은 할 말 없어서

모처럼 나온 내 발길 돌리네


시간이 멈춘 걸까 여긴 모든 게 그대로인데

창가에 비친 내 얼굴과 맞은편 자리는


이젠 초라하게 변해 이곳은 어울리지 않아

마침 흘러나온 그때 그 노래를 다시 따라 해봐도

그저 내 목소리만이 무안하게 들려오네

비어있는 내 맞은편과 더 이상은 할 말 없어서

모처럼 나온 내 발길 돌리네


또 언제 나오게 될런지..

윤종신 8집 '헤어진 사람들을 위한 지침서'(2000.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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