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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그 사이

"난 네가 참 보고플 거야. 봄, 여름, 봄 이제는 안녕."

by 돌아보면

왜 불길한 예감은 꼭 현실로 이루어지는 걸까. 출근할 때 봉구가 크리넥스 각티슈를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 그걸 봉구 손... 아니 발에 안 닿는 곳에다가 치우고 나왔어야 했는데. 왜 나는 봉구가 얌전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내 조그만 원룸 안은 흡사 폭격 후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짱아는 늘 그랬듯 책상 위에서 이 모든 것을 지켜봤을 것이다. 지니는 얼마 전에 내가 던져다 준, 자기 맘에 쏙 든 단단한 상자가 티슈의 폭격을 정면으로 맞은 상태라 온몸으로 언짢음을 표현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티슈 폭격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 사실상 진범- 인 봉구는 자기 쿠션에 태연히 옆으로 드러누워 있다가 내가 문을 닫고 신발장 주변에 둘러 놓은 쪽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다. 너 빼고 다 니가 범인인 거 알아... 이 개ㅅ... 강아지야.


고향 집에 계신 부모님을 제외한, 나의 또 다른 가족을 소개한다. 포메라니안 봉구는 내가 혼자가 된 후 처음으로 기르게 된 강아지다. 한창 우울할 때 그래도 얘가 꼬리 흔들며 귀여운 척하는 걸 보면 그래도 마음이 나아져서 이름도 일부러 재미있게, 인간미 넘치는 걸로 지어줬다. 너무 오냐오냐해줘서 그런지 가끔 지가 이 집 주인인 줄 아는 것 같다. 물론 반란군에게 자비는 없으므로 지금은 벽 한쪽에 두 발로 서서 '똑바로 서라, 이게 너와 나의 차이다.'라는 형벌을 받는 중이다.


짱아는 지선이네 고양이가 새끼를 낳았대서 보러 갔다가 너무 귀여운 애가 있어서 내 심장이 함부로 나대는 바람에 지선이에게 소고기를 쏘고 분양받은 러시안 블루 고양이다. 얘는 되게 얌전한데, 가끔 보면 사람 같다. 집에 들어서서 봉구의 난을 진압하기 전, 나는 이게 누구의 짓인지 한번 더 확인하고자 짱아를 봤다. 짱아가 나를 잠시 본 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 - 사실 내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것 같다. - 300% 확률로 범인은 봉구다. 첫째 봉구 따라 한다고 가끔 지니도 난을 일으키지만 아직은 어려서 그런지 귀여운 수준이다. 지니가 그랬을 때의 짱아는 그래도 자기 동족이라고 내 눈을 피한다.


이걸 지선이한테 얘기했더니 지선이는 고양이가 괜히 영물인 줄 아냐며 짱아 흑막설을 제시한 적이 있다. 당연히 아니라고 웃어넘겼지만 평소 움직이는 걸 귀찮아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마저 짱아의 큰 그림이라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으니 그런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지니는 한 달 전 들어온 코리안 숏헤어, 그러니까 쉽게 말해 그냥 길고양이다. 우리 집에서 막내를 맡고 있다. 비가 엄청 오던 날 퇴근길에 원룸 입구 근처에서 흠뻑 젖어서 떨고 있는 걸 도저히 지나칠 수가 없어서 품에 안고 들어왔었다. 따뜻한 물로 씻기고 이불을 덮어 주고 페트병에 따뜻한 물을 담아서 옆에 놓아줬다. 처음의 시무룩한 모습은 어디 가고 활짝 웃으며 야옹거리는 걸 보면서 밤늦은 줄도 모르고 놀아주다가 그대로 잠들었었다.


흔히들 고양이와 강아지를 같이 키우려면 고양이를 먼저 들여와서 적응시킨 다음에 강아지를 들여오라고들 한다. 고양이나 강아지에 대해 좋아하기만 할 뿐 아는 게 많이 없어서 알아보니 그렇다고들 했다. 그런데 우리 집의 경우에는 정 반대로 들여왔는데도 불구하고 아주 잘 지내고 있다. 권력에 욕심이 없는 짱아는 가끔 수틀리면 봉구의 주둥이를 후려치는 걸 제외하고는 평화롭게 있으며 봉구는 권력을 휘두를 정도로 똑똑하지 않은 것 같다. 막내인 지니는 그래도 봉구가 첫째라고 봉구를 보면서 봉구처럼 행동하려고 하는 개냥이가 됐다. 조기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느낄 수 있는 부분이다.


이렇게 평화로운 삶을 살게 된 지는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2년 전 봄 오빠와 시작한 내 연애는 뭐랄까... 다소 성급한 건 있었지만 내 삶에서 그렇게 두근거렸던 시기가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강렬했다. 오빠와 하는 모든 것이 처음이었고 오빠와 함께라면 나는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진짜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장마가 시작되려는 6월의 어느 비 오는 축축한 날, 우리는 거짓말처럼 헤어졌다. 오빠의 핸드폰에 내 사진이 아닌 다른 여자의 사진이 많았던 것, 같이 살던 집에 오빠의 짐이 별로 없었던 것 등 모든 것들이 이 연애가 가벼운 연애였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가볍게 만난 거라는 오빠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 내 첫 연애였잖아, 이거.


비바람이 몰아치던 그날 밤, 나는 그렇게 혼자 남겨졌다. 방 안에 오빠를 추억할 물건이라곤 단 하나도 없었다. 그 와중에 긍정적인 척해보려고 '그래, 그런 게 있었으면 그걸 보고 생각이 나서 더 슬프지 않았을까?'하고 마음을 먹었었다. 추억할 물건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게 더 슬프다는 걸 금방 느끼게 되어 밤 새 펑펑 울고 말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원룸 방음도 잘 안 되는데 밤 새 그렇게 시끄럽게 한 - 여자 울음소리라 누군가에게는 무섭기까지 했을 것이다. - 나에게 한 마디 불평의 말도 하지 않아준 이웃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느끼지만 그때는 그런 거 생각할 정신이 없었고 너무 힘들었다. 마음도 텅 비었고, 집도 텅 비었다. 맨날 좁다고 투덜댔던 침대도 갑자기 넓게 느껴졌다. 대자로 누워있어도 공간이 남았다. 온 집안의 공기가 착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아 음악을 틀고 싶었지만 더 감성적이게 되어버릴 것 같아 그만두었다. 뭐라도 먹으면서 이 텅 빈 기분을 채워보려 해도 먹는 족족 그대로 토해버렸다.


그랬던 나는 지금 집에 도착해서 화장을 지우고, 씻고, 집 청소를 대충 하고서 침대에 아이들과 여유롭게 드러누워 있으면서 그때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봉구와 짱아, 지니가 아니었더라도 이별의 상처는 어떻게든 잘 극복했을 것이다. 그게 사람이니까. 다 그렇게 덮여지고 다 그렇게 지워지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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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시간이 더 지나게 되고,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된다면 지금보다도 더 흐릿해질 것이다. 그냥, 내 서툴렀던 첫 연애에 대한 어렴풋한 이미지만이 남을 것이고 몇 번의 만남과 이별 끝에 처음의 순수한 마음을 잃고 변하기도 할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어쩌면 처음을 그리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시절, 그 계절에 계속 머물러 있을 수는 없다. 시간의 흐름이란 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계절이 여러 번 반복되며 기억들이 서서히 지워진다. 잊고 싶었지만 잊고 싶지 않았던 봄은 가고 여름이 찾아오고 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사이에 서 있고 이제 새로운 발걸음을 옮기려고 한다. 뭐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걸어가 보려고 한다.


그러니 너도 어딘지 모를 그곳에서 잘 지내길, 안녕히.




마음이 망가져버리는 것은

언젠가 네가 나였기 때문이었고

그래서 내가 너이기 때문이야.


비록 그게 찰나의 순간이었을지라도.

그래서 남들에게 의미 없어 보였을지라도.


무심한 넌 미안해하지도 않겠지만 미안해하지 않아도 괜찮아.

예전의 아픈 기억들도, 추억들도, 앞으로 나아갈 희망도 모두 품어낼 만큼

나는 그때보다 조금 더 성장했으니까.



※ 코멘트의 첫 3줄은 1998년 작 일본 드라마 '세기말의 시'의 일부를 차용하였습니다.




https://youtu.be/mNoZd3z7hbI


[박지윤 - 봄, 여름 그 사이]


빛 나무 빛 그림자 사이

빛 구름 빛 그림자 소리

빛 바람 소리에 나뭇가지는 흔들흔들거리네

아스팔트 위에 아지랑이는 꼬물꼬물 거리네


봄 여름 그 사이에

너와 나의 사랑 얘기


빛 사랑 빛 눈을 감아요

빛 기억 빛 숨을 쉬어요

빗방울 소리에 우리 사랑도 희미해져 내리네

뿌옇게 번지는 가로등 불 아래 눈물만 차오르네


시간은 다 흐르고

다 그렇게 지워진다


나나나나 나나 나나나 나나나나 나나나

나나나나나 나나나나 나나나나나 나나나


빗방울 소리에 우리 사랑도 희미해져 내리네

뿌옇게 번지는 가로등 불 아래 눈물만 차오르네


시간은 다 흐르고

다 그렇게 지워진다


난 네가 참 보고플 거야

봄 여름 봄 이제는 안녕

박지윤 7집 '꽃, 다시 첫 번째'(2009.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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