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어떡해야 해. 이 사랑을 꼭 계속 해야 하니?"
"이번 주 토요일 큰집 간다고 했었지?"
"응 왜? 그때 말한 그 영화 보자고?"
"응. 그날 일찍 일어나면 혼자 보고 아니면 나중에 오빠랑 봐야겠다."
"그날 주말인데 뭘 일찍 일어나. 늦게 일어나서 나랑 봐 그럼. 할머니 이번 주에 못 오신대서 큰집 다음에 가기로 했어."
"아 진짜? 그럼 나야 완전 좋지."
"더 좋아하라고 예매도 해 놨다."
"그래? 그럼 보고 밥은 내가 살게. 간만에 북카페 가고 싶은데."
"주말이라 자리가 있으려나 모르겠다. 저번에도 자리 없어서 다른데 갔잖아."
"더워서 그래 더워서 요즘. 뭐... 조용한 카페면 어디든 상관없을 거 같아. 얼마 전에 책 몇 권 샀거든. 같이 보자. 오빠 좋아할 만한 걸로 가져갈께."
"그래.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항상 이렇지 뭐. 내일 일어나서 연락할게 잘 자 오빠."
"응. 잘 자."
지금 이 통화가 굉장히 사랑스럽게 보였다면 당신은 연애 경력이 길어봤자 2년 정도일 것이다.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만난 우리는 유년기와 사춘기를 모두 거치며 숱한 위기 속에서도 헤어지지 않았고 6년째 연애중이라는 영화가 2007년에 나왔을 때는 어떻게 사람이 6년 동안 연애를 하냐며 웃었지만 지금 우리는 12년째 만나고 있다.
아니 뭐, 싫다는 건 아니다. 방금 통화 내용 봤잖아. 상대가 어떻게 해야 할지도 다 알고 있고, 어떻게 하면 좋아하고 어떻게 하면 싫어하는지도 내 일처럼 꿰뚫고 있다. 서로를 이해하지 못 해서 헤어진다는 것은 우리한테는 있을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문제는 오히려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언제 어떤 일을 해도, 어떤 말을 듣더라도 '아, 그럴 만도 해. 그럴 것 같았어.'정도로 예상이 되어버리니 어느 순간부터 도무지 설레임이라는 게 없어졌다. 이건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냥... 복잡하다. 내 나이도 이제 마냥 적은 나이는 아니고, 내 친구들 중에는 결혼하는 친구들도 있는데... 아 물론 소영이랑 결혼하겠지. 살아온 세월이 몇 년인데. 집만 다르고 아이만 없지 지금 이게 부부랑 다른게 뭔데.
근데 뭐라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 든다. 그게 뭔지 알면 차라리 머리 복잡한 게 덜 할 텐데 그러지 않아서 요새 조금 혼란스럽다.
친구들은 말한다. 우리 커플이 너무 부럽다고. 주변에 눈을 씻고 찾아봐도 이렇게 오래, 잘 만나는 커플은 찾아볼 수가 없단다. 심지어 오빠가 못해주느냐고 묻는다면 또 그렇지도 않다. 방금 전 통화하는 거 봤잖아. 친구들한테는 얘기를 잘 안 한다. 말할 때마다 배 아파하니까.
물론 나도 싫지는 않다. 나랑 아주 잘 맞는다는 기분이 드니까. 그리고 싫었으면 이미 진작 헤어졌겠지. 싫진 않은데... 아 이걸 뭐라고 설명하지?
오빠가 나를 대하는 이 느낌이 뭐랑 비슷하냐면, 그런 느낌이다. 먹고 싶은 음료수를 먹으려고 자판기 안에 동전을 넣은 후 알맞은 음료의 버튼을 눌러서 음료를 뽑는 느낌이라고 하면 너무 설명이 장황한가.
간단히 말하면, 그냥 오빠는 내가 뭘 하고 싶은지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거다. 가끔은 나보다도 나를 더 잘 아는 것 같다.
그런 좋은 게 또 어디 있냐고? 거봐. 너도 이렇게 말하잖아. 내가 이래서 어디 가서 이야기를 못 한다니까.
되게 좀... 그래. 기계적인 느낌이야. 분명히 오빠는 웃으면서 말하고 친절하게 대해 줘. 알아. 고마워. 근데 막 공식 같은 게 있어서 거기에 따라 착착 맞춰서 대접받는 느낌이라서 정작 당사자인 나는 마냥 좋지는 못해.
근데 그렇다고 또 헤어지기는 싫고, 아 모르겠다. 일단 잘래.
"아 근데 자리 어디 했어?"
"왼쪽 뒤에서 두 번째 줄 사이드. 벽 쪽 두 자리. 뭘 매번 묻냐."
"나도 '어디'까지 말하면서 그 생각했어. 츄러스?"
"오늘은 그냥 커피. 큰 걸로."
"그래 나 아까 화장실 갔다 왔으니까 오빠 화장실 다녀와. 사고 기다릴게."
"영화 어땠어? 썩 맘에 들진 않았나봐?"
"아 너가 원작 소설 보라고 할 때 볼 걸 그랬어. 전체적으로 내용이 이해가 가긴 하는데 너무 생략한 게 많은 느낌이야."
"그랬어? 나는 그냥저냥 재밌게 보긴 했어."
"여자주인공 이쁘긴 하더라."
"그러게. 밥이나 먹으러 가자."
"순대국?"
"순대국 말고 순대국은 어때 오빠."
"내 생각엔 순대국 먹느니 순대국 먹는 게 더 나을 거 같은데."
"오빠 순대국 아니면 순대국 같은 것도 좋아하잖아."
"내가 항상 순대국 먹고 싶다고 할 때마다 너는 순대국 말고 순대국만 고집하더라. 진짜 어쩜 그래."
"음... 순대국이 좀 그러면 요새는 순대국도 많이 먹어."
"하긴 그래 누가 요즘 같은 때 순대국을 먹어? 급 안 맞게. 순대국 정도는 돼야지."
"아무래도 그래서 순대국보다는 순대국을 선호하는 게 있긴 해, 여자들은."
"그치? 너도 그대로다 참. 순대국은 그렇게 싫어하더니 순대국만 먹는다고 하면 좋아서 정신을 못 차리네."
"하... 오늘도 졌다. 몇 년 동안 한 번을 못 이기네."
"져주고 싶어도 뭐, 어지간 해야 져주지?"
"뭐라는거야. 이모! 여기 순대국 둘이요! 하나는 순대 많이!"
만난 지 12년째라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 잘 공감이 될지 모르겠다. 함께 가본 곳, 함께 본 영화, 함께 먹은 음식들은 어느 순간부터 기억에 남을 만큼 좋았던 것을 제외하고는 굳이 기억하지 않게 되었다. 어차피 폰과 SNS에 다 저장되어 있기도 했고 뭣보다 너무 많기 때문이다. 국내 여행지는 웬만하면 소영이랑 한 번씩은 다 다녀온 것 같다. 4년 전에는 독일 가서 꿈에 그리던 생맥주도 원 없이 마시고 취해 잠든 적도 있고 프라하에서는 코젤 생맥주가 너무 싸서 들이부었... 사실 더 많은데, 주정뱅이 커플처럼 보일 것 같으니 여기까지만 하겠다.
역시 방금의 대화를 보고 뭐야, 달달하잖아? 짜증나. 라고 느꼈다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당신은 연애 경력이 2년 미만일 것이다. 같은 만담도 10년 정도 하다 보면 남들은 어떨지 몰라도 우리에게는 별 느낌이 없다. 다른 사람들은 달달해 보인다고, 혹은 재미있다고 얘기하는 그런 대화들조차도 지루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는 말이다.
이 지루해지는 게 문제다 문제. 소영이도 가끔 지루해하는 모습이 보이는데 서로 그 점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문제 삼은 적 없다. 그런 건 어차피 순간이었고 곧 그런 모습은 사라졌으니까. 그리고 우리는 이내 그런 모습들을 '서로가 서로에게 익숙해져서' 그런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딱히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고 이상형을 물어보면 처음 보는 여자라고 대답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모르겠다 내 마음을.
할 일이 딱히 없어 일찍 만나 같이 쇼핑을 하며 옷을 같이 고르고 카페에 가서 잠시 쉬었다. 이런저런 어차피 서로가 다 아는 그런 얘기들을 잠시 하다가 배가 고파져서 좋아하는 걸 저녁밥으로 먹고 보고 싶었던 영화를 같이 봤다. 영화를 기다리면서 실없지만 익숙한 농담들을 함께 주고받는다. 영화를 본 후에는 영화 내용이나 배우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영화관을 나선다. 내일 출근만 아니면 맥주 한잔하고 헤어지겠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두 시간 반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시간도 늦었고 그냥 집에 가기로 하고 역 앞에서 헤어졌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문득, 이 모든 것들을 오빠랑 못 하게 되더라도 크게 상관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결혼이라는 계약을 통해 진작 묶였어야 했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기 때문에 어쩌면...이라는 희망을 서로가 갖지 않고 현실에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고, 언제부턴가 계속 반복되는 오빠라는 '일상'과 마주하며 사랑도 지루함 속에 묻혀버리게 된 것 같다. 그래, 지쳤다. 지친 게 맞는 것 같다.
오래된 연인의 식어버린 사랑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너무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열렬히 타오르는 건 아닌데 그렇다고 아주 차가운 것도 아니고, 싫으냐고 물으면 또 그건 아니란다.
사실은 다들 알고 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함께 하면서 내가 가장 나로서 있을 수 있는 건 그 사람의 옆이라는걸. 눈치 볼 필요도 없고 서로가 뭘 할지 말하지 않아도 알기 때문에 알아서 척척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굉장한 거라는 걸.
자기들만 빼고 다 아는 그 사실을 헤어짐 외의 다른 방법으로 이별 앞에 선 연인들에게 어떻게 알려줘야 할까. 그리고 우리가 그 대상이 됐을 땐 어떻게 깨달아야 할까.
지쳤다... 사랑에...
우리 사랑했던 날들 그리고 많은 약속의 말들
여기 끝을 향해 달려온 흐릿한 사랑의 조각들
다시 돌이킬 순 없겠지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끝난 듯이 우리 서로 아무 말없이
지루해져 버린 날들 표정 없는 얼굴
그 누구의 잘못을 떠나 어떤 이유도
되묻고 싶은 게 아냐 우리 어떡해야 해
이 사랑을 꼭 계속해야 하니
어떻게 어떻게 해야 다시 웃는 널 볼 수 있을까
내가 너무 사랑했던 너의 그 미소
이 사랑이 기억을 헤맬 때
우린 이별 앞에 서 있다
우린 서로 아무 말없이
이제 나의 대답만... oh 남은 것처럼
나를 기다리듯 바라보는 너
함께라서 너무 좋았던
함께라서 더 힘들었던
우리 사랑 얘기가 이별 두고 흐른다
울어 줄 수 없는 가슴으로
마지막 잔을 채워 본다.
아무 말도 없는 지금 조용히 흐르는
이 노래가 끝나면 난 일어 날 거야
그 잔을 비우고 나면 무슨 말이라도 해
안녕이라고 내가 갈 수 있게
무슨 말 어떤 이유로 이 사랑을 더 하자고 할까
이젠 너무 지쳐 버린 사랑은 그만
안녕히 서로를 위해서
우린 이별 앞에 서 있다
우린 서로 아무 말없이
이제 나의 대답만... oh 남은 것처럼
나를 기다리듯 바라보는 너
함께라서 너무 좋았던
함께라서 더 힘들었던
우리 사랑 얘기가 이별 두고 흐른다
남아 줄 수 없는 그 자리에 마지막 잔을 채워 두고
끝내 돌아서 널 떠나 버린 나
이 노래가 끝날 때까지도 난
우리 이별은 잘한 거야
항상 미안했던 맘이야
붙잡고 싶던 맘 난 욕심이었어
너를 사랑에 지치게 한 내가
너와 함께라서 좋았던
너와 함께라서 고맙던
슬픈 이별의 순간 난 추억에 젖어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 말 못하겠더라
잡아주길 바랬던 이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