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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춘사랑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땐 말할 수 있을까."

by 돌아보면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방학이다! 나는 개강 후 3월부터 지금까지 오늘을 위해서 살아온 것이다!! 졸업한 형들 누나들은 입을 모아 3학년 1학기가 가장 힘든 시기라고 했는데, 태어난 걸 후회할 정도로 힘들고 짜증 났다고 했는데 난 이겨냈다. 아주 잘 극복했어. 장하다 장해.


고생한 나에게 주는 상으로 한 일주일 정도는 친구들이 술 마시자고 불러도 밖에도 안 나가고 집에서 그동안 못 봤던 드라마나 영화들을 새벽까지 잠도 안 자고 몰아 봤다. 이재한 형사님이 되어 미래와 통신을 하기도 하고, 유아인이 되어 김명민과 정치적 암투를 벌이기도 했으며 새로운 등장인물이 나오기만 하면 얘는 언제 어떻게 죽을지 불안에 떨며 왕좌의 게임을 봤다. 자연스레 기상 시간은 늦어졌고 거의 매일 정오가 지나서야 눈을 떴다. 아아, 행복하다. 아무것도 안 하고 있지만 더더욱 격렬하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그날은 뭔가 이상했다. 쓰나미급 반전을 보고 충격에 휩싸인 나는 차마 다음 시즌을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왕좌의 게임 시즌 4는 내일 보기로 하고 컴퓨터를 끈 후 새벽 3시에 잠들었다. 그랬다가 깨어난 시간이 새벽 6시다. 뭔가 일어나자마자 스트레칭을 하고 침구류를 정리해야 할 것만 같은 시간이었다. 전역한지 한참 됐는데 대체 왜...?


이미 깨버린 잠은 쉽게 오지 않았고 나는 스마트폰을 양손에 장착하고서 몇 시간이고 침대가 나인지 내가 침대인지 모를 지경에 처해 있었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던 어머니가 장을 같이 보러 나가자고 했다. 평소에 이런 말 잘 안 하시는데 웬일인가 싶어 물어보니 들고 올 게 많단다. 역시... 간만에 외출도 좀 할 겸 알겠다고 하고 나갈 준비를 했다.


평소에는 매일 면도를 하니까 수염을 기른 내 모습을 볼 일이 없다. 그런 의미서 이번 일주일간의 수염 기르기는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발견할 수 있었던 아주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수염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술이 식기 전에 돌아온다던 미염공 관운장부터 해서 최근엔 영화배우 류승범까지 해서 많지만, 나는 그분들과는 아마 함께 할 수 없을 것 같다. 수염을 기르면 안 되는 얼굴이다, 이 말입니다. 면도날 상태를 보아하니 이대로 밀면 아플 것 같아 면도날을 갈아 끼웠다. 반듯한 새 면도날에 속절없이 잘려 나가는 내 일부들을 보고 있노라면 묘한 카타르시스 같은 게 느껴진다. 지금까지 이 모습을 본 사람은 우리 가족 외에는 얼마 전에 헤어진 선영이가 유일하다.


일주일은 아니었고 시험기간 때 한 4일 정도 면도를 안 했었는데 저녁 먹자고 하길래 도서관에서 어떡하지 하다가 그냥 그대로 나갔다. 보자마자 등짝을 맞았다. 후줄근한 건 시험기간이라 어쩔 수 없다고 쳐도 꼴이 이게 뭐냐고. 수염 때문에 깜짝 놀랐단다. 3년을 만나면서 봤던 모습 중 제일 무서웠다나. 뭐 이제 와서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고, 아예 싹 씻을까 하다가 어차피 다녀오면 땀이 날 테니 그때 한 번에 씻기로 하고 면도기를 대충 씻어 넣고 나왔다.


선영이는 우리 동네에 산다. 우리 동네라고 해봤자 완전 같은 곳은 아니고 걸어서 20분 정도 걸린다. 헤어지고 혹시나 마주칠까 봐 친구들 만나러 나갈 때도, 그냥 슈퍼를 갈 때도 항상 준비하고 나갔었는데 아직 한 번도 마주친 일은 없다. 3개월이 지나고부터는 주변을 두리번거리지 않게 되었고 6개월이 넘어간 시점부터는 별로 신경을 안 쓰게 되었다.



이쯤 이야기했으면 다들 알 것이다. 그래. 언제나 그렇지만 일은 항상 무뎌졌을 때 터지곤 한다.


일단 구경도 할 겸 어머니랑 마트를 한 바퀴 돌면서 간만에 수다를 떨었다. 살 것들을 하나씩 사면서 오다 보니 지하 1층 식품 코너에 도착했다. 마침 출출하기도 해서 시식코너를 돌자고 했는데 속이 별로 안 좋다고 하셨다. 그럼 근처에서 돌고 있으시라고 금방 먹고 가겠다고 하고 홀로 시식코너 쪽으로 향했다.


아까 대충 스캔한 결과 오늘의 시식 메뉴는 베이컨, 빵, 수제 소시지, 떡갈비, 두부였다. 소세지를 너무나도 사랑하는 나는 고민할 것도 없이 소세지 코너로 향했다. 오동통하게 구워진 저 소세지가 날 제발 먹어달라고 프라이팬 위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래, 금방 간다 가. 안 그래도 반찬용 소세지가 필요하다고 했으니 몇 개 집어먹고 사갈 생각으로 세 개 정도 먹었다. 이쯤이면 됐겠지 하고 이쑤시개를 버리고 아까 집어 든 소세지를 들고 돌아섰는데 내 옆에 선영이가 이쑤시개를 들고 있었다.


한 4초 정도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않고 서로 그대로 굳어 있었다. 소세지는 계속해서 날 먹어주세요! 제발요! 하며 지글지글 구워지고 있었지만 아까와는 달리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귈 때도 느꼈지만 얘는 정말 눈이 크구나. 근데 얘 왜 여기 있지? 같은 동네긴 하지만... 얘 왜 지금 이 시간에 여기 있어? 어떡하지?


머리 속에서 그 짧은 순간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선영이도 마찬가지였는지 얘는 심지어 들고 있던 이쑤시개를 떨어트렸다. 보아하니 나도 나지만 너도 오늘 방심하고 나왔구나. 티셔츠 목 늘어났다 지지배야. 안 씻은 건 뭐라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면도라도 하고 나온 과거의 나에게 작은 감사를 표하며 먼저 말을 건넸다.


"오... 오랜만이야."


"...응. 안녕."


"쇼핑 나왔구나?"


"응, 어머니랑."


"나도 어머니하고 나왔는데, 잘 계시지?"


"늘 똑같지 뭐."


"그래. 그럼 쇼핑 잘 하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후 나는 그대로 돌아서서 잰 걸음으로 어딘가에 있을 어머니를 찾았다. 예상대로 빵집 근처에 계셨다.


"아니? 속도 안 좋으시다던 분이?"


"응. 사놓고 이따가 집에 가서 먹으려고."


내가 먹을 걸 좋아하는 건 어머니를 닮은 것이 300% 정도 확실하다. 빵을 한 무더기 카트에 담은 어머니가 나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갸웃하셨다.


"근데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갛니?"


"어? 아 좀 빨리 걸어서 그런가 봐. 얼른 계산하고 집에 가요."


나는 어머니를 재촉하며 서둘러 마트를 빠져나갔다. 아까 선영이랑 있을 때도 빨개진 상태였을까. 곤란한데.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렇게 마주친 게 싫지는 않았다. 생각지도 못 해서 조금 놀랐을 뿐이지 오히려 반가웠다. 그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은, 가장 못생긴 타이밍에 서로 마주친 건 좀 그랬지만.


한때는 세상에서 제일 편하고 좋은 사이였는데 지금은 들고 있던 이쑤시개를 떨어트릴 정도로 불편한 사이가 된 것이 새삼 느껴져서 씁쓸한 마음도 들었다. 이 와중에 연락해볼 마음이 드는 내가 웃기다. 꽤 되긴 했지만 그렇게 헤어져놓고 이제 와서 뭘...


타짜에서 조승우가 그랬다. 손은 눈보다 빠르다고. 갈팡질팡하는 내 마음과는 달리 내 손은 이미 선영이의 연락처를 찾아 문자를 쓰고 있었다. 글쎄... 내가 왜 이러는지는 잘 모르겠다. 적당한 핑계를 못 찾겠어서 막 던진 거니까 눈이랑 문자랑 누가 빠른 게 무슨 상관인지는 문제 삼지 않기로 하자.


'잘 들어갔어?'


'그대로구나 너는ㅋㅋ'


'요새 뭐하고 살아?'


'아깐 깜짝 놀랐어..ㅋㅋ'


다양한 멘트 후보들이 입후보했지만 전부 낙선시켰다. 내 창의력이 이것밖에 안 되나? 이런 진부하기 짝이 없는 말들 외에는 생각해낼 수가 없는 건가? 하고 혼자 침대를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했다. 그러다 멍청하게도 실수로 '아깐 깜짝 놀랐어..ㅋㅋ'라고 씌여진 카톡을 보내버렸다.


게임 전문 캐스터 전용준 씨가 다른 해설자들과 함께 이구동성으로 '아~ 망했어요!'라고 외치는 게 머리 속에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우린 이미 헤어진 사이인데. 다시 만나서 뭘 어쩌려고. 어차피 또 그렇게 될 텐데...

혼자 머리를 잡아 뜯으며 자학하고 있던 찰나 핸드폰 진동이 느껴졌다. 선영이였다.


'나도...잘 지냈어?'


당장 내일의 일도 알 수가 없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물론 경험해서 알고 있는 '뻔한'일도 있지만 우리 삶에서 '언제나'라는 건 없다. 헤어졌던 사람들은 다시 만나봐야 또 헤어지게 된다고들 한다. 하지만 반대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결혼까지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려오고 있다.


우린 어떻게 될까.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멈춰버린 시간을, 멈춰버린 사랑을 다시 움직일 수 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지금 이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할까.


이런 걱정도 잠시, 나는 빠르게 답장을 보냈고 그날은 오랜만에 서로의 이야기를 하느라 늦게 잤다. 헤어진 그날은 잡지 않았지만 이번엔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우리의 추억도, 선영이에 대한 나의 마음도 아직 그대로라는 것도 느꼈다.




누구는 나에게 사람을 온전히 믿지 말라 말했고

누구는 젊을 땐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보는 거라 말했으며

누구는 그냥 가볍게 만나는 편이 상처를 받지 않는 방법이라 말했다.

누구는 헤어져도 다른 사람을 만나면 되니 괜찮다고 했고

누구는 헤어진 사람을 다시 만나는 건 쓰레기통을 뒤지는 일과 같다고 했으며

누구는 많은 경험을 해 봐야 하니 한 사람만 오래 만나는 건 손해라고 말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도, 갸웃거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항상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 하지만

흔히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란

그렇게 해서 얻어지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https://youtu.be/G8gsH5ghiAc


[코요태 - 멈춘 사랑]


오랜만이야

잠시 놀라며 건넨 인사 속에

한마디 남긴 채로 돌아서서 걷고 있는데

사실 반가웠어

하지만 어색해진 모습 속에

눈치 보며 망설여 아무 말도 못했어


다시 마주친 너와 나

조금 달라진 너와 나

사랑했던 우리 사이

추억은 아직 그대론데

보고 싶었단 뻔한 말

입가에 맴도는 그 말하지 못해 바보처럼

오래전 이별한 그날처럼 보냈어



기끔씩 생각했어 난

우연히 만날 너와 나

그래서 잠깐 하는 외출에도

혹시 몰라 단장을 하곤 했었는데

난 너무 놀라

바보같이 얼어버려 어쩔 줄을 몰라

이렇게 스쳐지나면 다시 못 볼지도 몰라

뒤돌아 그녈 잡아

하지만 날 볼까 고개도 못 돌리잖아


다시 마주친 너와 나

조금 달라진 너와 나

사랑했던 우리 사이

추억은 아직 그대론데

보고 싶었단 뻔한 말

입가에 맴도는 그 말하지 못해 바보처럼

오래전 이별한 그날처럼 보냈어



이별한 연인들은 또 끝난다는 말

어쩌면 우리 둘은 아닐지도 몰라

이렇게 다시 봐도 설레이니

나 그런 말은 안 믿을래

언젠가 우리 둘이 다시 만나면

너만을 사랑할게 너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땐 말할 수 있을까

사랑하자

멈춘 사랑 시간을 돌릴 수 있을까

혹시 만날 수 없대도

가끔 내 생각 날 때 한 번 웃어줘

못한 사랑 좋았던 추억으로 만나자


사랑해...


보고 싶어


사랑해...


늦지 않았어


사랑해...


기다릴게


사랑해

코요태 싱글 '멈춘 사랑'(2015.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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