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도 맑은 아침 예감이 좋아. 너를 만나는 오늘..."
나는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촉', 즉 예감이라는 걸 믿지 않았다.
살면서 내가 겪었던 좋고 나쁜 모든 일들은 결국 그렇게 될 일이었으니 그렇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왔다. 말하자면 나는 쓸데없는 추측 같은 걸 할 시간에 내 할 일을 먼저 하자는 주의다.
우연을 바랄만 한 상황에서도 우연을 기대하지 않았고 시험에서, 경쟁에서 내가 원하던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화를 내지 않았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삶의 방식이나 습관들이 하루아침에 뒤바뀌는 일도 없었다. 그렇게 나는 그냥 평온하게, 나의 삶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일 없이 얼마 전 25번째 생일을 맞았다.
"그래서 올해도 연애 생각이 없으시다?"
내 빈 잔에 맥주를 따라주며 정호가 물었다. 말을 걸며 무심하게 맥주를 따르는 것 같지만 매번 적절한 두께의 맥주 거품이 생기도록 예쁘게 따르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것이 본인은 극구 부인하지만 내 눈에는 다 보인다. 정호의 첫 아르바이트 장소가 술집이었다는 걸 떠올려 보면 인간의 성장에 있어서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다시금 깨닫게 된다.
"응. 때 되면 생기겠지."
"때는 지금 니 뒷목에 껴있는 거고."
"죽을래?"
"아니 살을래. 다른게 아니고, 소개팅 한번 해라 너."
"정호야."
"왜? 마음에 쏙 들고 막 내가 사랑스러워져?"
"지금까지 내가 안 한다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니가 바락바락 우겨서 그래도 몇 번 했잖아."
"... 그랬지?"
"다른 애들이 소개팅 하라고 하면 난 절대 안 해. 싫다는데도 나한테 끈덕지게 소개팅하라고 하는 너같이 근성 있게 미친놈이 없거든."
"그치 난 독보적이지. 그래서 너가 날 사랑..."
"그래서 그 결과가 어땠지?"
"...3슛팅 0골. 너한테 술을 세 번 샀지 내가."
"그런데 뭐? 소개팅?"
"아니 이번엔 진짜야. 그동안의 실패를 피드백 삼아 나 최정호가 야심차게 준비한 널 위한 맞춤형 소개팅이라니까? 촉이 딱 왔다고. 형 못 믿어?"
"어 못 믿어. 차라리 페이스북에서 유출픽 가지고 있다고, 사다리 타라고 광고 때리는 애들을 믿을래."
"아 제발. 내가 그 정도까지는 아니잖아. 속는 셈 치고 일단 사진이라도 먼저 좀 봐라 여기."
"아 됐..."
우리가 처음 알게 되었던 고등학교 1학년 때, 정호가 학교 매점에서 패스츄리 빵이랑 초코우유를 사준 이후 - 이후 친해지자마자 정호는 본성을 드러냈으며 졸업 때까지 그런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 8년 만에 정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사진을 보고 보고 또 봐도 계속 보고 싶었다. 이런 게 첫눈에 반한다는 건가? 가슴이 두근거렸다. 대학을 합격했을 때도, 군 입대 전날도 이런 느낌을 받지 못했었는데...
번호를 받고 여느 때처럼 연락을 시작했다. 시작은 예의 바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서로의 스케줄을 확인한 후 혹시 못 먹는 음식이 있나 물어보고 시간과 장소를 정했다. 보통 이 다음에는 연락을 안 하다가 전날 확인차 한번 더 연락하는 경우도 있고 쭉 이야기를 이어가는 경우도 있다. 만나서도 할 이야기가 떨어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후자였던 적은 대체로 없었고 나는 보통 필요한 말만 하고 연락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랬었는데...
번호를 받은지 5일, 만나기로 한 날이 바로 내일인데 나는 지금까지 계속 다현 씨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자기 전엔 안녕히 주무시라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잘 잤느냐고 인사를 하고 끼니 때마다 서로 밥 맛있게 먹으라고 주고받는다. 이야기를 끊으려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고 리액션도 훌륭했다.
그동안의 실패한 소개팅 때문에 정호를 구박했던 과거의 내 모습을 후회하며 갈 곳들과 입을 옷들을 정하며 문득 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살면서 내가 이랬던 적이 있었나 싶었다. 무언가에 기대하지도, 좋거나 나쁜 예감을 믿지도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이 좋은 예감을 믿고 싶어졌다. 마침 날씨도 그동안 계속 우중충하고 비가 내렸었는데 내일은 간만에 화창한 날씨라고 한다. 오전에 입금된 과외비를 확인하고 이미 기분이 좋은 상태였는데 날씨를 확인하고 나니 기분은 더더욱 하늘 위로 치솟았다.
그래.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 사람이지만 어느 순간 확 뒤바뀌어 버리는 것 또한 사람이지. 그냥 나한테도 그런 날이 온 것뿐이고. 삶을 대하는 방식이 바뀐다고 해서 내가 어떻게 되는 건 아니니까. 중요한 건 내가 첫눈에 반했다는 점, 다현 씨도 내가 그렇게 싫지만은 않은 것 같은 눈치라는 점이다. 그날은 발을 동동 구르며 입꼬리가 올라간 채로 침대를 뒹굴다가 어느 순간 스르르 잠이 들었고, 마침내 결전의 날이 왔다.
날씨는 화창했다. 신호등도 나를 응원하듯 막힘없이 나를 약속 장소까지 안내했다. 만나서 대화하는 것도 즐거웠다. 첫 만남의 어색함은 어쩔 수 없었지만 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색함은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에 묻혀버렸다. 맛집 블로그를 하는 친구에게 추천받은 식당은 진짜였고 인근의 괜찮은 카페도 함께 추천받았는데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좋아도 너무 좋았다.
식사 시간 치고는 이른 5시에 만났지만 어느새 여름의 긴 해도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이야기하다 보니 맥주 취향도 비슷해서 카페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맥주집으로 향해 맥주 한 잔까지 하고 다음을 기약하며 다현 씨를 택시에 태워 보내며 간만의 성공적인 소개팅을 마무리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잘 자라고 인사를 했다. 정작 나는 설레어서 잘 못 잤지만. 다현 씨는 어땠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날 밤 이미 향후 계획과 결혼 전 프로포즈 방법, 자녀 계획과 자녀 교육 방법까지 생각해보다가 잠들었다.
다음날이 토요일이라 간만에 실컷 늦잠을 잤다.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태양빛을 맞이하며 일어났다가 다시 잠들었다. 거의 정오가 되어서야 일어나 늘어지게 기지개를 켠 후 핸드폰을 확인했다. 핸드폰 게임 푸시 알림, 스팸 광고 문자, SNS 댓글, 좋아요 알림 푸시 알림, 그리고 카톡 몇 개가 와 있었다. 다현 씨가 일찍 일어나서 벌써 연락을 한 건가 싶어서 열어봤는데 다현 씨의 연락은 없었다.
단톡방의 의미 없는 카톡들 몇 개, 친한 건 아닌데 그렇다고 안 친한 것도 아닌 애매한 사이의 사람들이 보낸 게임 초대 카톡, 그리고 어제 잘 했냐는 정호의 메시지가 다였다. 그래. 토요일이잖아. 미인은 잠꾸러기라더니 다현 씨도 역시 잠이 많은 편이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 후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점심 먹을 준비를 하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다른 가족들은 다 일이 있어서 나갔는지 집에는 나 혼자였고, 나는 콧노래와 함께 어젯밤의 행복한 기억을 떠올리며 비엔나 소세지를 구웠다.
"이쁘게 따라라 살고 싶으면."
"아니... 아 진짜 이상하네. 내가 보기엔 분명히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내가 안 한다고 했지?"
"사진 보고 하겠다고 한 게..."
"닥쳐. 너 소개팅의 ㅅ자라도 꺼내봐 앞으로."
"아니 잠깐 근데 그렇잖아 내 말 좀 들어봐봐. 계속 얘기했다며. 만나서도 분위기 좋았다며."
"그냥 너랑 나랑 친구라서 예의 차린거랜다. 내가 계속 연락하니까 답장한 것뿐이고. 얘기가 안 통하는 건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잘 맞는다는 느낌도 못 받았대. 시간 낭비하기 싫으시댄다."
"걔가 직접 그렇게 말했어?"
"그렇게 똑 부러지는 분인 줄 나는 몰랐네. 내 카톡을 읽었는데 이틀이 지나도 답장이 안 오길래 연락해봤지. 그랬더니 좋은 분 만나셨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만나기 전 했던 행동들은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보니까 그렇게 대답하더라고. 미안하다고 하더라."
그날 나는 대낮부터 만난 정호에게 점심 식사, 커피, 맥주, 저녁, 2차 그리고 편의점 아이스크림 및 캔맥주, 맥도날드 상하이 스파이시 세트까지 얻어먹었다. 하지만 아무리 먹어도 먹어도, 며칠이 지난 지금도 뭔가 텅 빈 이 느낌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촉', 즉 예감이라는 걸 믿지 않는다.
내가 예감을 믿지 않는 건, 다른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둔하기 때문이다.
우리와 상호작용하는 일상생활 속의 모든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자기들의 의사를 표현한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게 좀 더 캐치가 잘 되는 사람들을 보고
예감이 좋다고들 하는 것 같다.
아무래도 나는 그런 류의 사람은 아닌 것 같다.
한동안 내리던 비가 그치고 유난히도 맑은 아침
예감이 좋아 너를 만나는 오늘
늘 맘에 안 들던 거울 속 내 얼굴 유난히도 예뻐 보여
느낌이 좋아 두근거리는 오늘 라랄라
너무나 기분 좋은 예감 속에 기분 좋은 상상 속에
설레이며 만난 넌
너무나 지루한 그 표정으로 지루한 그 단어들로
안녕이라 말하네
이렇게 보낼 순 없어 오늘만은 제발 이대로
이렇게 끝낼 순 없어 너무 예감 좋은 날
늘 지쳐 잠들던 나의 꿈속에 파랑새가 나타났어
아름다웠어 느낌이 좋은 오늘
너무나 기분 좋은 예감 속에 기분 좋은 상상 속에
설레이며 만난 넌
너무나 지루한 그 표정으로 지루한 그 단어들로
안녕이라 말하네
이렇게 보낼 순 없어 오늘만은 제발 이대로
이렇게 끝낼 순 없어 너무 예감 좋은 날
너무나 기분 좋은 예감 속에 기분 좋은 상상 속에
설레이며 만난 넌
너무나 지루한 그 표정으로 지루한 그 단어들로
안녕이라 말하네
이렇게 보낼 순 없어 오늘만은 제발 이대로
이렇게 끝낼 순 없어 너무 예감 좋은 날
오늘을 알고 있었어 너무 다른 너의 그 눈빛
이렇게 보내야 할까 너무 예감 좋은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