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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돌아보면 Nov 28. 2016

좋아보여

"지나갈게. 잘 가 너, 잘 지내야 돼."

"어휴 무슨 사람들이 이렇게 많아? 아무리 토요일이라도 그렇지."


"그러게. 하필 오늘 같은 날 에스컬레이터도 고장 나고."


"날도 추운데 집에나 있지 왜 다들 나와서 이 난리래."


  오늘은 동현과 은진의 100일 기념일이었다. 둘 다 직장인이라 평일에는 시간을 낼 수 없었지만 운 좋게도 그들의 기념일은 토요일이었다. 꼼꼼한 성격의 동현이 사람이 붐빌 것을 예상해 영화 예매도, 식당 예약도 미리 해 두었지만 백화점 에스컬레이터가 고장 나는 경우의 수까지는 예상하지 못 했다.


  영화 시간은 계속 다가오고, 엘리베이터 줄은 더디게 줄어들었다. 다행히 영화 시작 시간 10분을 남기고 두 사람은 겨우 엘리베이터에 마지막으로 탈 수 있었다. 탑승 후 정면으로 돌아선 동현의 눈이 조금 흔들렸다. 자신도 모르게 손이 조금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고 이내 문은 닫혔다. 의아하게 여긴 은진이 물었다.


"왜 그래 동현아? 무슨 일 있어?"


"아..."


"아는 사람 있었어? 인사를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말지 그게 뭐야."


"아니. 그런 게 아니고 가방 멘 손이 조금 불편해서. 사람 많잖아."


"그랬어? 난 또 뭐라고."


"응. 표는 내가 뽑아둘게. 화장실 들렀다가 같이 들어가자."




  하영이 이곳에 다시 오는 건 퍽 오랜만이었다. 일 년? 일 년 반?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한동안 이 일대는 발걸음을 끊었었는데 굳이 다시 찾아온 건, 이제는 마음 편히 이곳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 확신을 준 건, 저쪽에서 커피를 들고 다가오는 진석 덕분이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니 그냥. 잠이 덜 깼나 봐."


"아이고 우리 하영이 누님 체력을 내가 생각을 못했네."


"야! 죽을래?"


"알았어 알았어. 우리 하영이 우쭈쭈."


"..."


  자연스럽게 진석의 손에 얼굴을 찰싹 가져다 대는 자신을 보며 하영은 이제는 자신이 정말 괜찮아졌음을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진석과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하영이 문득 핸드폰을 보더니 진석에게 물었다.


"진석아 우리 몇 시 영화지?"


"3시 50분. 슬슬 올라가야지. 가자."


"커피가 애매하게 남았는데..."


"세 번 정도 입 대면 끝나겠다. 올라가서 버리면 되니까 지금 가자." 



  하영은 에스컬레이터를 좋아한다. 서서히 움직이는 주변 풍경을 높은 곳에서 여유 있게 바라보는 것이 좋다. 다른 층에 도착해서 발을 내디딜 때 발 뒤에서 살짝 밀어주는 그 느낌도 좋아한다. 그런데 오늘은 불행히도 백화점 에스컬레이터가 고장이었다. 직원들이 에스컬레이터를 열심히 고치고 있는 모습을 보며 하영은 어쨌든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다친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네. 걸어 올라갈 수도 없고 엘리베이터 타자."


"응? 7층인데?"


"나 오늘 힐 신었잖아. 나 업어줄 거야?"


"... 괜찮은 생각이다."


"뭐? 진짜?"


"아냐. 그냥 해 본 소리야. 저기 줄 서러 가자. 사람 많네."


  토요일이고, 시간대가 시간대이다 보니 사람이 많아서 엘리베이터를 두 대 정도 그냥 보냈다. 세 번째 엘리베이터도 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바로 앞의 커플을 마지막으로 엘리베이터가 가득 차 버렸다. 마지막 커플이 엘리베이터를 탄 후 돌아서서 정면을 바라보며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 있던 하영과 마주 보며 섰다.


  문이 닫히는 4초 남짓한 시간이 하영에게는 너무나도 길게 느껴졌다. 그것은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남자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남자가 뭔가 손을 들려고 한 것 같은데 그 모습까지는 자세히 확인하지 못하고 문이 닫혔다. 하영은 자기도 모르게 손에서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하영아 왜 그래? 괜찮아?"


"아... 응. 다음 주까지 완성해서 보낼 게 있어서 어제 무리 좀 했는데 피곤했나 봐."


"커피 다 먹고 난 후라 다행이다. 갑자기 컵 떨어트려서 놀랐잖아."


"응... 사방으로 안 튀어서 다행이야."


"아 이번 걸 탔었어야 했는데. 영화 안 늦겠지?"


"응..."


  진석은 하영에게서 컵을 받아들고 근처의 쓰레기통에 버린 후 다시 돌아왔다. 잠시 걱정스럽게 하영을 바라보던 진석이 물었다.


"하영아 괜찮아?"


"응? 응..."


"아까 커피 떨어트렸을 때부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응 그냥... 그래. 좀 피곤했었나 봐."


"그래? 영화 봐도 괜찮겠어? 피곤하면 다음에 봐도 되는데."


"아냐. 이거 보고 싶었던 거니까 보자. 나 진짜 괜찮아."




  2년이 조금 넘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하영이는 머리 색을 제외하고는 변한 게 없었다. 걸을 때도, 서 있을 때도 항상 오른쪽에 있던 것부터 깜짝 놀랐을 때 자기도 모르게 오른쪽 어깨를 뒤로 빼는 것, 긴장했을 때 살짝 웃으며 입술을 혀로 핥는 것까지 그대로였다. 문이 서서히 닫히고 시야에서 하영이가 사라지는 4초 남짓한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것들을 봐 버렸다. 헤어진 후 보고 싶었던 적이 참 많았는데 그때는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시간이 지나고 새로운 사람 만나면서 이제는 괜찮을 줄 알았더니... 그냥 그건 내 착각이었거나 자기합리화 같은 거였나 보다.


  하지만 괜찮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고 해서, 오랜만에 우연히 만났다고 해서 하영이에게 손을 뻗을 수는 없다. 지금의 나에게는 은진이가 있고 하영이의 곁에도 듬직해 보이는 남자친구가 있었으니까. 그냥 흔해빠진 전남친 / 전여친 목격담처럼 스쳐 흘려보내면 되는 일이고 그래야만 한다. 영화관 의자에 나란히 앉아 내게 반쯤 안겨 있는 은진이를 보고 있노라니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쓰레기 같았고, 죄지은 기분마저 들었다.


  광고는 어느새 끝났고 영화관의 로고가 화면에 커다랗게 띄워지며 영화의 시작이 임박했음을 알리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은진이가 고개를 들고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야. 왜 그렇게 나 뚫어져라 봐?"


"아. 이뻐서."


"내가 항상 말하지. 나 좀 그만 좋아하라고. 많이 좋아하는 쪽이 손해 보고 상처받는다니까?"


  그렇게 새침하게 말한 후 은진이는 나를 더 세게 꼭 안으며 내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래. 이런 은진이를 두고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 생각이 강하게 나면, 강하게 누르면 되니까. 괜찮을 거야. 다 지난 일이잖아.




  진석이를 만난 지는, 이렇게 내가 괜찮아진 지는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그동안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게 살았으니까. 한없이 무너져내려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가도 이내 마음을 다잡고, 그러다가 아주 사소한 것을 계기로 다시 엉망진창이 되는 생활을 반복했었다. 함께 다녔던 장소들이 참 많아서 그 장소에만 가면 생각이 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행동반경도 좁아지게 되었다. 진석이의 고백을 받았던 순간조차도 동현이와 처음 사귀기로 한 날이 떠올라 순식간에 감정이 복받쳐올라서 한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자기가 고백했는데 전 남친이 생각나 울어버린 이런 나를 이해해주고 변함없이 지금까지 아끼고 좋아해 준 게 진석이다.


  그래서 사귀기 시작한 후 조심스럽게 대할 줄 알았는데, 그 반대였다. 누가 연하 아니랄까 봐 만날 때도, 그냥 연락할 때도 시도 때도 없이 장난 일색이었다. 문득 그건 진석이 나름대로 나를 위로해주는 방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도 조금 더 마음을 열고 진석이를 받아들였던 것이 얼마 전의 일이다.


  그런데 방금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동현이와 눈이 마주쳤다. 공들여 쌓고 중간중간 보수도 해서 오랫동안 쌓아올린 견고한 고성에 폭격을 맞았다고 하면 지금 내 마음을 그나마 이해가 쉽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얼음만 남은 일회용 잔을 놓친 것도 마음의 동요가 흘러넘쳐 밖으로 쏟아져 나온 것 같다.


"어제 몇 시간 잤길래 그래?"


"음... 세 시간 정도?"


"뭐? 아니 아무리 마감이라도 그렇지. 그냥 지금이라도 다시 나갈까?"


"아냐. 밤까지 계속 있다가 밤에 잠드는 편이 나을 거 같아. 나 괜찮아."


"안 괜찮으면서 뭘 괜찮대. 휴... 알겠어. 오늘은 집 앞까지 데려다줄게."


"응... 고마워 진석아." 



  그렇게 광고 시간이 끝나고 영화가 시작되었지만 나는 여섯 줄 남짓 앞에 앉아있는 익숙한 뒷모습을 신경 쓰느라 영화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마지막에 너를 한 번 더 잡았다면

지금 우린 어땠을까




https://youtu.be/pZ6xuFE9F4A


[버벌진트 - 좋아보여(Feat. 검정치마)]


강남대로 앞, 신호대기중인 차

창문너머 보이는 너, 무심코 인사

건넸지만 아차, 우리는 헤어진 사이

딱 2초간 멍하니 쳐다보다

시선을 돌린다. 추스린다 내 놀란 맘.

지나가는 사람들 이상하게 쳐다본다 막.

근데 있잖아, 너도 날 보고 그 자리에

바위가 된 듯, 굳은 채 가만 있네.

정리하기로 결심했던 내 맘이 왜

휩쓸리고 흔들리고 날 못 살게 하는데

신호 바뀌네 이제 나 출발해야돼.

지나갈게, 잘가 너. 잘 지내야돼.


좋아보여, 잘 지내나봐

hairstyle도 바꿨네 역시 태가 나.

예쁜 얼굴이니 뭘 해도 어울리지.

정말로 걱정 많이 했어 나 솔직히.

아플까봐, 힘이 들까봐

나보다 훨씬 많이 슬플까봐

근데 좋아보여. 

내가 바보였나봐



좋아 보여. 내가 바보였나봐

네가 혹여 이별 못 견딜까봐 걱정했는데. 

이렇게 우연히 막상 너를 보니까 내 맘 놓여.

시선이 다시 돌아가 인파 속에서 널 찾아냈지 

근데 네 곁의 새 남자.

그 때 내게 얘기했던 바로 그 사람인가봐.

그 땐 불행하길 바랬지만 지금은 달라.

행복해야돼. 알지 진심인 거?

그도 알겠지 네가 특별한 감성을 지닌 거?

페달을 밟고 가야하는데 왜 나는

발이 움직이지 않을까?

페달을 밟고 가야하는데 왜 나는

발이 움직이지 않을까?

페달을 밟고 가야하는데 왜 난 

움직일 수 없을까?


좋아보여, 잘 지내나봐

hairstyle도 바꿨네 역시 태가 나.

예쁜 얼굴이니 뭘 해도 어울리지.

정말로 걱정 많이 했어 나 솔직히.

아플까봐, 힘이 들까봐

나보다 훨씬 많이 슬플까봐

근데 좋아보여. 

내가 바보였나봐



green light is on, so its time to go.

하지만 갈 수 없어 널 그냥 두고.

경적소리가 들려, sayin I gotta move.

하지만 이게 마지막인 것 같다구...

green light is on, so its time to go.

하지만 갈 수 없어 널 그냥 두고.

경적소리가 들려, sayin I gotta move.

하지만 이게 마지막인 것 같다구...



좋아보여, 잘 지내나봐

hairstyle도 바꿨네 역시 태가 나.

예쁜 얼굴이니 뭘 해도 어울리지.

정말로 걱정 많이 했어 나 솔직히.

아플까봐, 힘이 들까봐

나보다 훨씬 많이 슬플까봐

근데 좋아보여. 

내가 바보였나봐

버벌진트 정규 4집 'Go Easy'(2011.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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