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신 이 길의 끝엔 나를 맞이할 그대..."
※ 이번 이야기는 2부작으로 나누어 쓰겠습니다. 다음주 중 가능한 빨리 업로드 예정입니다.
이걸 운이 좋다고 표현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20대 초중반의 나는 운이 좋아서 주변의 다른 친구들보다 많은 연애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제는 별로 내 삶에서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이라 누구랑 만났었냐고 물어보면 다 기억하진 못하지만,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도 눈에 선할 정도로 그리운 사람이 있다.
글에서는 H라고 칭하려고 하지만, 당사자인 H가 이 글을 본다면 알파벳으로 가린 것이 무색할 만큼 이것이 본인의 이야기임을 단번에 알아챌 것이다. 아마 네가 이 글을 볼 일은 없겠지만.
2011년 3월,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로 임관하여 군대에 갔다. 약 6개월 전에 처음 알게 된 H와 거의 매일 연락을 주고받던 그때의 나는 H에게 푹 빠져 있었고 노력(?)끝에 결국 주말에 데이트 약속을 잡게 되었다. 당시의 나는 '모름지기 장교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며 아래 사진과 같이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고, 평일 일과시간 이후 스마트폰을 통해 몇 번이고 데이트 코스를 돌아보며 그 날을 준비했다.
곳곳에 숙지, 차선책, 용모점검, 탑승, 환복 등의 몹쓸 군대 용어가 먼저 보이고, 상단에 결명자차 이야기가 있는데 H가 눈이 아프다고 해서 준비해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간 단위로 움직여야 해!'라는 장교병에 걸려 있었으므로 나는 못 쓰는 글씨로 굳이 저 조그만 수첩에다가 연애 못 하는 숙맥마냥 저렇게 적어뒀다고 조심스럽게 변명해 본다.
그래서 어떻게 됐냐고? 뭐... 계획은 나쁘지 않았다. 연극은 워낙 평이 좋은 작품이었고 밥도 H가 먹고 싶어 하던 곳으로 가기로 했었으니까. 다만 난 두 가지를 고려하지 못했는데, 첫 번째는 그날 거짓말처럼 폭우가 쏟아진 것, 두 번째는 H의 갑작스러운 몸 상태 악화를 생각하지 못한 것이었다. 연극을 보고 난 뒤 H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해서 일찍 집에 돌아가는 바람에 그동안 다소 유난스러웠지만 열심히 준비했던 계획들은 그대로 휴지조각이 되었고 나는 얼굴에 '망했어'라고 새긴 채 부대로 복귀하게 되었다.
그 후 H와의 연락은 뜸해져서 자연스럽게 흐지부지되었고, 나는 속상해 할 겨를도 없이 초등 군사반 교육을 마치고 자대 배치를 받아 새로운 곳에서 군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던 내가 다시 H를 만난 것은 그로부터 약 1년 3개월 후였다.
만나기 몇 개월 전 SNS를 통해 다시 연락이 닿았고, 스마트폰을 산 지 얼마 되지 않았던 H에게 이런 것도 모르냐며 이것저것 가르쳐 주는 것을 핑계로 매일 일상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만남 이야기로 넘어갔으며, 결국 7월 13일 금요일 퇴근 후 홍대에서 만나기로 했다.
상황이 안 좋았다. 하필 그날 있었던 작업이 늦게 끝나서 부대 복귀가 늦어졌었고, 포대장님은 간부 회의를 끝낼 생각이 없어 보였으며 심지어 나에게 뭔가 일을 맡기시려는 눈치였다. 내가 일주일 전부터 오늘 약속이 있다고 귀에 못이 박이도록 말씀드려서 '포대장님!'이라고만 말해도 '그래 너 금요일 약속!'이라는 대답이 돌아올 정도였는데도!!!
불안감은 현실이 되어 나는 오늘 남은 시간을 다 투자해도 다 못 끝낼 미션을 받았다. 아 몰라 모르겠고 어쨌든 중요한 것은 이제 회의가 끝났다는 사실이다. '주말에 나와서 하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경례를 한 후 재빠르게 짐을 챙긴 나는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숙소까지 논스톱으로 달려갔다. 무슨 정신으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문산에서 홍대까지 왔는지는 지금 잘 기억이 안 나지만 어쨌든 중요한 것은 정말 오랜만에 H를 만났다는 것이고 누가 봐도 군인인 나에 비해 H는 처음 만났던 그 날과 변함없이 예뻤다는 점이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그날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술집에서 꾸벅꾸벅 조는 나를 보고도 별말 없이 깰 때까지 기다려 준 H였으니.
그리고 그로부터 3개월이 지난 10월 7일, 우리는 연애를 시작했다. 알게 된 지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그동안 각자 다른 사람을 만나기도 했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함께라는 사실이었다. 예전에 읽었던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나오는, '그렇게 될 일은 결국 그렇게 된다'라는 말이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처음 만난 그 날, 폭우가 내리던 망해버린 데이트 날, 다시 만난 날 모두 행복한 지금을 위해서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제 시작이다. 과정이야 어쨌든 우리의 연애는 시작되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앞으로 우리들의 앞길에는 행복만이 있을 것 같다는... 흔해빠졌지만 당시에는 그렇다고 느끼지 못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나서는 발걸음 귀엔 네가 줬던 노래
네게로 가는 버스 한켠 내 몸을 실었네
창 너머엔 각자의 사연들 북적이는 거리
눈이 부신 이 길의 끝엔 나를 맞이할 그대
어떤 하루가 지금보다 더 필요할까
이 순간 난 다시 태어난거야
그대와 나의 이 노래처럼 오늘의 저 태양처럼
나는 너를 사랑해
언제부턴가 홀로 걷는 길 낯설은 거 같아
그댄 그렇게 어느새 음- 내가 되었네
나도 모를 나만의 이야길 들려주고 싶어
네겐 모든게 어색한 날 너는 알고 있을까
어떤 하루가 지금보다 더 필요할까
이 순간 난 다시 태어난거야
그대와 나의 이 노래처럼 오늘의 저 태양처럼
나는 너를 사랑해
어떤 하루가 지금보다 더 필요할까
이 순간 난 다시 태어난거야
그대와 나의 이 노래처럼 오늘의 저 태양처럼
나는 너를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