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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콜

"철이 없던 시절의 연극, 이젠 막을 내렸으면 해."

by 돌아보면

너를 다시 본 건, 그날 이후 6개월이 지난 후였다. 시간은 제법 흘러 나는 완전히 괜찮아졌으며 노래 가사에서 으레 그렇게 이야기하듯 '너 없이도 잘 살 수 있게' 되었다. 아니, 굳이 내 삶에서 너라는 존재가 더는 필수요소가 아니게 되었다고 표현하는 게 더 낫겠네.


처음 소개팅에서 널 봤을 때, 네가 인사하며 다가왔을 땐 가슴이 두근거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관계가 급 진전되어 사귀게 될 때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한 달 만에 헤어지자고 했을 땐 어안이벙벙했으며 시간이 지나고 현실을 받아들이게 되자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나중에는 화가 났지만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은 내 앞에 마주한 너를 봐도 아무 생각이 없다. 왜냐하면, 아무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네가 뭐라고 한참 이야기한 것 같긴 한데, 솔직히 뭐라고 했는지 잘 안 들어서 모르겠다. 대충 뭐 처음에는 자기가 어리석었다, 내 생각이 자꾸 났었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 등의 말들을 한 것 같은데 디테일한건 잘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고.


말을 마치고 너는 잠시 내 무심한 표정을 보더니 내게 조금 더 다가오며 - 물론 난 그만큼 뒤로 몸을 피했다 - 말했다. 사랑했지 않냐고. 그렇게 쉽게 사라지는 감정이 아니지 않냐고. 그럼 니 맘대로 왔다 가는 건 사랑이냐는 말이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고 그녀는 뒤통수라도 맞은 표정으로 한동안 멍하게 있었다. 뭐... 원래 팩트란 건 묵직한 법이라지.

이내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속지 않는다. 저 눈물은 나 때문에 슬퍼서 우는 것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걸 뭐라고 비유해야 되나. 백화점 완구 코너에서 자기가 원하는 장난감 안 사준다고 떼쓰며 우는 어린애의 눈물이 지금 저 눈물과 가장 흡사할 것이다. 마음이 움직이긴 했다. 미안한 쪽이 아니라 통쾌한 쪽으로.


문득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서 오버워치나 더 할걸. 그녀는 마치 뻔한 드라마 대본을 어설프게 읽는 편견 속 아이돌 출신 배우 같았다. 여기 오면서 예상했던 키워드를 포함한 말들이 하나씩 그녀의 입에서 나올 땐 기묘한 쾌감마저 느껴졌지만, 그것도 이내 지루해졌다. 무슨 얘기를 하자고 그러는 걸까 궁금해서 온 것도 있지만, 역시나 특별한 건 없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열연(?)을 펼치며 우리의 재결합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와중에 시간은 참 빨리 흘렀다. 어느새 나오기 전 겸사겸사 예매해 두었던 영화 시간이 다 되어서 나는 이만 가보겠다고 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하는 것은 꼭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지만, 아마 나는 뜻대로 하기 힘들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만나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부른다고 나갈 일이 없을 테니까. 이쯤 했으면 더 부르진 않겠지만. 어디서 누구를 만나 잘 살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니 두 번 다시는 보지 말자는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의 면전에다 쏘아붙였다.


'야 이 개새끼야!'라고 소리치는 그녀의 고함소리를 여유롭게 한 귀로 흘리며 나는 카페를 나섰다.

연극이 끝난 후 관객의 환호와 박수 소리에 화답한 후 퇴장하는 연극배우처럼.




https://youtu.be/ziiXmXydf5I


[9와 숫자들 - 커튼콜]


1막은 봄날의

공원 벤치에서 시작됐어요

꽃내음 배인 첫 대사에

색종이 나비가 날았죠


잠깐의 암전 후

불길한 정적이 흐른 뒤에야

깨달았죠 난 이 작품은

로맨스가 아닌 모노드라마


전개 위기 절정 간데없고

발단과 결말뿐인 만남

긴장도 준비도 허락하지 않는

단도직입적인 급반전


내가 언제 나를

사랑해달랬나요

니 맘대로 왔다 갔잖아

한땐 내가 울었는지 몰라도

지금 우는 것은 너잖아


이제 와서 다시

감정 몰입해봤자

니 맘만 더 아파올 거야

철이 없던 시절의 연극

이젠 막을 내렸으면 해



따분한 너의 파우제 속에

감춰진 속내를 난 알아

수척해진 얼굴 젖은 눈가 모두

임기응변식의 분장술


내가 언제 나를 사랑해달랬나요

니 맘대로 왔다 갔잖아

한땐 내가 울었는지 몰라도

지금 우는 것은 너잖아


이제 와서 낡은 대본을 펼쳐봤자

나는 하품만 나오거든

어설프게 꾸민 너의 무대

다신 올라가지 않을래


내가 언제 나를 사랑해달랬나요

니 맘대로 왔다 갔잖아

한땐 내가 울었는지 몰라도

지금 우는 것은 너잖아

지금 우는 것은 너잖아

지금 우는 것은 너잖아

지금 우는 것은

9와 숫자들 정규 2집 '보물섬' (2014.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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