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냈으면 해. 오늘 그댄 더욱 아름다워 보여."
나이가 나이다 보니, 그동안 만났던 사람이 적었던 것도 아니다 보니, '전 여친'의 결혼 소식은 이제는 그리 놀라운 이벤트가 못 된다. 드라마나 영화, 노래 가사에 나오는 그런 이야기들을 굉장히 드라마틱하고 절절하게 여겼던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하도 여기저기서 듣다 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무덤덤해졌다. 내 일일 때도 그렇고 남의 일일 때는 더더욱.
'그 일'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알게 된다. 길에서 웬 남자와 함께 유모차를 끌고 가는 걸 본다든지, 친구의 입을 통해 듣게 되는 경우도 있고, 요즘 다들 간소화 간소화 외쳐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모바일 청첩장도 한 번 받은 적이 있다. 실수로 보낸 거겠지 하고 눌러보지도 않은 채 대화창을 삭제했었는데, 추가로 더 연락이 안 온 걸로 봐서는 실수가 맞았던 것 같다. 그 친구 나랑은 참 안 맞았었는데 그래도 인성 하나는 정말 좋았었으니까 이제와서 날 엿먹일 생각은 없었을 거다. 아마도?
아무튼, 그렇다. 당장 내일, 아니 잠시 후도 알 수 없는 우리의 삶 속에서 '전 여친 결혼식'은 유쾌하진 못할지언정 이제는 더 이상 내 일상을 들었다 놓았다 할 만큼 특별할 것 없는 이벤트 중 하나라고 여겼다. 분명히 그랬었다.
너와 헤어진 지도 어느덧 4년 차에 접어들었다. 아 물론 해바라기마냥 멍청하게 연애도 안 하고 너를 그리워했냐고 묻는다면 조금도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거다. 너를 잃은 허전함, 그게 내 잘못으로 인해 생긴 일이라는 죄책감, 그래서 두 번 다시 만날 수가 없게 되었다는 무력감, 그럼에도 너를 보고 싶어하는 그리움 같은 것들이 내 안에서 뒤죽박죽으로 엉켜버린 와중에 날 지배했던 감정은 외로움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다른 감정들의 크기가 작았던 건 아니어서 지금처럼 누군가를 만날 때도 그러지 않을 때도 요 몇 년간 내 마음은 엉망진창이었다.
그... 보려고 본 건 아니었다. 주말이라 쉬는데 수정이가 친척 모임에 간다고 해서 약속도 없이 침대에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하고 있던 참이었다. 주말인데 일찍 눈이 떠지는 불상사가 발생해서 그날 볼 웹툰도 다 봤고 관심 있는 뉴스까지 다 봤다. 그런데도 시간이 한참 남아서 카톡 친구 목록을 천천히 내리며 목록에 있는 친구들 프로필 사진들을 하나씩 눌러보고 있었다.
길고 긴 ㄱ을 넘어 ㄴ을 거친 뒤 ㄷ에 다다랐다가 금방 ㄹ로, 이윽고 ㅁ마저 지나쳐 버렸다. 내가 할 일이 정말 없긴 없나보다 하는 생각이 스물스물 들어서 이 짓도 질려갈 무렵 한 프로필 사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가장 먼저 보였던 건 듬직해 보이는 남자와 손을 잡고,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언젠가 내게 보여줬던 미소보다 더 환하게 웃고 있는 너의 모습이 담긴 카톡 배경이었다. 흑백사진이고 화질이 좋은 편이 아니었음에도 네가 있는 부분만은 또렷하고 밝게 보였다. 황급히 취소 버튼을 누르려고 했는데 끼고 있던 이어폰 줄이 화면에 닿아서, 카카오톡을 끄는 대신 프로필 사진이 눌려버리고 말았다. 이어폰 줄로도 터치가 된다는 사실에 놀랄 정신도 없이 순식간에 너의 사진이 4년 만에 다시 내 핸드폰 화면을 가득 채웠다.
드레스샵의 수많은 드레스를 배경으로 돌아선 너의 뒷모습과 옆얼굴이 바로 보였다. 아무리 봐도 네가 입은 드레스보다 예쁜 드레스가 없었다. 아니, 네가 입었기 때문에 예쁜 거겠지. 한 곳을 지그시 바라보며 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리고 나는 어쩌자고 네 사진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까?
이윽고 정신을 차린 뒤, 다시는 그 사진을 눌러보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한 것이 무색하게 이후에도 나는 몇 번이고 너의 사진을 계속 봤다. 상태 메시지에 씌여진 날짜는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고, 알아보려 한 건 아니었는데 어쩌다 보니 예식장까지 알아버렸다. 마치 온 우주가 그 결혼식장에 가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 결혼식장에 갈 생각이 없다.
사실은 엄청 가고 싶다. 다 떠나서 그냥 아무것도 안 하더라도, 아무것도 못 하더라도 보고 싶다. 그렇지만 그래 봐야 좋을 게 없을 거다. 너의 부모님, 언니, 친구들은 당황할 것이고 크든 작든 너의 결혼식에 폐가 될 것이다. 그러니 가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갈 생각은 조금도 없다.
나한테 있어서 넌 정말 특별한 사람이었지만, 그래서 묻어두는 게 조금 더 오래 걸리겠지만... 아니...아니다.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니.
가서 예쁘게 잘 살아.
갈게.
안녕.
누구나 양팔로 소중한 걸 감싸 안고 있다.
문제는, 안고 있을 때는 그 소중함을 모른다는 것.
양팔에서 전부 떨어지고 나서야 그 무게를 깨닫고
두 번 다시는 이런 걸 가지지 않겠다고
수도 없이 생각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또 짊어질 것을 찾아 팔을 휘젓고 있다.
언젠가 또 다른 것을 감싸 안고 살아가게 되겠지.
그래도 가끔 널 안고 있던 그 날들이 떠올라서
그땐 괜히 하늘 한 번 쳐다보게 될 것 같아.
가지 말걸 그랬어
가지 말았어야 했어
니 결혼식
진짜 오해는 하지마
너를 당황시키려는 못된 맘이 있었거나
이 결혼 무효야
괜히 훼방 한 번 놓으려고 간 거는 아니니까
너무 빠른 거는 아닙니까
묻고 싶었던 거는 아십니까
허나 티내진 않을께
어쨌든 축하해야 하는 날이니까
사실은 말야 어제 저 멀리
거제도나 훌쩍 떠나 술에 쩔어야지
낡은 서재에서 너를 저주해 하다 잠들었다 깨서 보니
첫째 아니 내가 왜 도망가
둘째 과연 죄진 것이 난가
셋째 어떤 놈의 도둑장가 대체 그래 얼마나 행복한가
도대체 어떤 놈을 만났는지 궁금한데 거길 왜 안가
근데 은근히 신경 쓰여 뭘 입어야하지
편하게 입자니 빈티나지
정장바지 입자니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이건 너무나 쪽팔려 내 맘 한구석에선 가지 말라 말려
쪽팔려 날 말려 쪽팔려 다시 말려 내 맘 두개로 갈려
너와 아무 상관없는 옷들은 단 하나도 없는 것만 같고
뭘 입어도 괜히 기가 죽는 가슴은 답답해
터질 것만 같고 화가 막났다가 다시 내가 못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후줄근한 청바지에 낡은 컨버스
그리고 다가오는 결혼식장으로 가는 11번 버스
수많은 생각들에 감았던 두 눈을 다시 떠 바라본 곳엔
눈부신 드레스 쳐다볼 수 없어 Can`t believe my eyes
잘 지냈으면 해 오늘 그댄 더욱 아름다워 보여
더 할 말이 없어 갈께 안녕
그래 어느 날부턴가 갑자기 니가 연락이 안된다던지
친구하나 이 날까지 소개하지 않더라 어쩐지
것도 모르고 난 가끔가다 내 귀에 속삭였던
오빠 나 영원히 오빠꺼야 라는 말들을 순진하게 믿었잖아
그래 난 인정해 내 앞날이 캄캄한 것과
그저 난 걱정했네 오늘은 너랑 뭐를 해볼까
병신 인증 크리 제대로 길이 꽉막힌 도산대로
게로 게로한 나의 능력은 제로
완전히 망가진채로 비참한 감정만 이미 두 배로
웨딩마치 너가 머릴 딸 때부터 꿈을 꿨겠지
바로 나같이 허접한 놈을 상상하진 않았겠지
어서 나를 떠나 가라고 내가 가진 거는 이게 다라고
크게 말하고 이게 나라고 이거밖에 안되는게 바로 나라고
그러니까 사랑만하면 행복할 줄 알았던 게
결국 사랑하는 사람의 결혼식에 불청객
찌질한 못난이 왜 가까워지니 겁나니
난 발이 떨어지지 않는 바로 너의 결혼식장 앞에
차마 들어가진 못하고 젠장 기분만 좆같애
수많은 생각들에 감았던 두 눈을 다시 떠 바라본 곳엔
눈부신 드레스 쳐다볼 수 없어 Can`t believe my eyes
잘 지냈으면 해 오늘 그댄 더욱 아름다워 보여
더 할 말이 없어
갈께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