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스한 날들의 끝

by 김경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은 글을 쓰게 만드는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 그 마음이 크면 클수록 더.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데엔 부끄러움이 있었고,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볼 땐 그 대상이 누구인지 모르게끔 글을 썼다. 화가들과는 다르게, 글을 쓰는 사람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남겨진 글들을 보면 (특히 시라고 생각하며 적은 그 무언가) 상대방의 이미지가 모호한 경우가 많았다. 나만 해석할 수 있는 암호, 깊이 숨겨둔 일기장처럼. 그 당사자가 봐도 ‘이게 나를 생각하고 쓴 거야?’라고 물을 만큼. 한 번도 그 당사자에게 글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어둠의 사춘기가 지나고 파도치던 마음도 많이 가라앉을 나이가 되었다. 어둠보다 빛바랜 잿빛의 청장년. 우연히 친구 커플과 함께하는 식사자리에 나갔다가, 나 말고 한 명 더 초대된 그 사람을 알게 되었다. 전에 그 친구가 주선했던 크리스마스 홈파티 때 한 번, 그리고 그 식사자리가 두 번째 대면 자리였던. 친구 커플 맞은편에서, 우리는 서로 옆자리에 앉아 함께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조금만 들어도 지성미가 느껴질 만큼 말을 조리 있고 차분하게 잘하던 그녀. 그때 느꼈다. 아, 난 목소리가 좋고 말을 잘하는 사람에게 끌리는구나.

어느새 우리는 식사와 긴 담소 끝에 헤어질 순간이 됐고, 서울역사 안에서 서로 흩어질 준비를 하던 와중에 툭 한마디를 건넸다. 그녀의 집은 먼 대전이었다.


“서울엔 자주 오세요?”

“부모님이 서울에 사셔서,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오는 것 같아요.”


그 정도가 대화의 끝. 페이스 투 페이스로 아무 말도 건네지 않고 헤어지기엔 난 이미 그 목소리에 홀려 있었다. 그리고 행여 나중에 또 볼 일이 있을까 하며 서로 번호를 교환해 두었다. 서로 일정선을 넘는 발언은 하지 않은 채.

그리고 얼마 뒤에, 불쑥 그녀에게 메시지가 왔다.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그 후 몇 번의 개인적인 만남 후에, 우리는 금방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감정을 크게 드러내진 않았지만, 차분하게 내 말과 행동을 다 받아주는 사람이었다.

대전에 있는 그녀의 집에 찾아갔을 때, 난 안 하던 짓을 하기로 했다. 욕심이었다. 로망이었다. 내가 지은 글을 선물하는 것. 그걸 손으로 적어주는 것. 그러기엔 소설은 적합하지 않았고, 한 때 블로그에 여럿 올려두었던 시를 생각했다. 그중에서도 어떤 사람보다는 이미지에 치중해서 쓴 글, 그때 감정에 대한 관념적인 글. 그때도 사실 그 글들의 수준이 자랑스럽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운문에 딱히 재능이 없다는 건 알았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한 것’, 그게 욕심을 부렸던 이유였다.

내가 작은 노트에 글을 적는 모습을 사진으로 남겼던 그녀. 그 사진 속에서 나는 한껏 집중한 채 내심 즐거운 표정이었고, 그 사진을 찍던 그녀… 그 적힌 글을 가만히 들고 보던 그녀의 표정은 알 수 없을 만치 고요하고 잔잔했다.

빨리 시작했던 연애는, 이별도 빠르게 찾아왔다. 우리는 처음 만났던 날의 그 카페에 앉아 이별을 눈앞에 두고 이야기를 했다. 이별을 통보하기 위해 약속을 잡은 건 그녀였고, 난 그녀의 섭섭했던 이야기들을 가만히 앉아 들어주고 있었다. 사실 내가 그녀를 그렇게까지 크게 좋아하지 않았음이 그녀를 크게 상처 준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컸다. 그리고 여러 이야기를 내뱉던 와중, 폐부를 깊이 찌르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때… 오빠가 적어줬던 글. 너무 싫었어요. 이 글이, 나를 생각하며 쓴 글이 아니라는 게, 정말 너무 싫었어요.”


할 말을 잃었다. 거리에 발가벗겨진 것처럼 창피했다. 내 글이, 선물이 아닌 연인을 상처 입히는 칼날이 되었다는 게. 그 글들은 사람이 아닌, 이미지로 쓴 것이었다 짧게 대답을 했지만, 그녀에겐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음이 보였다. 내 글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한 핑계도 무의미했다.

기차 앞까지 그녀를 배웅하며 못해줘서 미안했다고 사과를 했고, 그녀는 괜찮다며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우리는 이별했다.

이별에 대한 상실감이 늦게 찾아오는 편인 나는, 한 달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야 온갖 사건에 후회와 아픔이 찾아왔다. 그중에 가장 큰 건, 역시 ‘그녀를 대상으로 한 글’을 지어내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글을 쓰기로 했다. 우리는 여름에 만났고, 가을에 헤어졌고, 이제 겨울이 찾아오려 하고 있었다. ‘따스한 날들의 끝’ 그건 시의 형식을 갖고 있었지만, 그때를 기억하기 위한 일기에 더 가까운 글이었다.


이별하고 나서 얼마 뒤에 우리는 연락이 닿아 안부를 물었다. 그리고 가볍게 커피 한 잔을 할 약속을 잡았다. 하지만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녀를 생각하며 적은 글을, 그녀에게 보여줄 일은 없을 거라는 걸. 앞으로 내가 누군가에게 글을 선물할 일은 더 이상 없을 거라는 걸.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따스했던 계절처럼 흔적 없이 사라질 거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