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보이지만 닿지 않는 / 2010
"하얀 안개 속을 걸어본 적 있어요?"
그녀는 매우 진지한 목소리로 저런 질문을 건넸다. 어색함이 지나쳐 불편함이 되어가려는 단둘만의 자리에서. 흡사 저 질문을 받은 그 순간의 심정은, 생소한 브랜드의 열정적인 영업사원을 만난 기분이었지만 그런 느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 말에 흐르는 미묘한 뉘앙스는 그게 질문이 아니라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고자 하는 것임을 알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난 그 뉘앙스를 모른 척 대답했다.
"안개는 당연히 하얗지 않아?"
내 대답에 그녀는 예상보다 더 실망한 기색을 내비쳤다. 어두컴컴한 카페 조명 아래, 생기 있게 반짝거리던 그녀의 눈동자는 날 지그시 째려보다가 말을 툭 내뱉었다.
"뭘 모르시네. 그런 게 아니라구요. 제가 말하는 건 아주아주 하얗고 짙은 안개를 말하는 거예요."
"아주아주 하얗고 짙은?"
"그래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하얗고, 너무 짙어서 손에 잡힐 정도인 그런 안개라구요."
그런 안개를 본 적이 있던가, 하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
문득 어떤 느낌에 난 생각하다 말고 움찔했다. 그러자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내게 물었다.
"본 적 있어요?"
"아니, 커피 찾아가라고 진동 왔어."
나는 적당한 웃음으로 그녀의 진지함을 흘려버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말이 그저 농담으로 치부되는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는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또래에 비해 성숙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그녀라고 해도 네 살이나 차이 나는 어린 동생이었기 때문에 실은 그 토라짐이 귀엽게만 보였고, 금방 풀어준 뒤 다른 화제로 대화를 자연스레 끌어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은 자리에 돌아와 앉으며 커피를 내려놓고, 그녀의 눈을 마주 보는 순간 바뀌었다. 오늘 그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러 나를 만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느낀 나는 먼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음, 사실 본 적 없어. 그렇게 특이해서 기억에 남을만한 안개는."
내가 그 화제로 말을 이어가자 그녀는 다시금 부드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제가 말하는 거에 관심은 있어요?"
"물론이지. 아니었으면 벌써 뛰쳐나갔을 거야."
그녀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그녀의 조금 젖혀진 얼굴을 지나 어깨로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검은 머리칼은 잠시 내가 무슨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인지 순간순간 잊을 만큼 몽롱한 기분을 안겨주고 있었다.
"한번 들어봐요. 내가 걸었던 그 안개를 말해줄게요. 언젠가 오빠도 그 속을 걸었을지 몰라요."
난 대답하지 않았다.
"처음엔 저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어요. 평소와 같이 지나가는 안개일 거라 생각했죠. 그래서 그냥 기분 좋았어요. 왜, 그런 느낌 있잖아요. 차가운 공기에 젖은 겨울 이불의 느낌. 그 안에 푹 파묻힌 것처럼 그 안개 속에서 걷는 게 기분 좋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알았어요. 이 안개 속에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기분이 좋아 걸어 나간 그 길에서 길을 잃어버렸지 뭐예요. 바보 같죠? 한두 살 먹은 애도 아닌데."
본인이야 이미 자신이 어른이 다 됐다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만, 실은 내 눈엔 처음부터 지금까지 퍽 어려 보이기만 했다. 이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지금도. 하지만 그녀를 정말로 어린애처럼 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이미 누가봐도 매력적인 숙녀였다. 난 또 대답 대신 씩 웃고 말았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더라구요. 나 혼자 다른 세상에 떨어진 것 같은 그런 느낌. 이 안개가 나를 다른 어떤 곳으로 안내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좀 더 걸어보기로 했어요. 어차피 진짜 길을 잃은 것은 아닐 테니까 말이에요. 그랬더니 어떻게 됐는지 아세요?"
"아니."
그녀는 내가 경청하고 있는지 살피려는 듯 내 눈을 뚫어져라 쳐다봤고, 나는 조금씩 그녀의 이야기와 그 눈동자에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불쑥 어떤 사람의 뒷모습이 보였어요. 마치 내가 처음부터 그 사람을 뒤쫓았던 것처럼. 우리는 걸어가는 방향도 같았고, 비슷한 속도로 걷고 있었죠. 당장 다가가서 길을 묻고 싶었어요. 그런데..."
"그런데?"
"결코 그 사람을 붙잡을 수가 없었어요. 아무리 빨리 걸어봐도, 잠깐 마음을 먹고 뛰어봐도... 고양이의 걸음을 뒤쫓는 것처럼 그 간격은 절대 좁혀지지 않았어요. 신기하게. 그래서 마음을 먹고 크게 불러보려고 했죠. '저기요!'하고. 하지만 어째선지 그 순간 아무 목소리도 나오지 않아서, 바보처럼 멍하니 입만 뻐끔거렸지 뭐예요. 그리고 그 사람은 어느새 안개 속으로 사라져버렸어요."
그때를 기억하고 있는 것인지, 깊은 상념에 빠져서 이야기하고 있는 그녀는 아주 차분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왠지 위로해주고 싶을 만큼 공허한 눈빛을 띄고 있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느라 잔을 들고 그 안의 커피를 가볍게 돌리다가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신기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럼, 뒤돌아보지도 않고 그냥 갔어? 그 사람은..."
그녀는 잠깐 내리깔고 있던 눈을 마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네. 그 사람은 나를 신경 쓰지도 않았어요. 저는 그 사람에게 길을 묻는 걸 포기하고 제자리에 멈춰 서서 그 안개가 걷히길 기다리는 게 낫겠다 생각했고, 그렇게 했어요. 가만히 기다리는 잠깐의 그 시간이 좀 무섭고, 무기력하게 느껴졌지만 제 예상대로 곧 안개는 걷히더라구요. 그런데 정말로 신기한 건, 제가 정말로 길을 잃고 먼 옆동네까지 걸어와있었지 뭐예요."
"뭐에 홀린 것처럼?"
"네, 뭐에 단단히 홀린 것처럼. 그래도 아는 번호의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긴 했는데, 돌아오면서 내내 궁금하고 찜찜하더라구요. 그 안개는 뭐였는지, 왜 내가 그 속에서 헤매고 있었는지..."
난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 그녀의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 같은데, 난. 누구나 그런 신기한 경험 한 번쯤은 하잖아. 전부 다 착각이라고 말하긴 뭐 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그런 찝찝한 기분을 느낄 만큼 대단한 거라고 생각지도 않아. 내가 아는 애 중에서도 그런 애가 있었어. 컨디션이 안 좋으면 가끔 정신이 멀쩡한 상태에서 꿈을 꾼대. 말 그대로 백일몽이지. 너도 그런 경험을 어쩌다 한 번 했던 거 아닐까?"
"꿈이요?"
그녀는 아무런 표정 없이 저렇게 반문했고, 난 그녀의 의중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채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리고 그녀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절대로 꿈은 아니에요. 느낌이 남아있는걸요. 그 속에서 숨 쉬었던 이 가슴에, 그걸 쥐어보려고 뻗었던 이 손에."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 그렇게 말하며 테이블 위로 손가락을 세워 아주 천천히 내 쪽으로 밀었다. 정말로 자신의 말이 의심된다면, 한번 이 손을 잡아보라는 듯이. 그게 모든 것을 말해줄 거라고...
하지만 난 침묵하며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다. 아름답지만 그 손은 너무나도 차가울 것 같았고, 내가 그것을 잡는 순간 안개의 한기를 넘어선 무언가가 나를 완전히 뒤덮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곧 빙긋 웃으며 그 손을 거두고는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푹 누이며 쾌활하게 말했다.
"그래도... 참 다행이에요. 오늘도 안개가 꽤 짙어서 걱정했는데, 지나가다 오빠를 만나서 이런 따뜻한 곳에서 몸도 녹이고."
그녀의 가벼운 말투에 나도 한숨 돌리며 의자에 몸을 뉘었다.
"그러게. 우연히 만났지만 나도 오랜만에 이렇게 너랑 이야기하니까 좋다, 야."
"그쵸? 아, 그런데 오빠... 그거 알아요?"
응? 난 대답 대신 동그랗게 뜬 눈으로 되물었고, 그녀는 내 눈을 피하며 커피를 한 모금 들이키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낯선 얼굴은 슬픈 것인지, 기쁜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 아직도 하얀 안개 속을 헤매고 있는 것만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