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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레이스 임은정 Oct 04. 2021

앞이 안 보일 때, 그제야 보인다

보일 때 안 보이는 것들

어둠 속의 대화

“마음으로 보는 세상은 눈 보일 때 보이는 세상, 그 너머의 것을 볼 수 있기에 저는 지금이 가장 행복합니다.”


실명되기 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주저함 없이 지금의 삶을 선택하겠다는 사람이 있다. 바로 시각장애인 가수 오하라 님이다. 얼마 전, ‘어둠 속의 대화’라는 전시를 보고 왔다. 전시를 통해 눈앞이 안 보이는 경험을 하고 나니, 예전에 방송을 통해 들었던 그녀의 말이 다시 마음속에 들어왔다. 마음으로 보는 세상은 눈으로 볼 수 없는 세상이라는 걸, 이번에 조금이나마 맛보게 된 것 같다.




한동안 가정사에 얽매여 팽팽한 긴박함 속에서 살다가, 이제는 느슨한 일상을 누리는 중이다. 긴장이 풀린 상태가 계속되다 보니 마음은 편하면서도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삶의 활력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중, 우연히 ‘어둠 속의 대화’라는 전시의 후기를 보게 됐다. 미적 감각이 없는 터라 전시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100% 어둠 속에서 진행된다고 하니 궁금해서 가보고 싶었다. 혼자 가도 좋다는 후기를 보고 혼자 가려고 하다가, 최근 힘들고 지쳐 보이던 사촌 언니가 문득 떠올랐다. 연락해보니 마침 시간이 맞아서 같이 다녀왔다.


‘어둠 속의 대화’는 일반적인 전시와는 다르게 눈으로 볼 수 있는 전시가 아니었다. 그냥 어두운 정도가 아니라 빛이 전부 차단된 공간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시각을 제외한 온 감각을 통해 볼 수 있는 전시이다. 마음으로 보는 전시라고 말하고 싶다. 눈으로 보지 않고도 소리를 통해서, 피부와 손끝에 닿는 감각을 통해서 존재의 유무와 생김새 그리고 방향을 볼 수 있다. 전시공간에서 마주하는 모든 것이 실제로는 어떤 생김새인지, 어떤 구조로 되어있는지는 아무 문제 될 게 없다. 각자의 마음속으로 보는 것이 곧 현실이다.

    

처음 입구에 들어섰을 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온 신경이 곤두섰다. 넘어질까 봐 앞으로 빨리 나아갈 수 없었다. 아무리 어둠 속에서 진행된다지만 이렇게 어두울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긴장한 탓에 손도 차가워지고 등에는 땀이 났다. 눈을 계속 뜨고 있으면 어지러울 수도 있다는 로드 마스터님(길 안내자)의 얘기를 듣고 눈을 감고 걸었다. 보려고 애써도 보이지 않으니 그저 어둠 속의 길을 제일 잘 알고 계시는 로드 마스터님을 믿고 갈 수밖에 없었다.


발을 딛어보면서 바닥의 경사도를 알 수 있었고, 손으로 벽을 짚으며 벽의 생김새를 알 수 있었고, 로드 마스터님의 목소리를 따라가며 길을 찾아갈 수 있었다. 앞이 안 보이니까 오히려 풍성하게 느끼고 볼 수 있었다. 온몸의 감각이 켜지는 느낌이었다.

          

눈을 감고 걷다 보니 앞서가던 사람과 종종 부딪혔다. 서로 죄송하다고 하고, 서로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게 된다. 바깥에서는 사람과 부딪히면 불편하지만, 이곳에서는 부딪히며 안도감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잘 따라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서, 내가 혼자 동떨어진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어서다. 앞을 못 보지만 이렇게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었다. 어둡지만 밝았다.

     

세상을 살아갈 때, 눈이 보이기 때문에 많은 감각이 꺼진 상태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이기 때문에 편견을 가진다. 겪어보지 않고 판단하기도 하고, 들어보지 않고도 다 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보이는 세상에 살고 있지만 많은 감각이 꺼진 상태로 보는 것이라면, 잘못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 걷고, 앉아서 쉬고, 대화하는 시간을 통해서 평소에 볼 수 없고 알 수 없던 경험을 했다. 다녀온 지 며칠 됐는데 아직도 긴 여운이 남는다. 전시가 끝나고 바깥에서 빛을 마주했을 때 따뜻한 감격이 있었다. 마음으로 보는 세상, 눈으로 보는 세상 모두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다 보면 장애를 만날 때가 있다. 어떤 장애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모두에게 살길을 마련해 셨다고 믿는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나아갈 수 있고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적절한 때에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신다는 것을 하나님이 전시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전시 공간에서 앞이 보이지 않으니 천천히 가야 했듯이, 삶 속에서도 앞이 보이지 않을 때 빨리 가려고 애쓰기보다 천천히 그 시간을 누려야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 문제 없이 많은 것을 보고 나올 수 있었던 전시처럼, 살면서 앞이 안 보이는 순간이 있더라도 모든 것 예비해두신 주님 믿고 나아가야겠다. 눈으로 보는 것 그 이상의 것을 보여주실 테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시편 119:105


Your word is a lamp for my feet, a light on my path.

Psalms 119:105 N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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