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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CHYA Apr 30. 2020

거울 밖의 얼굴로 남고 싶어서


이제 나는 화장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렇게 지낸 지 2년이 조금 넘었다. 

30년 넘게 살았고, 그중 3분의 1 가까이 되는 세월 동안 화장을 했다. 풀메이크업이라고 해봐야 총 소요 시간이 15분을 넘기지 않는 간단한 것이었다. 손재주가 없어 이런저런 단계를 추가해봤자 별 차이가 나질 않았고, 공들인 보람이 없으니 부가적인 과정은 자연히 생략되어 가벼워졌다. 파운데이션을 바르고, 눈썹과 아이라인을 그린 다음 틴트를 바르는 것으로 끝나는 간략한 화장이나마 그만두게 된 것은 순전히 민구 덕분이었다.

스물여덟 끝자락에 민구와 결혼을 했다. 한겨울의 오스트리아로 신혼여행을 떠나 멋이고 나발이고 둘 다 주야장천 패딩만 입었음에도 나 홀로 꼬박꼬박 화장만큼은 하고 다녔다. 이른 아침마다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고치는 나를 보며, 민구는 뭣 하러 귀찮게 그런 걸 하냐고 물었다.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우연히 마주칠 지인 하나 없는 낯선 도시에서 무엇을 위해 매일같이 그렸다 지웠다 반복하는지 나조차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그만두지는 않았다.

이상한 관성은 신혼 초까지 계속되어 집에만 있는 날에도 화장을 했다. 지속적인 민구의 만류와 더불어 게으른 천성 탓에 얼마 못 가 관뒀지만, 그래도 친구나 지인을 만나러 나갈 땐 어김없이 얼굴에 뭐라도 발랐다.






이듬해 3월, 민구와 베트남으로 이른 휴가를 떠나면서 캐리어에 화장품을 넣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무더위에 녹아내릴 파운데이션과 눈가로 번질 아이라인을 생각하니 상상만으로도 찝찝해 얼굴이 찌프러졌다. 그래도 베트남에 사는 민구의 지인을 만날 일정을 떠올리며 파우치를 챙겼다.

지인과 식사했던 하루를 제외하곤 내내 그냥 다녔다. 흘러내리는 땀을 휴지로 쓱쓱 닦아낼 수 있고, 그걸로도 부족하면 언제든 시원하게 찬물을 얼굴에 끼얹어가며 세수할 수 있는 편안함을 만끽했다. 행여라도 파운데이션이 벗겨질까 봐 얼굴에 손도 못 대고, 수시로 덧바르며 수정까지 했던 때로 다신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결혼식이나 모임 같은 행사가 아니면 거의 화장을 안 하기 시작했다. 친한 친구를 만나는 자리는 편하게 나섰다. 그러다 어느 날 아기를 가졌고, 시간이 흘러 배 속의 아기가 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종종 가벼운 화장이라도 하는 나와, 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민구를 동시에 보면서 자란 딸은 누구를 따라갈까.

아무래도 동성인 내 쪽일 가능성이 클 것 같았다. 불편한 걸 불편한 줄도 모르고 살았던 세월과 다소 불편하더라도 때론 별 저항 없이 순응해버린 세월이 스쳐 갔다. 이대로 딸이 내 전철을 밟아도 괜찮은 건지 수심에 잠겼다.

모종의 결심도 있었지만, 갖고 있던 화장품이 바닥나거나 유통기한이 지나버리는 현실적인 문제와 맞닥뜨렸다. 평소에는 전혀 안 하다가 몇 달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행사 때 한 번 쓰려고 다 떨어진 화장품을 새로 사기도 애매한 노릇이었다. 이제부터 일절 화장을 하지 않기로 했다.

처음엔 연말 부부/커플 모임이었다. 그다음엔 민구의 회사 동료 부부 집들이, 아기 탄생 300일 기념 가족 촬영, 양가 식구들끼리 치르는 조촐한 돌잔치, 지인들의 결혼식이 줄줄이 이어졌다. 때마다 고비였다. 특히나 처음 만나는 민구의 지인이 있는 자리는 더욱 망설였다. 그거 몇 단계나 된다고 싸구려 화장품 서너 개만 사서 간단히 하고 나가면 마음이 편할 것을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맙소사. 화장을 안 하는 일에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이 지점부터 못마땅했다. 내가 나로 살아가는데 용기씩이나 내야 한다니. 기껏 없는 용기를 쥐어 짜내고 나면 예의 문제가 떠올랐다.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여성 참석자가 화장을 하고 나오는 자리에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가는 게 혹시 예의 없어 보이지는 않을까. 그러나 세상 사람의 절반만이 지켜야 하는 예의도 있나?

그런 순간마다 ‘민구가 안 하면, 나도 안 한다.’를 주문처럼 되뇌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화장을 ‘안 할 수 있게 된 지’ 2년이 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틴트는커녕 립밤조차 바르지 않았다. 기억도 잘 안 나는 어릴 적, 나는 냄새와 질감에 민감한 아이였다고 한다. 엄마가 로션 통 하나 갖다 달라고 하면, 손조차 대기 싫어서 양 손목 사이에 끼워서 들었다고 했다. 가족사진을 찍는 날, 할머니의 손에서 나는 분 냄새가 싫다며 잡으시려던 손을 뿌리쳤다는 일화도 자라면서 두고두고 들었다. 그런 아이가 나이 몇 살 더 먹었다고 갑자기 얼굴에 뭘 바를 리 없었다.

주체적으로 자신을 가꾸고 꾸미는 사람도 있지만, 나의 경우는 아니었다. 특별히 내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스무 살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도 그 점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는 성인 여성들은 대부분 화장을 했다. 자연스럽게 나도 화장을 하는 성인 여성이 되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던 내 입술이 갑자기 무언가 바르지 않으면 ‘아파 보이는’ 입술이 되었다. 어쩌다 화장을 안 한 날엔 무슨 일이 있는지, 하다못해 늦잠이라도 잤냐는 소릴 들었다. 화장했다고 알은체하는 사람은 없지만, 안 하면 누군가 득달같이 입에 올렸다. 억울할 법도 한데 나는 그저 민망하기만 했다.

임신 중기를 넘어가며, 이런저런 생각으로 화장을 안 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다녀온 여행 사진을 보고 동생이 말했다.


△△언니는 임신해도 예쁘게 잘 꾸미고 다니네.


나는 ‘임신을 해서’ 화장을 그만둔 것이 아니었다. 할 때는 아무도 찾지 않던 그 까닭을, 안 할 때는 다들 뭐라도 찾아내 넘겨짚었다.

아이의 200일 기념 촬영 때, 다음번엔 가족 촬영이 포함되어 있으니 미리 준비해오라는 소리를 들었다. 어떤 준비인지 묻자, 가족 의상이라든가 어머님의 헤어 및 메이크업 따위라며 나만 콕 집어 얘기했다.

누구에게도 악의는 없었다. 오죽하면 하는 것보다 지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할 만큼 몸에 좋지도 않은 화학물질을 매일 얼굴에 바르면서, 평생 나의 민얼굴을 부끄러워하라고 던지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말 하나하나가 모여 거미줄처럼 나를 촘촘히 옭아맸다.






어찌 됐건, 거미줄을 끊고 탈출하니 많은 것이 새삼스러웠다. 같은 나라에서 같은 해에 태어나 생일마저 고작 8일 떨어져 있는 민구와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태어나서 웨딩 촬영과 결혼식 날에만, 그것도 20분이면 끝나는 간단한 메이크업을 해본 것이 전부인 민구의 얼굴은 한 번도 ‘쌩얼’이나 ‘민낯’이라 불린 적이 없었다. 민구는 대학 졸업식, 취업 면접일, 소개팅 등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얼굴로 다녔다.

물론 나 역시 직접적으로 강요받은 것은 아니다. 나조차 내가 선택한 줄로 알고 살았다. 그러나 내가 지금껏 민구와 똑같이 중요 자리마다 화장을 하지 않았대도 크고 작은 불이익이 전혀 없었을 거란 확신이 서지 않는다. 살면서 너는 왜 화장을 안 하냐고 순수하게 궁금해하는 사람과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을 거라 장담할 수가 없다. 이것은 정말 일말의 강요도 받지 않은 것일까.

따지고 보니 단어부터 이상했다. 가만히 있는 내 얼굴은 그냥 얼굴일 뿐이고, 굳이 단어를 붙인다면 화장한 쪽을 ‘화얼’이라 불러야 하지 않나. 쌩얼이니 민낯이니 하는 단어에서 기본값을 어디에 두고 있는지 투명하게 느껴졌다.

익숙했던 풍경이 점차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일가친척이 모인 어느 명절, 갑자기 전에 없던 위화감이 들었다. 모든 여성 가족 구성원이 화장을 한 가운데 나 혼자 본얼굴로 앉아 있던 것이다. 30대인 우리 부부를 포함, 20대부터 60대까지 어느 연령대 하나 빠짐없는 모임이었다. 나이가 몇이건 간에 오직 여자들만이 화장을 했다.

그 자리엔 초등학생 또래의 여아 두 명과 남아 한 명도 함께 있었다. 세 명 중 머지않은 미래에 누가 화장을 시작하고, 누가 하지 않을지 빤했다. 그런 걸 과연 주체적인 욕망이라고 불러도 되는 것일까.






화장은 단점을 찾는 일에서 출발하기 쉽다. 자신의 개성을 살려 작은 눈을 더 작아 보이게, 튀어나온 광대를 보다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회적인 미의 기준에 부합하도록 눈은 크게, 코는 높게, 턱은 갸름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화장법은 발달했다. 그러면서도 생김새를 바꾼 티가 많이 나지 않도록, 마치 원래 내 얼굴인 것처럼 천연스레 보이는 데 주력한다. 자신의 얼굴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자존감을 지키기란 매우 어렵다.

그런데 문제는 화장을 시작하는 연령대가 점점 낮아진다는 것이다. 너무 이질적이라 쓰면서도 이상한 ‘어린이’, ‘아동용’ 같은 단어가 자연스럽게 화장품 앞에 붙는다. 어린이 화장품 산업 규모는 전 세계적으로 성장하는 추세다. 각종 모형 장난감이 쏟아져 나오는 것은 물론이고, 인체에 무해하다며 실제로 얼굴에 바르고 칠할 수 있는 제품도 수두룩하다.

중고생도 아닌 초등학생, 미취학 아동들이 유명 유튜버를 보면서 어린이 화장법을 배운다. 이미 화장이 뭔지도 모를 나이부터 엘사의 오색찬란한 눈두덩이를 보면서 자란 아이들이다. 또래 집단의 주류 문화로 자리 잡고 나면, 적극적으로 유튜브를 찾아보지 않는 아이마저 친구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따라하기에 십상이다.

얼마 전, 유명 운동선수의 자녀가 나오는 유튜브 영상의 캡처를 보았다. 자매 중 한 명은 카메라 앞에서 립글로스를 바르고, 퍼프로 뺨을 두드린다.


너무 살이 쪄서 고민이에요. 세상엔 왜 이렇게 맛있는 게 많을까요? 언니는 맨날 다이어트 한다고 저러고 다니고, 저는 서너 그릇을 먹고. 살만 뒤룩뒤룩 찌고. 그러니까 화장을 좀 하고 다녀야겠어요. 오늘은 엄마가 마음껏 화장하라고 허락해줬어요. 옛날엔 진짜 예뻤는데 왜 이렇게 못생겨졌을까요? 살 어떻게 빼야 해요? 동생은 나보고 다이어트 하라 그러고. 밥 안 먹고 못 살겠어요. 제가 그렇게 뚱뚱해요? 언니는 어떻게 그렇게 뼈만 있냐고요.


연신 화장을 하느라 손은 바쁘고, 입에서는 자기 비하가 계속 나온다. 동생이 부러워하는 마른 몸을 가진 언니 또한 카메라 앞에 섰다. 긴 머리 가발을 착용하고 빗질을 하면서 말한다.


예뻐지려면 꼭 참아야 할 게 있어요. 고통! 땅겨서 아파도 예뻐지려면 해야 해요. 어쩔 수 없는 거죠.


자매는 둘 다 2013년생이다.

댓글에 논란이 일었는지, 업로드 후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아 영상은 비공개로 전환되었다. 과도한 외모지상주의를 지적하는 사람들 가운데,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이라 옹호하는 이들도 있었다. 맞지도 않는 아빠 구두를 신어 보고, 엄마 립스틱으로 난장판을 치며 어른 흉내를 내던 시절에 견주는 모양이었다.

단순히 어른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과 어떤 가치관을 내면화하여 스스로 발화하는 것을 동일 선상에 놓는 데에 개인적으로 동의할 수 없지만, 백번 양보하여 크면서 지나가는 과정으로 치부한다고 해도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다. 자매의 남동생도 비슷한 시기를 거칠까? 채 열 살도 되기 전부터 체중을 신경 쓰고, 외모를 최우선의 가치로 삼아 고통까지 감내하려는 태도를 보일까? 한 성별에서만 뚜렷하게 보이는 성향이 정말 태생부터 정해진 ‘자연스러운’ 발달 과정일까?

크리스토프와 한스의 눈두덩이는 말할 것도 없이 깨끗하다.






그렇다면 장차 딸이 화장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사실 성인이 되고 나면, 본인의 선택이지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성년자라고 하여 보호라는 명목 아래 어디까지 자유를 제한하고 어느 선부터 의사를 존중해줘야 할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다만 가벼운 화장 뒤에 숨어 ‘내면의 아름다움’이니, ‘스스로를 사랑하라’라는 가치를 전달할 수는 없을 터였다. 사회적인 미의 기준이 분명하게 존재하는 상황에서 모든 사람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말로 기만하고 싶지도 않다.

모순적이지만, 아이에게 외모라는 것이 이렇게 긴 글로 풀어내며 오랜 시간 생각해야 할 만큼 중요한 문제가 아니길 바란다. 세상엔 돈과 시간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충분한 일들이 외모 말고도 정말 많다는 것을 나보다 일찍 깨달았으면 좋겠다.

일례로 민구에겐 운동이 있었다. 내가 종아리 알이니 허벅지 굵기 같은데 신경을 쓰는 동안 민구의 다리는 운동장에서 공을 찼다. 내 어깨가 비하의 의미로 수영 선수처럼 넓다는 말을 들을 때, 민구는 실제로 수영장에서 수영을 배웠다.

언젠가 친구로부터 수영장 물에 푸는 소독약이 독해서 피부와 머릿결을 상하게 하므로 ‘여자에겐’ 추천할만한 운동이 아니라는 소리를 들었다. 지금 생각하면 무척 놀랍게도 그 말에 발끈하기는커녕 ‘아, 그럼 별로겠네.’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순순히 수긍해버렸다.

지나치게 비대해진 세계는 다른 세계를 쉽게 축소하고 제한한다.






2008년생 아동 모델이 찍은 어느 아이스크림 브랜드 광고가 화제에 오른 적이 있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소녀의 입술을 클로즈업한 장면 등이 포함된 광고는 성 상품화 논란 끝에 결국 내려졌다. 영상의 내용에 성적인 함의가 있는지 여부를 떠나, 해당 아동의 착장만으로도 바람직한 광고는 아니었다. 얼굴엔 진한 화장을 하고, 성인 여성이 입을 법한 민소매 원피스의 축소판 같은 옷을 입은 채로 아이스크림을 먹는 모습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불편함을 느꼈다.

앞선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뭐가 문제냐던 옹호자들과 같이, 이번에도 일각에서는 깜찍하고 예쁘기만 한데 괜히 부러워서 트집을 잡는다며 반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동이 성인의 ‘질투’ 대상에 오를 수 있다는 시각 자체가 역으로 이런 광고가 나와선 안 되는 이유를 보여주고 있었다.

심지어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한 아동 모델의 보호자마저 광고에 반대했던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을 SNS에 남겼다. 유튜브 영상 역시 자매의 보호자가 직접 올렸음에도 섹시니, 요염이니 하는 자막이 여덟 살 아이에게 버젓이 달려있었다.

나라고 모든 면에서 아이를 보호할 순 없을 것이다. 분명 나도 모르게 주입하는 해로운 가치관이 있을 테다. 그러니 보호자의 보호가 충분치 않으면, 사회가 나서서, 때론 필요하다면 법까지 나서서 아동을 보호해줘야 한다.

거꾸로 온 사회가 앞장서 불공평한 가치관을 불어넣을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내가 보여줄 작은 본보기 하나로 이 거대한 흐름을 거스를 자신이 없다. 꾸밀 수 있는 자유는 사방팔방에서 보장해주는데,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는 대체 어디서 구할 수 있는 건지 깜깜하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고 천방지축인 딸의 미래를 상상해보지만, 잘 그려지지 않는다. 딸의 얼굴은 얼굴로 남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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