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킹맘과 전업맘
<82년생 김지영>이 한창 상영 중일 때, 인터넷에서 우연히 뜻밖의 관람평을 접했다. 배우 공유가 분한 만큼 남편 얼굴이 잘생긴 데다, 서울에 살고, 원 가족이나 시가나 그만하면 양호한 편인데 뭐가 그리 힘들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내용이었다. 본인은 오늘도 먹고 살려고 일하러 나온 마당에, 일을 안 해도 되는 김지영 팔자가 오히려 부러울 지경이라고 덧붙였다. 그 의견에 몇몇 사람들이 잇따라 공감을 표했다.
모두 소위 말하는 워킹맘인듯했다.
경력 단절이 개인의 노력이나 능력만으로 타파하기 어려운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는 걸 영화가 분명히 보여준 데 비하면 다소 의아한 반응이었다.
집에서 편하게 쉬는 사람 취급을 당한 김지영은 재취업을 위해 이래저래 고군분투했으나 결국 여건이 허락지 않아 포기하고 만다. 김지영의 딸과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친구들의 학부모 대부분이 대학까지 졸업하여 제각기 다른 전공을 자랑하지만, 현재는 너 나 할 것 없이 자녀를 등원시킨 후 한 테이블에 모인 신세다. 개중엔 서울대 공대 출신이라는 설정을 가진 조연도 있다.
그렇다면 가까스로 경력을 유지하는 인물들의 인생은 평탄하기만 할까. 김지영의 전 직장 상사는 부모의 도움을 받고, 외부 인력을 동원해 가며 기를 써서 회사에 남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건 애는 엄마가 키워야 제대로 자란다는 직장 동료의 망발과 번번이 밀리는 승진뿐이다. 주인공 남편의 옆자리 동료는 갑작스럽게 아픈 자녀를 맡길 곳이 없는지 들쳐업고 출근하며 상사의 눈치를 살핀다.
스크린에 담긴 주·조연의 다양한 서사에도 불구하고, 영화평 속에서 그들은 직업의 유무에 따라 단순하게 압축되어 갈라졌다. 어린이집 학부모들은 전업맘 1, 전업맘 2에 그쳤고, 전 직장 상사와 남편의 동료는 워킹맘 1, 워킹맘 2에 지나지 않았다.
예전부터 워킹맘/전업맘이라는 글자를 보면 뭔가 거북하면서도, 이미 널리 쓰여 익숙한 까닭에 구체적으로 어디가 어떻게 이상한지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어 실제로 나를 지칭하는 단어가 되자, 마주칠 때마다 더더욱 불편한 감정이 들었다. 불쾌할 이유가 딱히 없는데, 여기저기서 버젓이 쓰일 때마다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다. 그 말이 등장하는 곳에선 굳이 편을 가를 필요가 없는 사람들끼리 자신의 상황이 더 힘들다며 불행 배틀을 벌이곤 했다.
가치 중립적으로 개인의 처지를 묘사하는 단어지만, 일과 육아라는 중차대한 가치를 양분하는 바람에 두 집단을 바라보는 시선이 필연적으로 엇갈렸다. 생업을 가진 이는 엄마로서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지 못한다는 자책감에, 벌이가 없는 사람은 무위도식하며 지낸다는 자괴감에 쉽게 빠졌다.
쓸데없이 분란만 조장하는 명사를 곱씹어보다 문득 깨달았다. 그전까지는 누군가가 가족 구성원 내의 나의 지위와 경제 활동 여부를 엮어서 나를 정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점을. 다시 말해, 여태 나는 일을 하든 안 하든 워킹도터/전업도터 내지는 워킹시스터/전업시스터라 불리지 않았고, 기혼일 때조차 아기를 낳기 전엔 내가 워킹와이프인지 전업와이프인지 아무도 따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상 저런 단어는 존재하지도 않는 셈이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나니, 별안간 나를 집어넣는 두 갈래의 카테고리가 생겼다. 세상에서 유자녀 기혼 여성만이 갖는 카테고리였다.
언어가 주는 힘을 무시할 수 없는 법이라, 나 또한 얄궂은 낱말에 속던 시기가 있었다. 사회가 규정한 단어에 맞춰 나의 정체성도 이분화되었다. 인생이 마치 직업인으로서의 자아와 엄마로서의 자아가 양 끝에 매달린 저울처럼 느껴졌다. 전자는 익숙했지만, 후자는 새롭기만 하니 원래 내가 알던 나는 사라지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아이를 낳고 삽시간에 삶이 얄팍해진 건 사실이었다.
아이가 없던 시절의 일과란 다음과 같았다. 주 4일 새벽 6시 수영 수업을 다녀온 뒤 집에서 작업하다가 남편이 퇴근하면 저녁을 먹고 함께 클라이밍 센터로 향했다. 여가엔 피아노를 치거나 공예를 하고, 보잘것없는 솜씨지만 끼니마다 직접 요리를 해 먹었다. 대체로 만족도가 높은 생활이었다.
충분히 생각한 후에 스스로 선택하여 아이를 가졌지만, 임신과 육아가 일상에 일으킨 변동의 폭은 예상을 훨씬 웃돌았다. 사람들은 종종 아이가 가져다준 행복과 잃어버린 자유를 비견하는데, 동그라미가 아무리 커다랗다 한들 세모꼴의 작은 구멍을 완벽히 메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아이가 채 백일도 되기 전부터 모든 취미 활동을 전폐하고, 가족과 보낼 시간까지 긁어모아 틈만 나면 작업에 몰두했다. 수유와 같이 피할 수 없는 육아의 시간을 제외하곤 주말 내내 그림을 그리는데 쏟아부어 저울의 평형을 맞추려고 발버둥 쳤다.
그래 봐야 완성작은 손바닥만 한 드로잉에 불과했다. 책도, 영화도 멀리하며 아무런 문화 예술적 주입 없이 결과물만 내는 데엔 한계가 있어 금세 고갈되었다. 밑동이 터진 독을 온몸으로 틀어막으며 간신히 버티는 꼴이었다. 암만 애를 써도 줄줄 새어나가는 걸 막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그림만 실컷 그리고 사는 대단한 예술가다운 삶은 이전에도 없었다. 외주 작업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던 터라, 결혼 전엔 줄곧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는 일을 했다. 과외와 학원 수업을 전전하다 집으로 돌아오면, 작업에 매진할 의욕은 사라진 지 오래고 피로만 쌓여있었다. 그러니 얼마간 그림에서 손을 놓는다 한들 새삼스러울 게 없건만, 육아로 인해 쓰고 그리지 못하는 스스로가 무용하게 느껴졌다.
괘씸하게도 특정 집단만 따지고 든다는 걸 알아차린 후부터, 단어의 농간에 휘둘리지 않게 되었다. 육아 대디같은 어처구니없는 말까지 출현하는 판에 워킹맘이니 전업맘이니하는 분류따윈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뜨개를 배워 새로운 취미로 삼고, 운동도 다시 시작했다. 밤에 아기를 재운 후엔 남편과 보드게임을 즐겼다. 고삐를 풀고 이냥저냥 살다가 꼭 쓰거나 그리고 싶은 게 생기면 며칠 바짝 노력하는 평범한 일상이 이어졌다. 지향하는 삶의 양상을 목숨 걸고 지키려다 불행해지느니, 눈앞에 놓인 하루를 즐겁게 보내다 돌아올 기회를 도모하는 편이 나았다.
그림도, 아이들도 나의 전부가 아니다. 어느 쪽도 나를 완전히 대변하지 못한다.
가능한 한 좋아하는 일로 먹고살 수 있길 바라지만, 지난날 그랬듯 필요하다면 어떤 일이든 가계에 보탬이 되는 직업에 종사할 수 있다. 시간이 흘러 아이가 성장함에 따라 삶은 또 다른 모습으로 변모할 테고, 얼마든지 그에 맞춰 방향키를 조정할 의향이 있다. 비장한 태도와 자기 연민을 버리고 보다 유연하게 살기로 했다.
그러다 가끔 막연한 불안감이 엄습할 때, 어느 영화 채널에서 진행자가 건넨 '아직까진 엄마의 삶보다 배우의 삶이 더 좋다'라는 O/X 질문에 대한 배우 문소리 씨의 답변을 떠올린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 삶이 그 삶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