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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사원 모모씨 Mar 19. 2023

영화 탑을 보고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지만 내가 쉴 곳 없네


1.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아


시공간이 바뀌면서 병수의 모습은 달라진다. 2층에서의 병수, 3층에서의 그, 또 4층에서의 그.​


잘 나가는 영화감독인 병수는 2층의 프라이빗한 식당에서 건물주인 혜옥과 식당주인 선미와 식사를 함께 한다. 그는 누가 봐도 두 여자의 관심과 주목을 받는다.

그러다 컷이 바뀌면 3층에서 선미와 살고 있다. 일전에 혜옥이 신혼부부가 세 들어 사던 집이라고 소개했던 곳이다. 아마도 그와 선미가 이후에 세 들어 살고 있는 듯하다. 그는 채식주의자가 되어 있다. 몸이 안 좋은 것 같다. 더 이상 영화도 만들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만들 생각도 없어 보인다. 선미와 연인관계로 보이나 사이는 좋아 보이진 않는다. 선미는 경제적으로 어려워 보이고 병수도 크게 도움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들의 제주도행이 계속 미뤄지는 이유다.

혜옥과의 관계도 변해있다. 천장에서 물이 떨어져서 이를 언제 고쳐줄 수 있냐는 병수의 물음에 혜옥은 계속 애매모호한 답을 한다. 병수를 환대하며 감독님의 영화가 너무 좋다고 추켜세워주던 혜옥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병수도 혜옥에게 더 이상 사람 좋은 웃음을 짓지 못한다.

그러고 다시 컷이 바뀌면 4층. 병수는 옥탑에서 살고 있다. 혜옥의 노크 소리에 한참있다가 문을 연다. 들어가는 것 봤다고 화를 내는 혜옥에 못 이기는 척. 일전에 혜옥이 자신의 건물을 소개하며 병수에게 4층에 사는 세입자를 흉봤다. 집에 있는 걸 아는데도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며. 병수는 그 세입자와 비슷해져 있다. 그의 집에 찾아오는 연인은 선미가 아니다. 부동산 주인 지영이다. 그는 지영이 구워주는 고기를 열심히 먹는다. 더 이상 채식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렇게 시시각각 병수는 변한다. 그의 가치관, 먹는 음식, 종교, 취향, 인간관계. 그런 그를 다 같은 사람이라고 볼 수 있을까. 10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모든 게 변해있는데 과연 같다고 할 수 있을까? 시간이 흘러 변한 것뿐만이 아니다. 회사에서의 나와 집에서의 나도 확연히 다르다. 진짜 '나'는 뭐란 말인가.

내가 누구인지도 이렇게 가끔은 혼란스럽다. 그런데도 우리는 단편적으로 압축된 사건사고 뉴스를 읽으며, 또는 타인에게 이를 들으며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한다. 타인을 가뿐히 요약하고 가끔은 비겁하게 재단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우리가 정말 그 사람의 상황에 똑같이 처하면 우리라고 다를까? 이를 확신할 수 있을까?

영화에서 병수는 그렇지 못했다. 혜옥이 병수를 환대하던 시절, 4층을 소개하며 그곳에 사는 세입자를 험담을 때를 떠올려 보자. 병수는 주의 깊게 듣지 않고 그저 사람 좋은 웃음으로 답했다. 하지만 이후에 4층에 살게 된 병수는 혜옥이 험담한 4층 세입자의 행동을 똑같이 반복했다. 자신이 그러리라 병수라고 알았을까? 알았더라면 혜옥이 험담했을 때 바로 태클을 걸지 않았을까? 그게 좀 어렵다면 허허 거리며 동조의 의미라고 보일 수 있는 웃음소리라도 내지 않았겠지. 그때의 병수는 그냥 별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자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이야기니까.

우리도 그렇지 않나.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때 '나'와 거리가 멀어 보이면 , 내가 절대 처할 상황이 아닐 것 같으면, 보다 쉽게 판단하고 빠르게 평가한다. 자비는 없다. '나'는 다르다. '나'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는 잘못됐다. 나쁘다. 옳지 않다. 용서받을 수 없다. 아마 거기서 평가하는 '나'는 2층에서의 '나'겠지. 3층이나 4층에서의 '나'는 그 단호함에 대신 민망해할 것이다. 3층에서의 '나'와 4층에서의 '나'는 평가받는 입장일 테니 말이다.

2. 절대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던 정수도 한 달 만에 그만둔다.

병수의 딸인 정수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꿈꾼다. 이를 배우기 위해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혜옥을 아빠와 함께 찾아오며 영화는 시작된다. 병수가 없는 자리에서 정수는 아빠의 이중적인 면을 꼬집으며, 자기는 누구와 달리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고 한다. 혜옥의 밑에서 계속 배우겠다고. 몇 년이고 상관없다며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언제나 그렇게 단언하는 인물은 훗날 자신의 다짐을, 과거의 자신을 배신하리라. 극의 법칙 같은 거 아니겠는가. 정수는 한 달 만에 그만둔다. 이유는 미상.

영화를 찍기 시작하며 가정에 소홀해진 아빠 병수를, 정수는 탐탁지 않아 한다. 당연하다.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게다가 딸 입장에서 아빠의 변화는 도덕적으로 나쁘다. 그렇기에 자신이 속한 가족에 대한 배신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바람을 펴서 가장 상처받을 인물은 배우자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자식일 수도 있다. 이건 좀 애매하니까, 다른 말로 대신하겠다. 바람을 핀 인물이 가장 미안함을 느낄 인물은 자식이다. 배우자는 자신과의 결혼을 선택이라도 했지 자식은 자신을 아빠로 선택하지 않았으니까. 게다가 자신 때문에 태어난 게 아닌가. 자신이 이루기로 선택한 가정에서 말이다. 그런데 자신이 가정을 깨버렸으니까.

그렇기에 극 중에서 딸인 정수가 배신을 하는 역할로 나와야 했다. 그렇게 배신에 치를 떨 수밖에 없는 정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배신으로 보이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다는 걸 보여줘야 하니까.

그 상황에 직접 처해 보기 전까지는 우리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할지 알 수가 없다. 정말 경험해 보지 않고는 모른다. 게다가 나만 변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상황이 달라진 나를 대하는 타인들도 변한다.

그래서일까. 마지막 장면에서 정수는 병수와 보다 친해 보인다. 첫 장면에서 병수를 대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영화적 허용으로 정수가 인테리어 디자인을 그만둔 시간을 그새 겪고 온 것일까. 그 덕에 아빠를 이해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


3. 그럼에도 병수는 그 수많은 나를, 그 탑을 벗어나고 싶다


병수는 1층부터 4층까지 모든 곳에서 다양한 시간에 있었지만 실제로 건물을 소유하는 자는 혜옥이다. 혜옥은 시도 때도 없이 문을 두드리고 병수의 거주지에 들어온다. 천장에서 물이 며칠 동안 떨어져 스트레스를 받아도 혜옥이 고쳐줄 때까지 병수는 기다려야 한다. 건물은 병수의 것이 아니다. 그는 세입자다. 왤까. 왜 그는 자신이 소유한 건물에 살고 있지 않은 것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추론할 수 있는 가장 가능성 높은 이유는 아마 돈이다. 그는 자신이 거주하는 공간을 살 만큼의 돈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아직 잘 나가는 영화감독, 그래서 혜옥의 건물에 거주하지 않았던 2층 시절의 병수도, 돈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3층에서의 그는 돈이 없어서 제주도행을 미뤄야 했고. 4층에서의 그는 말할 것도 없다.

영화에서 병수는 시간이 갈수록 위층으로 올라간다. 바깥세상으로부터 고립된다고 볼 수 있다. 아직 건물에서 들어와 살기 전에는 건물에 거주하는 사람이 아닌 아르바이트생과도 대화를 나눴다. 심지어 영화사 대표를 만나러 건물을 나가기도 했다. 하지만 2층 3층 그리고 4층인 옥탑에서 살 때는 다르다. 3층에서 그는 자신의 동거인이자 연인이 돌아올 때까지 그저 기다리기만 할 뿐이다. 잔뜩 심통이 난 채로. 4층에서도 그는 자신의 연인이 집에 찾아오길 기다린다. 혜옥의 건물에  갇힌 걸로 볼 수 있다. 2층보다 3층, 3층보다 4층이 좀 더 폐쇄적이니 갈수록 그는 자신의 탑에, 정확히 말하면 혜옥이 소유한 탑에 갇혔다.

그는 4층인 옥탑에서 자신의 연인과 고기를 구워 먹는다. 하늘을 보고 바람을 맞으며 신이 자신에게 제주도에 가서 12편의 영화를 만들라고 했다고 말한다. 제주도에 가야겠다고 다시금 다짐한다. 3층에서의 병수 때 보다 자신감에 차 있다. 목소리도 우렁차고 밝다.  아마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듯하다. 탑으로부터 벗어나서 바깥세상, 제주도로 도망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자신감과 믿음의 원천은 옥탑인 4층이다. 그가 바깥세상으로 나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폐쇄적이고 고립된 4층에서 역설적으로. 옥탑은 하늘과 맞닿아 있으니까. 사실은 이전보다 더 어려워진 건데 말이다. 그는 이전보다 바깥세상에서 한층 더 올라와 있다. 내려가야 하는 계단이 더 많아진 현실을 모른다. 모른 척한다.

너무 나가고 싶으면, 나갈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런데 이전보다 자신의 처지는 나아진 게 없다. 외려 나빠졌다. 하늘과 맞닿은 옥탑에 살고 있는 걸론 부족하다. 그래서 그는 갑자기 신까지 만들어 낸다. 신이 자신에게 말했다고 외친다. 신께서  내게 제주도에 가라 했다고. 비루해진 나로부터는 그 어떤 자신감도 생겨나질 않으니 신의 말씀을 빌어 자신의 다짐에 당위성을 부여해 보는 것이다. 나는 이 탑으로부터 나가야 한다고. 그것이 신의 뜻이라고 말이다. 약해진 나를 강한 신으로 대체하며 앞으로의 삶을, 새로운 나를 꿈꿔본다. ​


그렇다. 병수는 도망치고 싶다. 그 수많은 내가 살고 있는 탑으로부터.  돈이 없어서 세 들어 살고 있는 그 탑으로부터 말이다. 그 수많은 내가 살지만, 혜옥의 소유인 그 탑으로부터. 이제까지의 나는, 그 수많은 나는 그 어떤 것도 내가 아니었으니까. 나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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