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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사원 모모씨 Apr 07. 2023

어지르는 사람과 치우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거라면

햇살엔 망각의 힘이 있다. 침대에 누워 나를 이따금씩 괴롭히는 생각으로 괴로워할 때, 우선 일어나서 씻고 나오면, 그래서 햇살을 맞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 잊어버리곤 한다​


그날도 유난히 햇살이 좋은 날이었다. 덕분에 무기력한 몸을 이끌고 나올 수 있었다. 집 근처 산 중턱에 있는 북카페에 가려고 이전부터 맘먹었던 날이기도 했고.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며 얼른 카페에 가서 카페인을 들이켜야지, 그리고 여러 책들의 표지를 구경하고 개중에서 몇 권은 목차까지 보고 읽고 싶은 책을 골라야지,라는 상상으로 산길을 열심히 오르고 있었다.

날이 좋아서 그런지 근처 고등학교에서 체험학습을 나온 모양이었다. 고등학생들이 삼삼오오 짝을 이뤄 줄지어 가고 있더라. 외이도염이 도진 탓에 난 이어폰 사용을 금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 탓에 혹은 덕에, 혈기왕성한 사춘기 소년들의 필터 없는 대화를, 거침없는 욕을, 상당히 큰 목청을 오랜만에 들을 수 있었다. ​


역시나 이 나이대의 친구들은 상스러운 말을 옆에 누가 있건 크게도 떠드는구나. 그래. 나 또한 이제껏 살면서 욕을 가장 자주 입에 올리던 시절이 저 때였지라며, 묵묵히 북카페를 향해 등반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내 옆에 있는 한 학생이 갑자기 빈 사이다 병을 냅다 길에 내다 꽂는 게 아니던가? 놓쳤다고 볼 수 없는, 누가 봐도 의도적인 쓰레기 투기였다! 이건 그 누구도 변명할 수 없다. 명백해!

경사가 진 곳이었기에 투기된 병은 데구루루 길을 미끄러져 갔다.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게 쓰레기를 버릴 수가 있는 것인가. 혼자 있던 것도 아니고, 친구들과 다 같이 현장학습을 왔는데! 심지어 학생들만 있는 게 아니고 이곳에 다양한 등반객이 있잖아? 담당 선생님도 앞에 계신 것 같은데?

같이 있는 무리의 친구들은 아무 일도 아닌 양, 마치 쓰레기 투기가 숨 쉬듯 자연스러운 일이 듯, 그들이 자주 사용하는 욕으로조차 그 친구를 타박하지 않았다. 깔깔거리며 “ 야 이 떙떙아, 쓰레기를 그냥 버리냐 땡땡냐?” 도 안 하다니. 아무도 그 행위에 관해 인식 조차 하고 있지 않다니. 도덕성이 아예 없잖아.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나 봐!

그전까지 그들을 향한 시각은 한창 시끄러울 때지 정도였다. 감정이 크게 섞이지 않았었다. 나의 관심은 오직 좋은 날씨, 곧 마시게 될 커피, 걸어오느라 힘들었으니까 시켜도 될 것 같은 디저트, 그리고 책 구경으로 충만했다. 그들에게 큰 관심을 두려 하지 않았다고.

저렇게 당당하게 내 근거리 시야에서 빈 사이다 병을 길에 냅다 꽂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더 이상 주변 풍광을 즐길 수 없었다. 나름 바른 자세로 걷고 있던 자세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목격한 이 사실을, 그리하여 끌어 오르는 감정을 바로 지금 당장 친구에게 전해야 했다. 얼른 바람막이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핸드폰을 꺼냈다

“야 지금 내 앞에 고등학생이 산에 냅다 사이다병 길에 던짐. 쓰레기를 그냥 버리네ㅋㅋㅋㅋ친구들끼리 욕하다 떠들다가 갑자기 병 던짐. ”

크게 인식하지 않았던 그들의 언행도 문제 삼았다. 어찌나 크게 욕을 하던지!! 생각해 보니까 공중도덕이 아니잖아. 클 만큼 컸으면서!  원래 처음 보는 순간부터 싫었어. 나의 평화로운 여유를 방해하다니. 나는 조용히! 나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길을 즐기고 싶었다고! 역시 인간이 문제야!!!!

내가 왜 인간에게 실망하고 인간이 사는 사회에 환멸이 나는지 엄지손가락으로 한 자 한 자 치고 있던 와중에,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난 뒤를 돌아봤다.

“ 야 이거 누구 건지 모르겠는데 일단 주워. “

그러자 다른 친구가 그 병을 줍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도르르 굴러 내려오고 있는 그 사이다 병을. 그들은 그 병을 들고선 다시 길을 올랐다. 자기들끼리 뭐라 뭐라 떠들면서. 그들은 한참을 떠들다가 쓰레기통이 나오자 그 병을 바닥에 내려놓고 한번 꾹 밟더니 버렸다. 별거 아닌 듯. 자연스럽게.

나는 그 후에 친구에게 그 사실을 다시 전했다. 야, 다른 친구가 그 쓰레기를 주워서 버렸어. 인류애가 충전됐어.

반성도 멋쩍게 덧붙였다. 호들갑 떨며 욕만 하던 나와 달리 쟤들은 그냥 묵묵히 치우네.

별생각 없이 삶을 계속 이어 나가다가도, 어느 때는 내일을 왜 살아야 하는 지를 고민했던 적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실망할 때는 어김없이 그랬다. 핸드폰으로 검색 포털을 열 때마다, 매 아침 문 앞에 놓인 신문을 펼칠 때마다, 채널을 돌리다가 뉴스프로에 머무를 때마다, 쏟아지는 사건사고를 보며, 오늘도, 오늘마저도를 떠올렸다. 지구 도처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을 여러 방법으로 전해 보고 들으며 말이다.

꼭 뉴스에 대서특필되는, 혹은 꼭지에 기재되는 일들만 그러한가. 내 주위 사람들도 이따금씩 실망을 안겨주질 않는가.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가르쳐주는 건 언제나 인간이지 않았던가. 그 얼마나 많은 날을, 시간을 울었던가. 서러웠던가.

그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인간을 믿지 않겠다고. 인류애는 곤두박칠을 쳤다. 거 봐라. 그럴 줄 알았지. 인간은 원래 그렇다며 체념하려고 했다. 무감각해지고 싶었다. 기대를 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없으니까.

어쩌면 나도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합리화를 하고 싶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일종의 사면인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나쁘다는 믿음은 때론 위로가 된다.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렇다고 그 이유를 나의 게으름과 무책임함에서 찾고 싶지는 않았다. 다들 내게 너무하는데 나만 좋은 사람으로 남아보려고 애쓰는 게 억울하기도 했다. ​


봐! 쓰레기 버릴 줄 알았어! 내가 딱 보자마자 알았지. 원래 인간이 그렇지 뭐, 나도 쓰레기 막 버리며 살아도 되는 거야.

그렇다. 나는 그런 사람에 가까웠다. 쓰레기를 버린 사람을 보면, 이게 인간이라며 나를 포함한 인간에게 회의감을 느끼는. 아주 쉽고 빠르게. 얼마나 편하고 깔끔한가. 내가 할 일이 많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면 난 떨어지는 쓰레기를 주울 필요가 없다. 쓰레기를 버린 사람을 향해서만 비난의 눈초리를 쓱 보내고, 주변 사람들에게 그를 욕하면 된다. 혐오감을 증폭하는 말을 전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그로써 난 몸과 맘, 모두 편하게 살 수 있다. 인간에 대한 기대를 접는다는 건 곧, 나에 대한 기대도 접어달라는 뜻이니까.

누가 버린 건지는 몰라도 우선 줍자라고 말한 친구와, 그 말을 듣고 별말 없이 그걸 주운 다른 친구. 그들이, 뉴스와 우리 주변에서 환멸을 증폭시키는 인류와 다른 종일리는 없다. 착하고 친절하고 완벽한 새로운 인류가 등장했다는 소식은 아직 어디서 도본 적이 없지 않은가.


수십 년 간 나와 동거한 어머니가 내게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 따로 있지!

만약 사회에도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치우는 사람이 따로 있는 거라면, 지금부터라도 치우는 사람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어지르는 사람이 그에 합당한 벌을 받고, 다신 어지르지 않게 문화를 조성하고 교육체계를 만드는 건 당연하다.

그 노력과 별개로, 우선은 개개인이 지금 당장 여기서 자신의 크고 작은 행동의 원천인 마음가짐을 바꿔보자는 것이다. 내 발 앞에 누군가 의도적으로 아니면 실수로, 아니면 불가피하게 버리게 된 쓰레기를 우선은 줍고 그것을 쓰레기통에 버려보자. ​


물론 버리는 사람이 더 눈에 띈다. 버리는 건 한 번으로 큰 인상을 남긴다. 그렇기에 뉴스거리가 된다. 그러한 강한 악을 선이 이기는 방법은 절대적인 숫자 밖에 없다. 양으로 우위를 점해서 이겨 버려야 한다.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 보려는 출발점은, 내가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의 모습대로 나부터 살아 보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기대한 것만을 얻을 수 있다.

힘을 보태보자. 어지르는 사람을 보고, 역시 인간들이라며 나도 그렇게 살아도 되겠다는 편리한 생각으로 귀결되지 말자. 더 나아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다짐하는 걸 막아보자. 어떻게? 쓰레기가 굴러가고 있을 때 내가 짠하고 나타나서 그걸 치워버리는 것이다. 보란 듯이.  그리고 그걸 보고 있는 사람에게 텔레파시를 보내는 것이다.

여봐라. 치우는 사람도 있단다. 그러니 너도 나와 함께 이걸 치우지 않겠니.

사람을, 사람이 사는 세상을 싫어하고 체념해 버리기엔 여전히 햇살은 좋고, 적당한 거리에 내가 좋아하는 북카페가 있다. 그곳의 커피맛은 꽤 괜찮으며 내 취향의 책들을 고르는 것은 행복이다. 날 살게 한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건, 결국 사람이고 세상이다. 내가 함께 어울려 살고 있고 살고 앞으로도 계속 쭉 살아갈.

떠날 수 없는 절이라면 중이 바뀌어야 한다. 중들이 하나둘 바뀌면 절 또한 바뀔 것이다. 어차피 절을 이루는 건 개개인의 중이니까.

(집에서도 치우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엄마 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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