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나를 씩씩하게 만들어주는 나에게
나름의 지난한 수험생활을 마무리 짓고 드디어 대학에 입학했을 때였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대학생의 자유를 맘껏 누리기도 전에 내게 찾아온 건 열패감이었다.
개강과 동시에 여러 동아리들이 신입 단원을 모집했다. 통성명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과선배들은 내게 자신들의 동아리 가입을 권유하곤 했다. 뭘 좋아하냐고, 취미가 무엇이냐고 물으며. 그때마다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것까진 괜찮았다. 그런데 모두가 나 같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건 그렇지 않았다. 나만 없었다. 어떤 이는 춤추는 걸, 누군가는 기타 치는 걸, 또 몇몇은 축구를 좋아하는 게 아니던가. 그러자 창피해졌다. 학창 시절까지 후회가 되기 시작했다. 이는 나의 과거를, 종국에는 나 자체를 부정하게 만들었다. 길게 잡아봤자 고작 6년 정도의 시기로 정체성을 부정한다는 게 웃기지만, 난 그때 고작 스무 살이었다. 장밋빛 미래를 꿈꿨는데, 미래는커녕 과거까지 우스워지니 괜히 열이 받았다. 그리고 우울했다.
난 꽤나 깊게 그리고 오래 방황했다. 그때 겨우 찾아낸 게 영화였다. 그래. 난 영화를 좋아해. 어렸을 때부터 이야기를 좋아했잖아! 처음에 떠오른 건 책이었지만 그건 좀 폼이 안 났다. 독서 동아리는 고리타분할 듯했다. 재미가 없어 보였다. 대안은 영화였다. 남들에게 소개할만한 취향을 찾자마자 바로 실행에 옮겼다. 동아리에 가입한 것이다. 첫자리에선 술을 꽤나 마시며 단원들과 가까워졌다. 엠티에 가서도 밤새 술을 마셨다. 그 후 드디어 우리끼리 ‘영화’라고 부르기로 한 영상물의 대본을 받아볼 수 있었다.
고참으로 보이는 한 선배가 쓴 대본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사실 무슨 내용인지, 정확히 말하면 대체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걸 왜 찍는 거지? 몇 명이 이걸 찍기 위해 고생할 가치가 있나? 란 의문은 들지 않았다. 들지 않으려 했다. 들지 않아야만 했으니까. 왜냐, 이건 내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물음표 따위가 머리에 떠다닐 순 없지 않은가.
회의란 회의는 죄다 참석했다. 매번 묵언수행을 했지만. 촬영현장도 항시 호기롭게 따라나섰다. 난 스크립터를 맡게 됐는데 아주 열심히 수행했다. 말 그대로 열심히. 대본대로 촬영하는지 확인했고 이를 기록했다. 아무도 그 기록물을 확인하진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사람은 많은데 할 일이 많지는 않고 하여, 새로 들어온 내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던 직책을 줬던 것 같다. 내가 없어도 영화는 잘만 찍힐 것을 알고 있었으나 알게 뭐람이란 맘으로 확인하고 쓰고 쓰고 썼다. 낮부터 밤까지 분주히 움직였다. 그렇게 나름의 노력을 들인 후 처음으로 결과물을 봤을 때, 감격을 받진 않았다. 그렇다고 실망을 하지도 않았다. 별 생각이 안 들었다. 그냥 동아리를 그만두게 됐다.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다. 회의감이 들 만큼, 동아리 활동을 길게 하지도, 매일을 밤낮없이 매달리지도 않았다. 단원들 중 누군가와 싸운 것도 아니었다. 싸울 만큼 깊은 관계를 맺은 친구가 있지도 않았다. 몇 번의 술자리에서 언제나 술을 꽤 마셨지만, 그땐 술을 즐겨했을 뿐이다. 그럼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걸 깨달았나. 그것도 아니었다. 난 정말로 영화를 좋아했다. 공강시간마다 도서관에서 영화를 보는 걸 즐겼다. 그러면 왜 그만뒀느냐. 그냥 정말 그냥 그만뒀다. 내가 좋아하는 걸 나도 해본다란 엄청난 뜻을 가지고 시작했지만, 끝에는 거창하게 붙일만한 이유는 없었다. 엄청난 이유 없이도 무언갈 시작할 수 있고 그만둘 수 있다는 걸 알게 됐달까.
동아리 생활은 길게 잡아봤자 4개월 남짓이고 영화라고 부를만한 영상을 찍은 것도 딱 한 편이다. 같이 영화를 찍었던 친구들과도 동아리 탈퇴와 동시에 연락이 끊겼고 당시에도 몇 번 술을 먹은 게 전부인 인연이었다. 그 이후에 영화를 찍어 본 적도 없고 언젠가 찍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그 시기를, 그 친구들을, 또 그 영화를 잊을 수 없는 이유는 그저 그때의 나 때문이다. 견뎌내려고 노력했던 과거의 내가 애틋해서. 침대에 누워서, 한 없이 사는 이유를 찾고 정체성을 고민하다가 ‘영화’를 결심한 후 일어선 내가 말이다. 영화 한 번 찍어보겠다고 동아리에 가입하고, 별 아이디어도 없으면서 회의에 매번 참석하고, 촬영 현장을 쫓아다니고, 아무도 보지 않을 기록임이 자명한데도 이를 열심히 기록하는 모든 행위가 내가 가진 힘을 쥐어 짜낸 결과였다. 살아보려고 애쓰는 방법이었다.
물론 아직도 나는 여전히 방황하고 있다. 그저 나이가 든다고 자연스레 마법처럼 씩씩해지는 건 아니기에, 여러모로 애쓰고 있는 중이다. 언제나 다음 날의 내가 더 씩씩할 거라 믿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살아보려 애쓰는 오늘의 내가 많아질 걸 알고 있기에. 영화를 찍고 소설을 쓰고 행사를 열고 운동을 하고 요리를 하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는. 처음부터 큰 뜻과 완벽한 계획 없이도 말이다. 그런 ‘나’들은 언제 기억해도 애틋하고 기특하다. 그리고 고맙다. 이렇게나 힘찬 지금의 나를 만들어주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