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을 보내며

by 회사원 모모씨

어김없이 연말이 왔습니다. 시간은 정확하게 흘러서 가차 없이 제 때 저희를 데려다 놓고야 맙니다. 무얼 꼭 해야만 시간이 지나가는 게 아니란 사실을 알면서도 매번 이맘때쯤 놀랍니다. 아니, 무얼 했다고, 올해가 벌써 다 끝나간다는 말인지. 슬프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여러 복합적인 감정이 듭니다. 다들 비슷한 맘이 들리라 짐작되어 구구절절 적지 않아도 될 것 같네요.

작년 이맘때쯤 이 공간에 저는 사랑하겠다는 다짐을 써 내려갔더군요. 매 연말에 하는 다짐입니다. 저만의 연례행사죠. 내년에는 좀 더 사랑하자, 그래도 끌어안아보자. 쉽게 등지지 말자고요. 매 연말연초 일기를 쓸 때마다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문장을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씁니다. 사랑하겠다고요. 매년 습관처럼 하던 다짐이 올해는 유독 밖으로 꺼내놓기가 쉽지 않네요. 삶을, 사람을, 세상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것을 잃는 게 좀 덜 슬프지 않을까, 사는 게 덜 힘겹지 않을까란 의문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죠.

영화 <레옹>에서 마틸다가 레옹에게 묻죠. 어른이 되면 사는 게 쉬워지냐고. 레옹은 언제나 어렵다고 답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사는 건 언제나 어려울까요. 고단한 삶, 사는 게 쉬워져야 살 맛이라도 날 텐데, 언제나 어렵다면 대체 인간들은 이 어렵고 힘든 나날을 굳이 왜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는 올해, 정확히 말하자면 연말이 유독 그랬습니다. 중부권에 무지막지하게 많이 내린 첫눈을 기억하시나요. 정말 죽으라고 내리던 그 폭설이요. 말 그대로 사나운 눈. 기상청 관측이래 11월에 내린 가장 많은 눈이라고 했죠. 지구가 따뜻해져서 발생한 기록적인 일이랍니다. 폭염 폭우 폭설, 사나운 날씨가 매해 찾아옵니다. 때마다 사람은 죽고 다칩니다. 자연재해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걸까요. 누군가는 영생을 누리겠다고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는 세상인데 말이죠. 자연에 도전하는 인간과 당하는 인간은 애초에 구별된 채로 태어나는 건가 싶습니다. 그냥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한없이 무력해집니다.

3일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인물이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꽤 많은 현재의 권력자들이 그를 따라서 가능한 일이었죠. 역사 속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시스템이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그 탓에 우리는 상식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던 것들이 죄다 부서지는 경험을 맞닥뜨려야만 했습니다. 여전히 그렇고요. 얼마나 길어지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무겁고 거대한 혼란을 어떻게 타개해 나갈 수 있을지 그림이 잘 안 그려집니다.

24년의 마지막 일요일에는 너무 많은 사람이 한 곳에서 세상을 떴습니다. 이 날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말이지, 삶을 사랑하기도 끌어안기도 등지지 않기도 너무 힘이 듭니다. 그저 그 어떤 것도 사랑하지 않은 채, 의도적으로 멀리한 채, 각자도생을 유일한 생존전략으로 품으며 나 하나만을 안고 사는 것만이 유일한 정답 같이 느껴집니다.

그런 모나고 못난 생각이 들 때 지속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웃기게도 또 사람 때문입니다. 나와 비슷한 무력과 환멸을 느낄 게 분명한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등지지 않고 눈 감지 않고, 뛰쳐나와 더 크게 사랑과 연대를 외치는 모습이 눈에 밟혀서요.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날, 아스팔트 위에 둘러앉고 서서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음식과 핫팩과 마음을 나누고 있지 않습니까. 갑작스러운 폭설에 갇힌 차를 꺼내겠다고 앞다퉈 달려들지를 않나. 유가족들에게 따뜻한 음식을 주려고 공항으로 나서기도 하고요. 시위 현장에, 공항에 수많은 이들이 수많은 이들을 위해 카페와 밥집에 선결제를 쌓아놓고 말이죠. 즉각적인 보상, 어쩌면 영원히 보상받지 못할지도 모를 선의를 보이잖아요. 사랑이 아니면 설명되지 않을 그 사랑스러운 에너지들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어요. 어찌 등질 수 있나요.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빚지고 있는데요.

레옹 말대로 사는 건 언제나 힘들 수 있습니다. 어른이 된다고 삶이 갑자기 쉬워지진 않겠죠. 그러나 저는 어른이 되면, 그러니까 사는 날이 길어질수록 그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눈에 많이 담고 귀로 많이 들을 수 있기에, 눈물날만큼 어려운 삶을 살아 나갈 때 버팀목을 더 많이 만들어 놓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올해는 매년 했던 다짐에서 조금 변주를 해보려 합니다. 살아가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사랑스러운 사람들의 모습을 조금 더 많이 보고 오래 기억하겠다고요. 영향력을 크게 느끼겠다고요. 그리고 나 또한 이를 많이 배우겠다고요. 각자도생을 하기엔 같은 시공간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가 얽히고설켜있음을 자꾸 알려주는 걸 어쩌겠습니까.

강한 악을 선이 이기는 방법은 절대적인 숫자뿐인 것 같습니다. 억울하지만 그래도 방법을 찾아낸 게 어디입니까. 양으로 우위를 점해봅시다.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 보려는 출발점은, 내가 같이 살고 싶은 사람의 모습대로 나부터 살아 보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우리가 기대한 것만을 얻을 수 있으니까요.

함께 오래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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