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만화책을 다룬 글에서 얘기한 것처럼 저는 야구를 참 좋아합니다. 보는 것은 물론 직접 뛰는 것도 즐기지요.
아버지 영향이 컸습니다. 꼬맹이 때부터 당시 대단했다던 고교야구에 대해 들었고, 초등학교에 입학하기도 전인 1982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를 아버지 옆에서 TV로 함께 봤습니다. 몇 년 뒤 태평양 돌핀스가 수원에서 하는 시범경기 직관도 함께 했었지요. (저는 프로야구 원년부터 쭉 베어스, 특히 박철순 선수의 팬인데... 마침 이 시범경기에 오랜 기간 부상을 겪던 박철순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회사 야구 동호회에서 활동도 하셨고, 두어 번 구경도 갔습니다. 후보 우익수였고, “동호회에서도 안타를 쳐본 기억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면 야구 센스가 뛰어나진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보고 듣고 말하며, 실전에 나서기까지 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야구를 즐기셨습니다. (사실, 아버지께선 운동신경이 있는 편은 아닙니다. 퇴직 후 생활체육으로 하신 배드민턴에서 조금 두각을 나타냈지만, 곧 허리 디스크 수술을 해서 이어가진 못하셨습니다.) 이런 아버지와 어린 시절 캐치볼을 했으니, 저 또한 자연히 야구를 좋아할 수밖에 없었지요. 야구는 참 즐거운 운동입니다.
엄청나게 야구를 좋아하고, 주변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선수 생활을 이어가려는 이가 있습니다. 영화 <야구소녀>의 주인공 ‘주수인’이 그 주인공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 주수인은 뛰어난 실력으로 ‘천재 야구소녀’라고 불리기도 했던,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고교 야구부 여자선수입니다. 그녀의 꿈은 졸업 후 프로구단에 입단해 야구를 계속해나가는 것! 하지만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사실 고교 입학할 때만 해도 대단한 구속과 회전력을 지닌 선수였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이제 키도 체력도 다른 선수들보다 떨어지고, 시속 130km를 갓 넘는 구속으론 어디 가서 명함조차 내밀 수 없는 게 현실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테스트 기회라도 주어졌으면 좋겠습니다.
마침 새로운 코치 최진태가 부임합니다. 수인에게 프로선수는 될 수 없단 걸 일깨워주는 게 그의 역할인 것 같습니다. “남자들도 상대할 수 있다”며 마운드에 오른 수인을 가벼운 코칭 한마디로 눌러버리고, 그녀의 체력적 한계를 그대로 드러나게 합니다. 어쩌면 진태로서는 수인에게 가장 적절한 코치의 모습을 보인 것 같습니다. 프로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버리지 못해 서른이 훌쩍 지나도록 독립구단을 전전하다 프로도 못 되고 지도자 라이선스도 받지 못한 채 지금에 이른 게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루지 못할 꿈을 빨리 포기해야 수인이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꼭 반항아인 법입니다. 진태가 한계를 알려줬음에도 불구하고 도전을 멈추지 않는 수인. 이제 그녀의 도전에 진태가 합세합니다. 그녀는 과연 프로선수가 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이 내 미래를 어떻게 알아요? 나도 모르는데….전 해보지 않고 포기 안 해요.”
여성이 프로야구 선수가 된다는 것.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속 150km 이상의 강속구를 뽐내는 이들도 공 끝에 힘이 없거나 제구를 못 하면 오르지 못하는 게 프로 무대입니다. 아무리 회전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최고구속이 134km밖에 안 되는 선수를 주목할 리 없습니다. (물론 매덕스나 유희관 같은 선수가 있긴 하지만, 그들도 수인보다는 빨랐습니다. 유희관은 대학에서 4년 내내 활약을 보였는데도 드래프트 6순위로 간신히 프로선수가 됐습니다.) 시간을 지나오며 걸러질 사람은 다 떨어져 나간 것이지요. 영화 속에서도 리틀야구를 함께 뛴 수많은 동기 중에 고3 때까지 남은 건 그녀를 비롯해 단 둘뿐이었습니다. 그녀가 프로구단의 선택을 받지 못한 건 여자라서가 아니라 실력 부족이기 때문이라고 봄이 정확합니다.
배우 이주영이 연기한 주인공 주수인. 어릴 땐 남들보다 크고 빨랐을지 몰라도 지금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고교 야구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학교의 졸업반이자, 입단 테스트 응시원서를 접수한 학생에게 테스트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가혹합니다. 가혹한 게 아니라 잘못된 것이지요. ‘여자가 뭘 할 수 있겠어?’, ‘프로야구는 남자의 스포츠야’란 선입견이 낳은 차별입니다. 그래서인지 “야구는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여자건 남자건, 그건 장점도 단점도 아니에요.”란 수인의 말이 더욱 또렷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십수 년간 프로선수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온 선수를 ‘그대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외면할 권리는 이 사회에 없습니다. 수인의 도전이 없었다면 그런 차별과 불평등이 버젓이 있었는지도 몰랐겠지요. 포기하지 않고 꿈을 좇은 수인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단점은 절대 보완되지 않아, 단점을 보완시키려면 장점을 키워야 돼.”
야구소녀 수인은 연습벌레지만, 아무리 피범벅이 되며 연습을 하더라도 시속 150km는커녕 140km에 이를 수도 없습니다. 이미 고3이 될 때까지 엄청나게 연습해 봤겠지요. 안 되는 건 안 되는 법입니다. 그녀의 몸이 가진 단점은 절대 보완되지 않습니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 진태는 알았습니다. 속도를 높이는 게 아닌, 유연한 수인의 특성을 살린 구종을 더욱 연마하는 것이지요. 아마 그도 선수 시절, 느린 구속을 끌어올리기 위해 무척 노력했을 겁니다. 하지만 실패했고, 나중에야 새로운 대안을 발견했을 것 같습니다. 자기를 꼭 닮은 그녀만큼은 꼭 꿈을 이루게 해 주고 싶지 않았을까요?프로까지는 안 되더라도, 일단 도전에 나서는 그녀가 최선의 모습을 보인 후 결과에 납득하게끔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코치 진철에게 수인은 고교시절 자화상과 같습니다. 수인을 통해 다시 한 번 꿈을 불타웁니다.
상대가 치지 못하는 마구 너클볼은 진태와 수인의 합작으로 태어났습니다. 진태의 조언을 수인이 무시했다면, 수인의 노력이 진태의 지도에 미치지 못했다면 만들어질 수 없었지요. 너클볼을 장착한 수인, 덕분에 130km대의 느린 직구도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됐습니다. 결국, 장점을 키워 단점이 보완됐습니다.
조직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저마다 개성을 지닌 구성원들이 모여 팀을 이룹니다. 표준화에 익숙한 우리는 기획력, 보고서 작성, 발표 능력, 커뮤니케이션 스킬이나 외국어 등 다양한 역량에 대해 기준치를 정해 놓고 떨어지는 부분을 보완해나가도록 합니다. 이를 통해 전체적으로 평균 이상의 역량으로 업그레이드된 구성원들의 집합체이면서도, 뭔가 내세울 만한 특성은 없는 어중간한 팀이 되기도 합니다. 팀원들 개개인의 강점을 극대화한 ‘결정구’가 사라졌다고 할까요? 장점을 살린 구종을 통해 공 배합의 완성도를 높인 것처럼, 구성원의 장점을 더욱 키울 수 있는 조직관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는 얘가 야구만 할 수 있다면 뭐든 좋은데요. 저희가 형편이 그렇게 좋지 못해서요. 한두 달만 시간을 주시면 제가 어떻게든 구해보겠습니다.”
마지막 부분을 보며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사정은 이해하지만, 수인이의 엄마가 너무 돈만 밝히는 듯해서 영화 보는 내내 좀 짜증이 났었거든요. 하지만 엄마는 엄마네요. “빨리 포기해, 그거 부끄러운 거 아니야”라며 딸을 하루라도 빨리 공장에 취직시키려 했던 그녀의 행동은 돈이 아닌, 딸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야구가 끝나도 삶은 끝난 게 아니라는, 꿈은 또 꾸면 된다는 걸 알려주려는 것이었달까요? (마지막 대사에 취해 너무 미화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 엄마 참 밉상입니다만, 뭐... 딸을 사랑하는 엄마란 건 분명합니다!
프로야구 2군 계약금이 6천만원이란 구단주의 제안에 “정말 죄송하다”며 답한 말. 제가 꼽는 명대사입니다. 앞으로 수인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비록 수인이 프로선수로 더는 전진하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 가족은 새로운 내일을 꿈꿀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무모해 보이는,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꿈을 향해 모든 것을 거는 도전! 젊음은 참 부럽습니다. 나도 내 미래를 모르는 건 야구소녀 수인과 같은데... 저도 좀 젊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