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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혜영 Sep 14. 2022

보리차 예찬

매일 퇴근  샤워하고 나와서 냉장고에 넣어둔 시원한 보리차를 마신다. 보리차 티백을 넣어둔 유리병을 꺼내서 유리잔에 따라 마시면 기분이 좋다. 새 티백을 넣고 처음 먹는 물은 너무 진하지만 두 번째 우려낸 물은 먹기 딱 알맞은 농도의 구수함이다. 내게 보리차는 하루 끝의 위로이자 갈증 해소제인 것이다.


내가 보리차를 무척 좋아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본다. 병원 응급실 출입과 입원이 잦았던 어린 시절에는 금식을 많이 했다. 병원 검사 일정에 맞추기 위한 금식이거나 위급한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금식이었다. 아프면 입맛이 없어서 무언가 먹고 싶진 않지만 가장 먹고 싶었던 것은 바로 시원한 물이었다. 요즘처럼 정수기가 흔치 않았던 시절에 내가 다니던 병원에는 기다란 스테인리스 물통에 항상 보리차가 들어있었다. 금식이 풀리면 엄마는  보리차를  와서 가장 먼저 먹였다. 그럼 나는 타들어갈  같은 갈증이 해소되어 눈이 떠졌다. 타들어가는 목을 부드럽고 시원하게 달래는 . 보리차는 대단한 음식도 아니고 흔한데 나에게는 생명수 같았다. 병실에 입원해서도  먹기 싫다고 투정 부리며 결국 먹겠다는 것은 보리차였다.


자라서 학교에 갈 때 종종 보리차를 끓여서 싸갔다. 쉬는 시간 특히 여름에 얼린 보리차를 가져가서 녹기를 기다렸다가 알맞게 녹아서 시원해진 보리차를 마시면 짜릿한 기분이었다.


요즘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대학생 때 병원에 정기검진을 가면 병원에서 자원봉사를 하시는 분들이 보리차를 종이컵에 담아 나누어 줬다. 그럼 나는 그분들을 지켜보다가 검사가 끝나자마자 가서  한잔을 받아온다. 이상하게  먹는 보리차보다  한잔 받아오는  물이 꿀맛같이 느껴지는 것은 금식과 검사가 끝난  바로 마시기 때문인  같다. 보리차는 금식이 끝난  해방을 알리는 물이었다.


가끔 일이 있어서 서울에 올라간다. 신경을 곤두세워 해결해야 할 일을 마치고 나면 정신적 탈진 상태가 찾아온다. 그럴 때 나는 보리차 한 병을 사기 위해서 서둘러 자판기나 편의점을 찾는다. 가끔 2+1 행사를 하면 나는 3병을 사서 그 자리에서 한 병을 마시고 한 병은 가방에 넣고 나머지 한 병은 내려가는 차 안이나 이동하는 지하철 대기 중에 나눠 마신다. 보리차가 옆에 있으면 타지에 온 설움도 일이 어렵게 되어 속상한 마음도 피곤한 몸도 비빌 언덕이 생긴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 나는 출근하면 하는 행동이 있다. 보리차 티백을 뜯어서 뜨거운 물과 찬물의 비율을 잘 맞추어 보리차를 우려내는 것이다. 한 모금 마시면 출근길 숨참을 달래고 오전에 그 한 컵을 마시며 일을 할 힘을 얻는다.


보리차는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과 같이 경쟁할  있는 유일한 기호식품이다. 아이스크림을 먹을지 보리차를 마실지 냉장고 앞에 서서 고민할 가치가 있는 소중한 보리차다. 보리차는 아이스크림 앞에  나를 선택 장애로 만드는 음식이다. 이토록 내가 사랑하는 차다.


몇 년 전 술을 먹지 못하는 내 귀에 무알콜 맥주가 나왔다는 소식이 들렸다. 신기하기도 하고 친구에게 무알코올 맥주 먹어보았냐 물어보았다. 내 오랜 시간을 지켜본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왜 마셔보게?"

"음... 궁금하잖아?"

"넌 마실 필요가 없어"

"왜?"

"넌 이미 무알콜 맥주 같은 것을 맥주 마시듯 마시고 있어"

"그게 뭔데?"

"네 사랑 보리차, 넌 보리차 한 병을 시원하게 원샷하고 캬~ 하며 웃는데 그건 마치 맥주캔 마시는 사람의 모습이란 말이지"

"그래?"

"그래 그러니까 괜히 비싼 무알콜 맥주 사 먹지 말고 마시던 보리차나 열심히 마셔 맥주나 보리차나~"

"그래 맥주도 보리음료네"


본가에 왔더니 정수기 물만 있다. 몇 병 급하게 산 보리차도 떨어졌다. 냉장고 문을 열어 보리차를 찾았는데 아침에 마신 것이 마지막 보리차였다. 내일 아침 나가서 보리차 티백을 사 와야겠다. 허전한 마음을 달래면서 정수기가 내려준 정수물만 한가득 컵에 담아 방에 들어왔다. 하루 끝이 허전한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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