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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혜영 Oct 15. 2022

암환자가 된 엄마와의 대화

나는 마음이 찢어져있을 때는 글을 쓸 수 없다. 찢어진 마음이 조금이라도 기워져야 글을 쓸 여력이 생긴다. 슬픔이 크면 말 문이 막히듯 글 문이 막혀서 어떤 단어도 생각나지 않는다. 예술가들은 극도의 고통과 슬픔을 겪고 난 후 예술 혼이 더욱 커져서 작품에 드러난다고 하는데 나는 예술가는 아닌 듯하다.


사람이 아프면 인생을  의미를 잃어버릴 때가 있다. 내가 삶의 의미를 내려놓고 싶은  순간 마지막 의미가 되어준 것은 엄마다. 엄마는 타고난 건강인이다.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가는 나이에 몸에 칼을 대는 수술 한번 하지 않으셨고 지병이 없어서 매일 먹는 약도 없다. 다만 자식인 내가 많이 아파서 애간장이 녹은 탓인지 위염과 위경련은 자주 있는 일이다.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에 얻은 알레르기성 비염이나 화학약품에 의한 알레르기성 피부염이 가끔 찾아와 엄마를 괴롭게 하지만 그래도 타고난 건강을 자부하면서 용가리 통뼈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엄마였다. 그런데 절대 아프지 않을  같은 엄마에게 유방암이 찾아왔다.


9월에 진단을 받고 수술 후 10월이 되었다. 나는 엄마가 아픈걸 안 날부터 계속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혼자 엉엉 울다가 저번 주부터는 혼자 있을 때도 무척 덤덤하게 일상을 살고 있다. 이런 일은 갑자기 찾아와서 당혹감을 주지만 갑자기라고 하기에는 신은 매번 예고장을 날려주었다. 알아차리지 못하고 마음 어디 한구석에서 뭔가 불길해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 이렇게 무탈한 일상이 내 생에 있던 적이 있나 싶은 봄날이었다.


올봄 4월 가족여행으로 처음 제주도에 갔다. 제주도 여행 중 엄마에게 국가 건강검진 결과를 알리는 전화가 걸려왔다.

"유방암 검진 결과 큰 이상 없어 보이는데 혹시 예전에 가슴 부위를 다친 적 있나요?"

"없는데요"

"그럼 2년 후 검사받으세요"

그런데 2년 후 검사를 받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 그 말을 잘 들었다면 올해 제주도 가족여행이 처음이자 마지막일 뻔했다.


나는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이상이 없다는 전화가 마음에 놓이지 않았다. 내 앞에서 훌러덩훌러덩 옷을 갈아입는 엄마를 보면 교과서에서 볼법한 모양 그대로 변해가고 있었다.

"엄마 다시 검사해봐"

"이상 없다고 전화받았잖아~"

"그래도 아무리 봐도 이상해 빨리 가봐"

"괜찮아 엄마는 암 안 걸려 집안에 암환자 한 명도 없잖아 늙어서 그래"

"그래도 이상해 초음파를 해봐"


그렇게 미루고 미루다가 9월이 되었다. 선선한 가을밤,  하루 중 가장 긴 월요일 퇴근 후 또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아있다가 잠시 엄마와 통화를 하려고 전화를 했다. 재검사 결과가 나온다고 했는데 왜 아직도 안 알려주지 하면서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아 짜증이 살짝 난 상태였다. 항상 전화하곤 했던 시간에 전화가 되지 않았고 검진 결과가 나오는 날인데 설마 했다. 짜증은 혹시 모를 불행한 소식에 내 두려움이 자리 잡은 감정이었다. 드디어 엄마와 통화가 되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결과를 독촉한 끝에 나온 엄마의 대답은


"암 이래"


나는 더 이상 쿵 떨어질 심장이 더 이상 쪼개지면 안 될 심장이 더는 타들어가면 안 될 심장이 멈춘 듯했다. 이후에 뭐라고 전화에 대고 화를 냈는지 모르겠다. 화를 내면 안 되는데 화를 냈다. 며칠 전 진즉에 나온 결과를 속이고 속여 화요일 몰래 병원에 가려다가 진실을 말한 엄마였다. 내가 주말에 몸살이 나있어서 하루라도 편히 쉬게 해주고 싶었다고 했다. 괜히 걱정하고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고 오진이길 바랬다는 말에 나는 기가 막혔다. 21세기에 신파 찍는 것도 아니고 뭐 하는 거냐며 사이코패스처럼 화를 냈다. 왜 말을 안했냐는 내 원망에 도저히 암이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 말에 작년에 나 혼자 정기검진을 갔다가 상태가 나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엄마에게 어떻게 말을 할까 고민하던 내가 떠올랐다. 그 마음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 나중에 괜찮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나면 더욱 속상할 엄마를 생각해서 서울에서 몰래 울고 가서 본가에 내려가서는 속없이 웃으며 말했는데 엄마는 엄마만 생각했다면서 이차로 화를 냈다.


나는 일단 전화를 끊고 직장에 연락을 해서 다음날 급하게 하루 연가를 냈다. 엄마 혼자 가겠다는 말을 무시하고 오진일 거라 믿는 엄마에게

"엄마 암 맞아 나도 그러길 바라지만 이건 그냥 봐도 암이야"하면서 고향에서 올라오는 엄마를 기차에서 만나서 서울에 있는 병원에 갔다.


엄마는 "올해 김장 안 해" 이 말은 이제 거짓말이 될 수 없다.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렸는데 정말 못하게 되니 자취를 시작할 때 받아온 김치 한통이 조금씩 줄어드는 것이 마늘을 한 움큼 집어먹은 듯 가슴이 아리다.


코로나 때문에 상주 보호자 일인만 출입이 가능해서 내가 상주 보호자를 했다. 검사부터 수술까지 나는 혼자 남겨지면 쉴 새 없이 울다가 곁에 사람이 있으면 언제 울었냐 싶게 떠들어댔다.


수술 후 마취가 덜 깨서 비몽사몽 한 엄마가 무통주사를 맞지 않아서 아프다고 울 때 나는 속이 상해서 울다가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엄마 두 시간 있다가 울어 숨 쉬어야 해 들이마시고 내쉬고 다시 숨 쉬고~"

마취약이 들숨 날숨에 다 배출되고 다시 폐가 쫙쫙 펴지길 바라면서 같이 호흡했다.

한참 내 숨을 따라 쉬던 엄마가 아프다면서 돌아가신 엄마를 찾으며 울었다. 나는 엄마가 아니라 딸인데 외할머니는 없어라고 하다가 다시 울컥해서 덩달아 울었다. 딸인데 하는 내 대답에 엄마는 엄마의 엄마를 보지 못한다는 서러움과 함께 우리 딸 하고 또 울었다. 엄마의 눈물 버튼이 연달아서 눌러졌다.


눈물도 조금 줄고 엄마의 수술 부위 통증도 조금 줄어들어 퇴원을 했다. 퇴원을 하고 엄마와 나눈 말은 모녀지간이 흔히 하는 대화 같지 않았다.


"엄마 나도 판막 2기에 발견했잖아 엄마는 암 2기에 발견했고 그러니 괜찮을 거야"

"엄마는 전이도 됐잖아"

"그래도 요즘은 의술이 좋아졌잖아 적어도 나 환갑잔치할 때까진 살아야지"

"그래야지"

"내가 가는 모임에서 혜영이 환갑잔치까지 모임 하자는 게 건배사인데 엄마는 내 환갑잔치는 봐야지 내 칠순잔치도 보고"

"응"

"수술하고 관을 넣었다가 뺀 부위가 아파"

"사람 몸에 관이 들어갔다 나오면 원래 다 아픈가 봐 나도 카테타 넣고 빼고 나서 한동안 아니 꽤 오래 감각도 무디고 아팠어 그런데 시간이 지나야 괜찮아져"

"수술한 데가 부었어"

"나도 그때 심장 시술하고 부었어 그런데 서서히 가라앉더라고"

무언가 뒤바뀌었다. 보통은 엄마가 수술하고 나서 아프다고 하면 자식은 아직 아픔을 겪어보지 않아서 우리 엄마 고생이네 정도가 최선의 위로일 텐데 나는 반대다. 내가 먼저 겪어봐서 아주 덤덤하게 마치 남처럼 "응 그게 아파 그리고 시간이 지나야 해" 말하면서 엄마를 한번 더 울린다.

"그렇게 아플 때 우리 딸 혼자 뒀는데"

"응 괜찮았어 혼자 잘 놀았어"


아파서 울고 속상해서 울고 딸이 걸려서 우는 엄마에게 이제는 수술하고 두 시간이 훌쩍 지났으니 울고 싶으면 실컷 울라고 했다. 엄마는 한참 울다가 전화로 다른 암환자였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심장질환자인 나와는 또 느낌이 다른 공감이 다른 암환자들과 이야기를 하는 엄마를 보며 내가 처음 판막질환을 진단받고 다른 환자는 어떻게 일상생활을 하는지 궁금해서 하루에도 몇 번씩 환우회 카페를 들락거린 때가 생각났다. 지금 엄마에게 가장 좋은 대화 상대는 내가 아니라 암환자나 암을 겪은 사람일 것이라고...


몇 시간 후에는 수술 후 첫 외래진료가 있다. 앞으로의 항암 계획과 약물과 방사선 일정을 정하게 될 것이다. 나는 내일 엄마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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