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청년정치의 변화를 기대하며, 10월 23일 민주당 전국위원장 선거까지 페이스북에 (가능하다면) 매일 글을 올리고자 합니다. 민주당에 청년정치는 언제부턴가 꺼내선 안될 단어가 되었습니다. 소위 민주당 '청년정치인'의 삽질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10~20년 전과는 사뭇 달라진 청년들의 태도에도 원인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청년들은 왜 정치를 '나쁜 것'이라고 생각할까요? 민주당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나아가 민주당의 청년정치인들은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할까요? 짧게나마 글로써 고민을 이어나가보고자 합니다. 자유로운 토론을 환영합니다.
박정희는 40대에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1971년, 파란을 일으킨 김대중 역시 40대였습니다. 김영삼 또한 40대에 '40대 기수론'을 펼치며 대선에 도전했습니다. 김대중, 김영삼 모두 2~30대에 총선에 출마하고 당선되는 청년정치인이었습니다. 86세대의 대표격이었던 김민석 또한 30대에 서울시장 선거에 도전했고, 40대 대통령의 기대감을 키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청년정치는 마치 해리포터의 볼드모트처럼 마치 언급해선 안될 것 같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청년정치를 대표하는 가치 또한 불명확하고, 불안정합니다. 그나마 청년정치를 대표한다는 인물로 민주당에선 전용기, 장경태, 보수진영에서는 이준석, 천하람 등이 있지만, 이들을 중심으로 청년세대의 담론이 형성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2030 유권자가 전체 유권자의 1/3을 차지한 현 시점에서, 정치는 아직도 50대에 멈춰있습니다. 일각에서는 586이 권력을 독점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또 다른 일각에서는 청년을 외부에서 수혈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모두 논리적으로 타당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청년세대를 객체화한 개념들은 현상에 대한 근거가 되기엔 부족합니다.
2021년, 이준석이 미래통합당 당대표에 당선됐습니다. 언론은 '이준석 현상'이라며 대서특필하고, 소위 오피니언 리더들은 청년정치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민주당은 박지현을 영입했고, 그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박지현과 이준석 다음의 청년정치는 아직 나타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 내 인재에게 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박지현과 이준석에게 분노한 대부분의 당원과 국민을 설득하기엔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회를 보장하길 바란다는 주장 대신 기회를 줄 수 밖에 없는 경쟁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지금의 사회는 과연 그 경쟁력을 보여줄 수 있는 사회일까요?
2005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미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간 것 같다"며 "우리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원천이 시장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벌권력에 대한 투항이냐는 해석도 난무했지만, 정치권력 또한 자본에 지배되는 구조가 형성됐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합니다.
'여의도 2시 청년'이라는 표현이 한때 이슈였습니다. 사회생활 경험 없이 정치권을 어슬렁거리는 청년들, 즉 정치 말고는 사회생활을 해본 적 없는 청년들을 비하하는 표현이지요. 모두가 잘 알겠지만, 정치에 뜻을 품은 청년에게 가장 큰 장벽은 '돈'입니다. 돈이 있는 자에게 대개 인맥과 조직이 따라오기 마련이니, 돈이 없는 정치 지망생들이 맨주먹으로 인맥과 조직을 구성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돈은 모든 생활요소에 개입합니다. 청년이 되어서는 어찌저찌 오늘을 갈아서 정치적 미래를 도모한다지만, 지금의 현대사회는 노후대비까지 고민해야 하니 마냥 지금의 시간을 불확실한 미래에 베팅하기는 쉽지 않지요. 그렇기에 저 또한 주변으로부터 "정치를 하고 싶다면 안정적 직장 또는 직업을 구하라"는 걱정 어린 조언을 듣곤 합니다. 변호사든, 노무사든 전문직을 따 놓아야 어떻게든 정치를 포기하더라도 살아갈 구멍이 생기지 않겠냐는 것이겠지요.
고도화된 자본주의 덕에 권위주의는 상당 부분 타파되었지만, 되려 자본이 생활의 모든 영역에 개입하고, 그 탓에 돈을 제외한 정치 자체의 독자적 역할 또한 축소되고 있습니다. 어찌 보면 민주화와 경제성장의 역설이기도 할 것입니다.
과거 KBS에서 "20대가 분노한 이유"를 묻는 여론조사를 한 바가 있습니다. 20대가 분노한 요인으로 양극화가 42.7%, 저성장이 21.9%, 기성세대의 기득권화 16.4%라는 답변이 나왔습니다. 우리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이면서 정치권에서는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그래서 정치권이 가장 외면하고 있는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장주의'와 '생존'은 곧 20대의 사고체계를 규정하는 표현이 되었습니다. 과거 학생운동과 학생담론을 이끌었던 총학생회장들은 되려 보수화되거나 정치와 거리를 두며 정당 입당을 꺼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인식 체계에 정치는 '나쁜 것'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물론 미디어나 언론의 영향도 있겠지만, 가장 가려운 영역 또는 가장 분노하는 영역을 정치권이 외면하며, 정작 망언에 가까운 발언들을 쏟아내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일례로, 최근 민주당의 '금투세 토론회'에 한 국회의원이 "주식이 우하향할 것이라는 신념을 갖고 계신다면 인버스에 투자하면 될 것 아니냐"고 발언한 바가 있었습니다. 이 발언에 에타, 블라인드, 디시 등 2030세대가 주로 사용하는 커뮤니티가 하루종일 불탔습니다. "나라가 망하는 데에 베팅하라니, 이것이 국회의원이 할 말이냐"며 말입니다. 물론 이 국회의원은 입장문을 통해 '비꼬는 과정에서 나온 표현'이라고 해명했지만, 아직도 분노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만큼 정치를 향한 불신과 분노가 거세다는 방증이겠지요.
이 연장선으로 가보자면, 청년들에게 사회적 발언권이 꼭 없지만은 않습니다. 국회의원을 향한 문자폭탄, SNS 댓글폭탄, 커뮤니티를 통한 여론 조성 등 제도 밖 가상공간에서 청년들의 발언권은 자유롭고 또 청년들은 이를 적절히 활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발언권이 결정권을 대체하는 수준으로 다다라 증오와 혐오가 지배하는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한편, 시장을 향한 불안감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정치보다 시장에 더 큰 불안감을 갖고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청년세대로 하여금 의지할 수 있는 장치가 되어야 할 정치는 우리의 분노를 외면하니, 학벌, 면허, 사원증 등 시장에서 부여하는 특권에 매몰되는 것이고, 이것을 쟁취하는 것이 공정의 가치를 대체하며 '능력주의'라는 불안정한 이론으로 귀결됩니다. ("지금의 청년들은 무한경쟁사회에 익숙해졌다"와 같은 더 깊은 주장들은 나중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를 이용한 정치인들이 대거 나타나 '반시장적인 가치'를 '공정'에 대입해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과 한 몸이 된 에타와 오르비 등의 명문대생들은 능력주의를 부르짖으며 한국 사회에 마지막으로 남은 '반시장적 요소'를 갈망합니다. '공정사회'와 '사회적 양극화 해소'라는 사회적 담론의 장이 붕괴되는 것이지요.
우리 정치권은 지방자치제가 부활한 이후로부터 '풀뿌리 민주주의'를 강조해왔습니다. 지방자치제에 따른 책임정치를 확보하기 위해 정당 공천제를 시행하기도 했고, 지금은 지구당 설치를 통한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런 제도들, 모두 좋습니다. 하지만, 생활정치가 보장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구당 설치와 같은 제도가 과연 '정치개혁'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지금 당장, 청년당원들은 본업을 가진 상태로 정치활동을 하는 생활정치가 가능할까요? 아마 대다수의 당원들은 불가할 것입니다. 사회안전망의 부실과 함께 선진국 대비 높은 노동시간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이전에, 애초에 청년에게 정치는 불공정한 영역입니다. 공정한 경쟁을 지향한다 한들, 실제로는 (공평할 지는 몰라도) 공정하지는 않기에 청년들에게 정치 진입은 불리했습니다. 개인의 역량이나 꾸준한 활동에 있어서는 기성 세대를 뛰어넘을 수 있다 하더라도, 돈과 배경이 요구되는 순간 청년들은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청년정치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곧 청년정치가 지금껏 문제가 된 원인이기도 했습니다. 기성정치가 바뀌어야 청년정치가 바뀌지만, 또한 청년정치가 바뀌어야 기성정치가 바뀌기도 하는 유기적 관계성이 형성되어 있단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청년정치는 어떤 주장을 해야하며,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