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뮤니티 디너'

나의 산티아고, 21일째

by OIM

10.22 Leon~Villares de orbigo

1. 하루 쉬었다고 걷기 싫은 것 봐라. (대)도시를 빠져나가는데만도 한참 걸리자 이내 고개를 든 생각은 '또 걷고 있네'.

2. 쉰 탓인지 원인이 뭔지 발 뒤쪽에 물집이 생겼다. 뒷꿈치, 그러니까 발바닥과 그 외 부분을 나누는 경계 부분쯤이 쓸리는 듯 하더니 기어코 작게 기포가 오른 모양이다. 아프다. 그렇게 아픈 건 아닌데 성가시게 아프다. 따갑다고 할까. 나한테 물집 같은 건 해당사항 없을 줄 알았더니?

3. 오늘은 36km 걸었다. 요즘은 대략 40km 정돈 무난하다 느끼는데 40을 넘어가면 고민이 시작된다. 오늘도 그렇다. 38km 지점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숙소 평점이 별로다. 그 다음 마을은 7km 떨어져 있어 사실상 45km를 가게 된다. 그러면 이게 고민거리가 되면서 안 갈 확률이 높아지는 식이다. 38에서 40, 40에서 42, 이런 거리는 보통 긍정으로 수렴하는데, 35 다음 거점이 42 같은 식이면 부정으로 수렴한다. 오늘도 그래서 36km 지점에서 멈췄다.

4. 작은 마을. 알베르게 두 곳에 매우 작은 슈퍼마켓 하나, 레스토랑은 두세 개 있는데 두 곳은 오늘 문 닫았고 한 곳은 어딨는지 안 보인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그런가.

5. 호스트가 저녁은 "커뮤니티 디너"라는데 이게 대체 무슨 뜻인지 누가 좀 알려주면 좋겠다. 그러니까 다 같이 모여서 먹는 저녁이라는? 다 같이 모여서 먹어야 한다는? 그런 의미 외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거나 뭘 해야 한다거나 어떤 의미를 내포한 건가. 스페인 와서 종종 이 문구를 보거나 말을 듣는데 그래서 정확히 이게 뭔지 아직도 모르겠다. 거부해도 실례가 아니고 뭐 그런가?

6. 숙박비 저렴해서 왔는데 저녁 먹고 그 대가로 도네이션 하면서 오히려 더 썼다. 마을에 딱히 밥 먹을 데도 없고 밥 자체도 풍족하게 먹어서 불만은 없는데 뭔가 계획대로 안 된...

7. 저녁 메뉴는 호박죽(스프?)-샐러드+참치볶음밥-정체불명파이-아이스크림에 와인을 곁들인 코스요리. 은근 배부른데다 처음에 파이 보고 정어리 파이인 줄 알고 식겁했다. 파이에 박힌 게 생선이 아니고 햄인 듯. 언뜻 피쉬 어쩌고 들은 듯한데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샐러드와 볶음밥이 좋았다. 스프도 괜찮았다. 파이도 뭐. 다 먹고 '오르하'? 라고 하는 32도짜리 술을 아주 작은 잔에 주더라. 술을 꿀과 섞은 그런 거라는데 달았다. 단데 확 올라오는. 그러고도 티나 커피 먹을 거냐고 묻길래 사양하고 침대로 왔다. 어지간 하면 비싸서 저녁 안 사먹는데 이 정도 먹었으면 10유로 안 내곤 안되겠더라. 다른 서양애들도 10유로 내더라. 도네이션 액수 정하는 게 매번 어려운 거 보면 나는 참 글렀다.

8. 오늘 숙소 멤버는 호스트를 포함해 6명인데 나만 한국(동양)인이다. 내 옆자리 남성은 '데드풀'인 줄. 저녁자리 두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말했다. 맞은 편 중년 부부 중 남편은 초반에 조용하다가 데드풀에 자극 받아 말문이 터졌다. 좌측 상석에 앉은 할아저씨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흡사하다. 근데 폰은 갤럭시 엣지다. 아저씨는 말이 없었는데, 저녁 자리 내내 입을 연 횟수가 손에 꼽는다. 심지어 졸기까지 했다. 나는 두 시간동안 스페인어를 알아듣는 척 다양한 표정과 리액션으로 연기를 이어갔는데 두 시간 내내 들어도 무슨 말인지 짐작도 안 간다. 이 기묘한 테이블은 희한하게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간다.

9. 사실 데드풀만 아니었으면 오늘 8인실 혼자 쓰는 건데 뒤늦게 데드풀이 숙소에 도착했다.

10. 물집도 생겼고 내일은 40km 걸어야 한다. 고도도 1400m 이상 올라간다. 급격한 경사로도 있다. 여러모로 휴식이 필요해보인다. 일찍 나서야겠다. -라고 마음만 먹어본다.

오늘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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