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1 Leon.
1. 쉬기로 작정한 날. 한가하게 보냈다. 일어나서 바나나 까먹고 동네 산책 나섰다. 털레털레 걷는데 입김 나온다. 춥다. 기온을 보니 6도다. 사람들이 패딩에 목도리를 둘렀다. 나는 바람막이에 경량패딩을 입었지만 그게 전부다. 오들오들 떨며 가게로 향했다. 카페, 바, 레스토랑 그런 것들을 찾았다. 길 건너 레스토랑을 발견하곤 급하게 입장. 아, 따숩..
2. 카페콘레체와 또르띠아를 주문했다. 내 짧은 스페인 생활의 시그니쳐 메뉴 같은 것. (실은 콜라가 시그니쳐다) 어딜 가든 카페콘레체는 다 있는 듯한데 문제는 가격. 이번엔 얼말까 내심 기대해봤는데 이게 웬 일. 두 개 다 해서 1.2유로란다. 사실 "우노 베아뜨"(?)라길래 잘 몰라서 2유로 냈다. '우노'가 '1'인 건 알지. 대도시의 서비스는 굉장하구나, 라며 가게를 나섰다. 이틀 전만 해도 다른 마을에서 같은 메뉴에 4.5유로 냈는데 여긴 뭐 오전 10시까지 아메리카노 1500원, 그런 식인 건가. 이러면 다른 마을 가서 불만이 커진다. '레온에선 1.2유로 받던데' 같은 생각이 자리 잡는단 말이지.
3. 언 몸을 녹이고 까르푸 매장에 갔다. 숙소 앞이라 가깝다. 한국에선 찾아보기 힘든 매장이 여기선 잘 나가는 모양이다. 이마트나 홈플러스 정도 규모다. 물건도 저렴하다. 장갑이 1.9유로부터 3.9유로 정도. 패딩은 29유로 짜리도 있다. 먹거린 더 싸다. 점심 거리와 장갑(한 쪽 잃어버림), 세면용품 등을 사서 숙소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보니 과자 잔뜩. 맛이 궁금해서..
4. 점심을 해결한 뒤 한숨 잤다. 레온대성당과 보티네스 저택은 둘 다 오후 4시까지 브레이크 타임이다. 잠시 졸다가 3시에 숙소를 나섰다. 말했듯 숙소는 중심 시가지에서 거리가 있는지라 2km 정돈 걸어나가야 한다. 카메라를 챙겨 모처럼 구경하러 시내행.
5. 레온대성당부터 갔다. 규모가 말도 안되게 컸다. 그래서 '대'성당인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카메라에 건물 전체가 안 담겼다. 이것저것 시도하다가 실패. 명확하게 할 게 없으면 여지없이 사진을 못 찍는다. 오늘도 마찬가지.
6. 6유로 내고 대성당에 들어갔다. 웅장했다. 고딕양식이니 뭐니 그런 건 잘 모른다. 활자로만 접한 탓이다. 천장이 높았고 스테인 글라스가 찬란했다. 성당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보였다. '찍으러 간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여기저기 셔터를 남발하다가 배터리가 떨어지고, 건질 사진은 없는 상황에 처한다. 혼자 실망..
7. 성당을 나왔는데 화장실이 급했다. 날이 쌀쌀한 탓이다. 사실 성당에서부터 급했다. 근데 여긴 공중화장실이란 게 잘 없는 동네, 스페인이지. 한 번 위기가 왔다가 넘어갔다. 그래서 방심했다가 보티네스 저택 앞에서 경을 칠 뻔 했다. 유우럽줌싸개 칭호 얻는 줄. 담담하게 적지만 실화다. 근처 카페서 카페콘레체 시키고 위기를 넘겼는데, 임계점 다가올 땐 주문할 시간에 지릴 것 같단 생각까지 했다. 더러운 이야기 ㅈㅅ.
8. 이런 이유로 사진은 발로 찍고, gr3 배터리는 (체감상) 광탈하고, 건질 사진 없고, 블랙베리로 찍은 게 더 낫고. ...오늘 거의 반성의 날인데?
9. 수습기자 때 현장 가면 '깨지겠다' 직감할 때가 있다. 완전 새로운 현장. 그러니까 '각'이 안 나오는 현장이 있다. 여기저기 살펴도 앵글이나 주제 같은 게 안 보이는 그런 곳. 그런 곳에선 대체로 뭘 부각하고 뭘 담아야 할지 감도 못 잡는다. 이것저것 다 찍다가 주제 없는 사진 나오고 마감 늦고 결국 욕먹는다. 이걸 찍기 전부터 안다. 오늘이 그랬다. 나쁜 예감은 늘.
10. 보티네스 저택 들어가려다가 말았다. 카메라 배터리도 없는데다 별로 안 끌렸다. 무엇보다 성당엔 사람들이 문전성신데 저택은 외부만 경유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저택 앞 벤치에 앉아 한동안 구름 구경했다. 하늘 좋다, 그런 생각.
11. 도시엔 활기가 있다. 사람들이 많고 다양하다. 이들이 공유하는 문화가 있고 삶의 형태 또한 제각각이다. 스쳐가는 이의 눈에 도시는 흥미로운 구경거리이자 아쉬움을 수반하는 즐거움이다. 그저 하루 머물렀다고, 도시 곳곳에 애정을 흩뿌린다. 아무 연고, 아무 이유, 아무 연관 없는 타인의 시선이 블럭마다 추억보정 한가득 기억을 담아간다.
12. 빛에 따라 색이 들어오는 색조안경 말고 그냥 안경 쓰고 올 걸. 여분 안경이라도 챙겨올 걸. 차라리 선글라스 챙길 생각을 애초에 하지 말 걸. 있는 그대로 색과 빛을 바라볼 수 없어서 이건 좀 후회스럽고.
13. 온전한 타인. 아무도 나를 모르는 스페인 도시 한복판에 앉아서 든 생각. 앉은 자리가 서울이라 해도 달라질 건 없는데.
14. 레온. 잘 쉬었다.
오늘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