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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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제습기를 써봤다. 효과는 뛰어났다. 하지만 효과를 확인하기까지 시행착오를 겪었다. 고장 난 제습기를 사 온 줄 알았다.
한동안 제습기에서 찬바람만 나왔다. 물통에 물도 모이지 않았다. 컴프레서 고장 등 불길한 설명이 인터넷에 난무했다. '이걸 몇 만 원이나 주고 사다니' 솔직한 심정이었다.
'기울이지 마시오'라는 설명도 보였다. 제습기는 눕히거나 뒤집으면 안 된다고. 운반 과정에서 뒷좌석에 가로로 싣고 아무렇게나 굴린 게 생각났다. 이래서 고장 났나 싶었다.
급했다. 거래하러 갔더니 주차할 데가 마땅찮았다. 거래 장소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 사이 판매자가 물건을 들고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어쩔 줄 모르는 나를 보곤 신호 대기 중인 내 차로 판매자가 다가왔다. 15kg에 육박하는 제습기를 낑낑 들고 말이다. 도로에서 제습기를 냅다 싣고 도주하듯 운반한 이유다.
친절했다. 판매자의 면면에서 잘 샀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찬바람을 마주하니 인간에 대한 불신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일희일비에 저항하지 못하고 기분이 널을 뛰었다. 한참 인상 쓴 뒤에야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 방은 기본적으로 습도가 낮았다.
그런 이유로 오토 기능을 끄고 강제 제습(연속 제습) 기능을 켰더니 더운 바람이 나왔다. 성능 시험을 한다고 빨래도 돌렸다. 아침에 빠짝 마른빨래들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물통의 물도 비웠다. 자연을 거스르는 기술 문명의 힘이란.
대게 수요일은 한 주의 가운데 콕 박혀서 어떤 표정으로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곤 하는데, 고작 빨래 하나로 상승선을 그릴 줄은 몰랐다. 얄팍한 성정도 이럴 때는 득이 된다. 희비가 뚜렷한 인간은 다른 말로 솔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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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에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적다 보니 가끔 무서울 때가 있다. 갑자기 글의 조회수가 늘어날 때가 그렇다. 예전처럼 포털이나 카카오톡에 글이 소개되면서 수천이나 만 명 단위로 유입자가 늘 때를 제외하면 이곳은 그냥 몇몇 분들이 찾아오는 일기장이나 마찬가지이다. 일상 이야기와 소수의 독자로 맞춰지는 균형 같은 것, 그게 일기를 적는 또 하나의 묘미인데 균형이 깨어질 때가 가아끔 있다.
예컨대 누군가 우연히 흘러들어왔다가 이전 글을 읽고 가는 경우가 있다. 그날은 글의 개수만큼 조회수가 는다. 하루하루를 기록한 별것 없는 장이라도 별스럽게 내 역사를 훑고 가면 어딘지 오싹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이런 일에 대해 '공개된 곳에 글을 적으면서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은 모순 아닌가'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아는 것과 느끼는 것 사이의 유기성은 깊지 않은 것 같았다.
한때 그런 생각도 했다. 공책에 수기하거나 비공개로 적으면 될 일 아닐까. 하지만 물리적으로 기록물을 남기면 이사 과정에 유실되거나 어떤 식으로든 누군가는 보게 된다. 내가 해마다 쓰는 다이어리가 그랬다. 비공개 글은 가끔 적는다. 성격 면에서 공개적인 글과 확연히 다르다. 의도한 게 아니라 쓰고 나서 경향성을 발견했다. 재미는 없다.
그래서 결정한 게 봐도 되는 글만 쓰자는 것이다. 그렇게 모인 글들이 블로그나 브런치의 주력 콘텐츠가 됐다. 그랬는데, 막상 100개 단위로 훑고 가는 사람이 생기면 '으잌' 소리가 절로 튀어나온다.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싶으면서 정작 가까이 다가오면 '왜...' 같은 속내를 품게 되는 극 내향형 인간이라 그럴까. 블로그든 커피숍이든 적당한 거리감은 항상 내게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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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노력은 중요한 요소이지만 노력과 성취 사이에 유기적인 인과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 것이 좋다는 문구를 어디선가 봤다. 목표로 향하는 길엔 수많은 가변 요인이 있고, 노력은 성취를 설명하기에 가장 편리한 요인에 불과하다는 내용이었다. 때문에 목표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은 노력 부족 등을 이유로 자신을 갉아먹는 일이 생기고, 이룬 자와 그렇지 못한 자 사이에 보이지 않는 계급을 나누는 기준으로 노력의 정도가 손쉽게 차용된다는 것이다. 속된 말로 '저 사람만큼 노력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상황을 손쉽게 받아들이려는 편의주의적 해석이라는 건데, 역으로 보면 '정말 너는 저 사람보다 노력을 덜 했어?'라는 물음으로도 풀이된다. 사람마다 해석은 제각각이겠지만 나는 꽤 그럴싸한 시각 같았다. 실제로 기억에 남아서 이렇게 적고 있는 걸 보니.
최근에 서점 사이트를 둘러보다가 '평평함은 문명의 상징이다'라는 것을 주제로 한 책을 발견했다. 인간의 문명은 평면에 깃들어 있고, 도시, 건축, 농경 등 역사의 면면은 언제나 평면을 베이스로 한다는 얘기도 눈에 띄었다. 이 역시 흥미로운 이야기였는데, 새로운 시각을 바탕으로 쓴 책이 의외로 근거가 부실한 경우가 많아서 장바구니에 담아놓고 이틀째 고민 중이다. 돈을 많이 벌어야 이런 고민을 안 할 텐데. 누차 말하지만 매달 일정 금액을 지불하면 책을 좀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도서 바우처 제도라도 생겼으면 좋겠다. 서양처럼 재생지를 이용하더라도 말이다. 활자를 구걸하는 가난한 직장인들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