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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라 Apr 16. 2024

아플 때만 생각 나는 사람

[귤죽]

감기에 걸렸다. 


겨우내 걸리지 않다가 봄이 오려니 또 감기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도 곧잘 그렇다. 이제는 감기에 걸리면 계절이 바뀌려나보다, 신호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감기 걸릴 때 병원에 가면 일주일만에 낫고, 안 가면 7일 걸린다는 우스갯소리가 얼마나 진지한 농담인지를 나이 들어 알게 되었다. 요즘은 24시간 약국이 흔하고, 편의점에서 약을 다 구할 수 있으니 전보다 더 빨리 낫는 게 당연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약을 먹으나 안 먹으나 낫는 시간은 비슷한 듯 하다. 어릴 적, 엄마는 내가 감기에 걸리면 약부터 사먹이는 법이 없었다. 배숙이나 파뿌리 차, 계란을 실처럼 푼 묽은 쌀죽 등을 만들어 주었다. 아무것도 못 먹겠다, 그래도 일단은 먹어야 기력이 생긴다면서 내 몸을 일으켜 억지로 입 안에 두 세 숟갈 밀어 넣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약을 사다 줬으면, 했다. 한 줌도 안 되는 약, 입 안에 털어 넣고서 취한 듯 푹 자고 일어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아플 때마다 엄마가 해 준 음식이 그렇게 그립다. 감기약이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세상이 됐지만, 그 보약 같은 음식은 어디에도 팔지 않으니. 


죽이라도 시켜 먹을까, 하고 핸드폰을 열어 배달 어플을 열었다. 동네에 죽집이 다섯 군데가 넘었다. 그런데 죽 1인분이 1만 2천 원인데 최소 주문이 1만 5천 원이었다. 거기다 배송료는 5만 원 이상 무료. 결제 직전에 폰을 덮었다. 1인분도 다 못 먹을 거 같은데 2인분을 주문할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다 먹고 난 후 플라스틱 쓰레기 처리는 또 어떻고. 


침대에 누워 간단하게 요기할만한 거 뭐 없을까, 머리를 굴리다 문득 생각이 났다. 서귀포, 한 식당에서 본 바로 그 음식. 언젠가 집에서 한 번 만들어봤는데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 놀랐던 그것, 바로 귤죽!


사실 죽이란 음식은 본디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만드는 음식이기 때문에 귤죽을 죽이라 불러도 좋을지 모르겠다만, 만든 이가 그렇게 부르기도 했고, 그 모양이 죽과 같기는 하니까.


만드는 방법은 그저 귤 까서 냄비에 넣은 후 으깨어가며 끓이면 된다. 귤즙이 흥건히 배어 나오면 따끈하고도 달큼한 귤죽, 완성이다. 귤은 비타민 c가 풍부해 감기에 효과적이긴 하지만 찬 성질 때문에 복통 내지는 설사를 유발하기도 한다. 하지만 데워 먹으면 그 같은 탈 없이 효능만 누릴 수 있으니 감기에 이만한 게 또 있을까. 따뜻한 귤죽을 입 안에 넣으니 온몸에 싱싱한 생기가 퍼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테이블 위 귤죽 한 그릇 차려 놓고서 앉아 있으니 갑자기 나는 엄마가 아플 때 돌봐준 적이 있던가, 돌이켜 보게 되었다. 그 흔한 감기라 해도 그 곁을 지켜준 적이라는 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엄마가 아파서 누워 있는 장면이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가 한 번도 아프지 않았던 게 아니라 좀처럼 티 내지 않았던 거겠지. 아니면 내가 그토록 무심했던 거였을까. 나는 귤죽을 홀짝거리다 말고 훌쩍거리며 울었다. 엄마를 신경 써주지 못했던 것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아플 때만 엄마를 생각한다는 게, 맛있는 거 먹을 때, 좋은 데 가서 멋진 것 구경할 때에는 내 가족만 생각하면서 이럴 때에만 엄마를 그리워한다는 게, 그게 미안해 울었다.


언젠가 엄마에게 귤죽을 끓여줘야지. 한 번만 해먹어 보라 아무리 말해도 이미 충분히 맛있는 귤을 뭐하러 데우느냐고 통 시큰둥하기 때문. 아, 먹어보아야 아는데. 귤에서 고소한 맛이 다 난다는 거. 뜨거운 열을 가해도 결코 잃지 않는 그 싱그러움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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